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57) 부모는 땅속에 묻고, 자식은 가슴속에 묻는다

* 묻곡 : 묻고

부모든 자식이든 죽으면 땅속에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데 자식은 죽으면 땅속에 묻는다 하지 않고 가슴속에 묻는다고 했다. 그것은 다른 무엇에 비할 수 없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보다 앞서 눈을 감는다는 것은 부모의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는 일이다. 
  
이 속담은, 부모의 죽음보다 자식의 죽음이 더 애통한 것임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비슷한 속담이 있다.

“자식은 보내 뒁도 할긋할긋 지드린다”(자식은 보내 두고도 할긋할긋 기다린다)

‘할긋할긋’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아내는 부사다. 참혹한 일을 당해 애태우는 제주인의 섬세한 성정(性情)을 나타낸 말로 제주방언이 갖는 독특한 정감을 느끼게 한다. 방언은 거칠고 투박한 것 같으면서도 이런 섬세한 표현들이 적지 않다.

세상에 어느 부모치고 제 자식을 아끼고 그리워하지 않으랴. 큰 뜻을 품고 잠시 먼 데로 떠나가는 자식과의 헤어짐에도 가슴을 쓸어내리거늘,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이별이 있다.

참척(慘慽).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부모가 그 자식을 앞세운다.’는 말이다. 이에 더할 가슴 아픈 일이 있으랴.
  
이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을 알지 못하는 아픔이고 슬픔이다. ‘참척당한 부모에게 하는 조의(弔意)는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도 모진 고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부모의 죽음을 천붕지괴(天崩地壞), 곧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에 비유하고, 자식의 죽음을 참척 또는 단장지애(斷腸之哀: 창자가 끊어지는 애달픔)이라 한다. 더욱이 한 가문의 대(代)를 이을 아들의 죽음은 ‘상명(喪明)’이라 해 온다. 자식을 묻는 것은 태양을 묻는 것처럼 온 천지가 캄캄해지는 일이라는 뜻이다.

남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아 온 사람도 참척을 당하면, 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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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 젖을 걱정에 비닐 씌우고 도보행진 이어가는 세월호 유가족 세월호 유가족들이 2015년 4월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마포역을 지나며 비가 내리는 굳은 날씨에 영정이 비에 젖지 않기 위해 비닐을 씌우고 가슴에 품고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자신의 성품과 꼭 닮아 그토록 사랑했던 셋째 아들 면을 잃은 충무공 이순신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하거늘”이라며 자식하고 생사를 맞바꿀 수 없음을 한탄했다.

자신의 문학을 이해한 둘째 아들을 잃은 조선시대의 문호 〈오우가〉, 〈어부사시사〉의 고산 윤선도는 “가을바람 불고 달 밝은 밤이면 내 어찌 너 없이 누각에 오를 수 있으랴”며 즐기던 음풍농월(吟風弄月)을 끊었다.

늦은 나이에 겨우 얻은 네 살배기 아들을 추락사로 잃은 애리 클랩튼은 한동안 알코올 중독과 자학적 삶에 침몰해 힘들어 했다 한다.

〈나목〉의 故 박완서 작가도 생전에 참척의 고통을 당했던 분이다. 

운명이라는 것일까. 남편을 잃은 슬픔을 채 추스르기도 전 어느 날, 분신 같던 외아들(젊은 의사)을 불의의 교통사고로 잃었다. 아무 예고도 없이,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경황도 주지 않은 채 자신의 곁을 떠났다.
  
작가는 스스로 “이건 소설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일기다”라 했다. 자식을 앞세운 참척의 창망(悵惘)한 심경을 피를 토하듯 토정한 것. 참척의 고통을 당한 어미의 비통한 심경이 그대로 기록된 게 그의 일기다. 
 
실제로 통곡 대신 미친 듯이 끼적거린 그의 일기에는 앞서 간 아들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 자신이 겪고 있는 극한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무정한 세상에 대한 분노, 우리 인생의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에 대한 저주가 뒤섞여 있다.
  
그것은 도무지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환난이나 시험이나 고난을 만났을 때 우리가 언제든지 가질 수밖에 없는 솔직한 양심의 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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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참사 특위 청문회, 수습사진 공개에 눈물 흘리는 유가족 세월호 참사 희생자 정동수 학생의 아버지 정성욱씨가 2015년 12월 16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 YWCA에서 열린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목포해양경찰청으로부터 건네받은 아들의 수습 당시 찍은 사진을 공개하자, 방청석에 앉아 있는 유가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부몬 땅속에 묻곡, 자식은 가슴속에 묻나.” 

인간사에 이에 더할 참담한 일이 있으랴. 가난이야 부지런은 하늘도 돕는다 하고, 한때의 실패야 딛고 일어서면 될 것이지만, 차마 못 볼 일이 부모가 그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참척이다. 한 세상 살며 그런 슬픔만 당하지 않아도 복락을 누리는 것일 터인데….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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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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