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최초의 인문고전 전문도서관인 제주치과의사신협 부설 불기도서관(관장 신용래)이 2018년 새해를 맞아 2월 중순부터 ‘자본주의와 인간’ 특강을 마련했다. 중상주의에서 현대 행동경제학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자들이 바라본 자본주의 체제와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우리 사회의 방향을 고민해볼 수 있는 자리다. <제주의소리>가 창간 14주년을 맞아 불기도서관과 공동기획으로 <인문강좌 톺아보기> 코너를 마련했다. ‘자본주의와 인간’ 특강을 시작으로 불기도서관이 연중 진행하는 인문고전 강좌를 곱씹어 뜯어보는 ‘다시 읽기’ 시간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말> 

[불기 인문강좌 톺아보기-자본주의와 인간](1)초기 자본주의 형성 단계의 인간 ─ 중상주의와 애덤 스미스를 중심으로 / 김광수 성균관대 교수

요즘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가 ‘행복’에 관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매년 국민소득은 성장하고 있지만 행복지수는 후퇴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이스털린 역설’이라 부르는데, 미국 이스털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인당 실질 GDP의 상승과 행복도 사이에는 비례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제는 행복을 위해 경제성장이 아닌 다른 요인을 함께 생각해야 할 때이다.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는 목적도 결국 개인과 사회 구성원의 행복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본 강좌에서 보게 될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 케인스, 하이에크, 폴라니 등의 경제학자들은 행복한 시민과 사회를 만들고, 스스로 그러한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무엇인가를 경제적 측면에서 얘기한 학자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실세계 인간은 합리적이지만은 않다
학문이나 지식은, 주어진 복잡다층적인 외부 세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복합 차원을 줄이고 ‘모델링’(모형화)을 하여 유추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사회는 크게 ‘사회공동체’, ‘국가’, ‘사회경제조직’, ‘시장’이라는 네 가지 모형으로 구분된다. 굳이 이런 식으로 구분하여 놓은 것은 각각의 층위 안의 인간본성, 즉 동기가 각기 달라 환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 주류 경제학에서는 시장이라는 특정 층위에서 작용하는 인간 본성의 기본 모형을 ‘합리성’이라고 가정한다. 이기심(self-interest)을 아주 철저하게, 마치 신이 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예측, 계산해서 최적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 합리성의 개념이다. 그런데 현실세계의 인간은 합리적이지만은 않다. 예를 들면, 급여를 적게 주는 곳보다 많이 주는 곳을 찾기 마련이지만, 이직하지 않고 적게 주는 곳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조직규정이 작용하는 제3세계 속 동기(예: 독특한 사내 조직규정과 문화)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그간의 주류경제학은 시장이라는 제4세계에 초점을 맞추어 과학적으로 사회를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경제활동의 세계에서도 시장 너머의 영역, 즉 사회적 가치판단, 정부의 개입이나 기업 내부 지시의 영역 사이의 상호관계에 관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오늘날에는 경제영역에서도 합리성이나 이성 이외에도 감성체계가 실제 인간을 움직이는 더 강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이것이 최근에 새롭게 출현한 ‘행동경제학’의 주요 견해이며, 새로운 모형 설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동자는 가난과 무지랭이?
오늘의 주제로 본격적인 시작을 해보자. 상업혁명 이후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18세기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면,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이전 프랑스의 경우, 2%의 국왕, 성직자, 귀족들만이 기득권을 쥐고(영국은 3%) 나머지 98%의 평민들은 참정권이 없고 도리어 세금 부담만 가중되던 때였다. 한편, 당시에는 농업경제가 가장 중요한 영역이었고, 공장의 분업화가 점차 도입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18세기 말 이후의 산업혁명은 정치혁명처럼 사회 전반적으로 획기적 변화가 일시적으로 일어나기보다는 아주 느린 속도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상적으로는, 1500년 이후 1750년에 걸쳐 근대 초기 자본주의의 이행기에 유럽을 중심으로 ‘중상주의’ 경제사조 및 정책이 나타났다. 중상주의는 통일적 국민국가의 형성과 국력증진을 목적으로 한다. 그 수단으로 식민지를 확보하여 싼 값에 원료와 노동력을 사들이고 비싼 값에 완성품을 수출하여 국부(금은)을 획득하고자 했으며, 국가 차원의 강한 통제와 보호무역을 추구했다. ‘이기심으로 충만한 인간’이 ‘물질을 추구한다’라는 것이 중상주의의 기본적인 인간관이자 핵심 가정이다. 그리고 국가의 부와 다수 대중 간의 이익 사이에는 부조화가 필연적이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예컨대, <꿀벌의 우화>를 저술한 맨더빌은 노동자는 가난하고 무지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며, 이러한 조건 하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더 열심히 일을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이 통용될 수 있었던 환경요인으로 결정적인 부분은 근대 이전의 전통사회가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였다는 데 있다. 생사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부의 축적이 크게 의미가 없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자본주의포스터.jpg
 
