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현장]제8회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위령제
골령골서 대전과 4.3유족회가 만나다
장마철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유족들의 애절한 바람을 꺽지는 못했다.
늘 그랬듯이 태풍 '에위니아'의 북상 소식에도 아랑곳 없이 4.3 유족들은 대전 골령골 골짜기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해 참혹하게 죽어간 4.3 원혼들의 넋을 달랬다.
일곱번째 순례길. 모든 게 일곱번째였다. 대전 골령골 학살터 현지에서 열린 제주4.3희생자 행방불명인 위령제에는 유족 185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날 유족들은 마음속으로 이 곳에서 희생된 300여 명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르며 영문도 모른 채 대전형무소로 끌려가 억울한 생을 마감한 영혼들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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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학살 현장에서 처음 노래보시를 한 최상돈씨는 이어도, 4.3후손의 노래, '동백꽃 피기전에~'로 시작하는 무명곡을 불러 유족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대전지역 유족들은 "저희 후손들은 이승만을 비롯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40여년간의 군사독재시3절에 입한번 뻥긋 못한 채 슬픔과 분노를 가슴에 안고 살아야만 했다"고 울분을 달랬다.
이어 "불법재판에 의해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선량한 양민들을 무차별 살인을 저지른 불의한 공권력을 철저히 진상규명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령제에는 대전 지역구 의원인 김원웅, 선병렬 국회의원과 강창일 의원을 비롯해 채의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상임대표(문경유족회장)과 각계 사회단체 회원 등 유래없이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에앞서 조희열 전통춤보존회가 학살당한 혼들의 넋을 달래는 위무공연을 펼쳤고, 김경훈 제주시인과 신순란 유족회원(시인)이 추모시를 낭독했다.
2년 전 "4.3평화공원이 조성되면 대전 골령골의 영혼들을 모시고 싶다"던 김익중 전 대전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원혼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에따라 제주4.3유족회와 4.3유족회 대전특별위원회는 매년 7월 전국 형무소 순례때마다 현지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유족들은 골령골 위령제에 이어 오후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현장을 찾아 한국전쟁 당시 3500여명이 학살당한 인권 유린의 현장을 확인한다.
<대전 골령골 산내학살이란?> |
수형인들의 대부분은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자, 전쟁직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 이었다. 1950년 7월 6, 7일 양일에 걸쳐 명적계를 보고 분류된 수형인 중 사상범들은 8-10일 사흘에 걸쳐 대전시 산내면 골령골로 끌려가 미군과 사회 유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원 학살당했다. 그러나 학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형무소 관계자들이 3일간 수형인들을 끌고나갔다고 증언하는 것과 달리 현장 총살집행자 등 관련자들은 학살이 총 10일간 진행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주변에 살던 주민들도 열흘간 학살이 진행되었다는 동일한 증언을 하고 있다. 이는 수형인 학살 이후, 대전 지역의 보도연맹원과 좌익 관련 활동 전력이 있는 이들을 예비검속하여 모두 학살하였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즉 형무소 사상범 외에도 군경이 후퇴를 시작한 7월 14일∼16일 막판까지 골령골에서는 학살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된 수는 해제된 미군문서에서는 여순사건 관련자 1200명, 제주4.3사건 관련자 300명 등 총 1800명이라고 하고 있으나 3000명 이상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앨런 위닝턴 등 외신기사는 7000-8000명이 학살된 것을 보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