  ‘보이지 않는 손’ 결국 ‘자기애’ 
이후 출현한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중상주의 사상과 대조적으로 노동자의 임금개선과 생활의 향상이 국부의 더 많은 증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미스 사상의 위대함은 경제적 진보에 따라서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사회 내부의 억압과 국제간 전쟁이 줄어들게 될 미래를 예견했다는 데 있다. 오늘날 경제학 교과서의 상당한 학설은 애덤 스미스가 이루어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스미스는 경제학의 선구자일 뿐만 아니라 철학, 정치학, 법학, 사회학 등 융합학문을 실천했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는 자유방임주의자로 통상 이해되어 왔으나, <도덕감정론>과 <법학강의>에 관한 융복합적인 관심 덕분에 지난 50년간 해석의 변화가 생겨났다. 그가 거론한 ‘보이지 않는 손’은 흔히 시장 또는 가격으로 이야기되지만, 사실 이것은 인간본성으로서의 ‘자기애’(self-interest)로 보는 것이 더 마땅하다. 자기애는 시장이라는 경제영역에서의 핵심 행위원리이기 때문이다. 이기심(selfishness)과 달리, 자기애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둔다. 따라서 스미스는 자기애가 사회에 유익한 방향으로 발휘되기 위해서 국가의 적정한 역할, 법과 정의의 실현, 도덕교육 등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조건이 마련되는 경우에 사람들이 자기애를 발휘하여 사회에 유익한 방향으로 행동할 것이며, 개인적으로도 물질적 풍요를 넘어서서 자존감을 끌어내는 방향으로 자기애가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의 저녁식사를 도살업자, 양조업자, 빵 제조업자의 자애심(慈愛心)에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에 기대한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가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 우리들의 필요성이 아니라 그들의 이익에 호소한다. 모든 개인은 교환을 통하여 삶을 영위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은 상인(merchant)이 된다.”(국부론, 26-37, 37)
  
<국부론>에서 자주 인용되는 핵심 구절이다. 각 개인은 자기애에 따라 자신들의 각기 다른 노동 생산물을 교환하고자 한다. 이러한 교환성향은 자기애에 의해 점진적으로 증대되어 ‘분업’에 이른다. <국부론>에서 스미스가 핵심적 원리로 주장한 것이 ‘분업’이다. 분업과 그것에 의한 자본축적은 생산성 향상과 기술 진보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노동자의 임금 증대와 상품 수요 증대, 인구 증대, 시장규모의 확대로 이어져 사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이룬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분업과 자본축적이 노동자에게는 임금 감소와 불안정한 생활을 야기할 것이며 자본주의의 파멸은 불가피한 흐름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된 측면이 있음에도, 노동생산성의 향상에 따라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꾸준히 증가했고, 생산성과 기술도 꾸준히 향상되어 왔다. 스미스는 각 개인의 이기심과 사회 전체의 이익의 조화를 꾀했고 이를 통한 사회 전체의 성장을 통해 하층민에게까지 확산되는 보편적인 부와 행복의 확대를 고민했던 것이다. 
 
경제영역과 국가영역을 포괄하는 제1세계인 사회공동체 영역에서 작용하는 행위원리로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것은 ‘동감’(sympathy)이다. 이것은 <도덕감정론>의 첫 부분에서 제시된다. 동감의 감정은 이기적, 이타적 감정의 차원에 포함되는 원리가 아니다. 동감의 원리는 자신이 공정한 관찰자가 되어 상상력의 작용에 의해 상대방의 입장에서 감정을 헤아린 후, 나의 감정과 비슷하다고 느끼면 이를 공감하고 도덕적으로 승인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통용되어 공동선을 이루고 수많은 덕목을 만들어내며, 따라서 사회의 존립과 운영을 도모하는 원리가 된다. <국부론>은 이기심, <도덕감정론>은 이타심을 모순적으로 상정했다고 비판한 소위 ‘애덤 스미스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다. 하지만 스미스에게 동감은 이기심과 이타심으로 환원될 수 없는 성질의 감정이며, 오히려 이것들에 기반한 행위를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역할을 한다. 

 21세기 자본주의, 정의가 번영의 기초
인간을 ‘이기적 개인’으로 상정하고, 그로 인한 전쟁상태를 해소하고자 국가 성립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 토마스 홉스와 달리, 스미스는 이기심이 국가 구성의 원리라고 보지 않았다. 가족과 친족 중심의 원시 공동체에서 출발한 인류는 도시로까지 확대된 공동체에서는 구성원 간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 동감이나 관습만으로는 사회공동체의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러한 환경에서 타인의 권리 침해를 목격한 경우에 분노하게 되는 공정한 관찰자의 정의감, 다시 말해 동감의 원리에 근거한 사회적 차원의 ‘정의감’(sense of justice)에 의해 국가와 법제도가 성립한다는 것이 경험론자 스미스의 주장이다. 

그리고 마치 사회계약에 의해 사회가 생존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정의감이 작동해서 사회적 이익과 부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한편 역사적으로 국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의’뿐만 아니라, ‘효용’의 원리 역시 국가운영의 원리가 되었다. 이 같은 생각은 국가와 법 차원의 논의를 전개한 <법학강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국가관을 보면 애덤 스미스를 자유방임주의자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스미스는 자유방임 대신 정의가 훼손되거나 사회적 필요가 발생한 상황에 따라 ‘적정한’ 국가의 개입이 요구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애덤 스미스는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다. 정리하면 자기애와, 동감에 기인한 정의감,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과 제도의 개선, 더불어 동감의 활성화를 통해 사회는 더 많은 부, 생활수준의 개선, 정치적 차원의 자유와 정의,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호혜성과 인간애 등으로 행복을 더 많이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에 대해 이기심과 시장우위론에 오로지 주목한 기존의 오해를 불식하고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는 해석이 최근에 와서 주류가 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스미스의 가르침을 읽어냄으로써,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가 과연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시사점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김광수 성균관대 교수(흑백).jpg
▲ 김광수 성균관대 교수
김광수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애덤 스미스:정의가 번영을 이끈다>(한길사)를 통해 지금까지 일반에 알려진 애덤 스미스와는 다른 사회과학자로서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한다. 경제학을 넘어 인문학, 사회과학 등을 아우르는 융합학문의 분석방법으로 애덤스미스의 진면모를 새롭게 조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강연=김광수 성균관대 교수, 정리=김소영 제주불기도서관 사서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