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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玄基榮)
1941년 제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1975년에 등단한 그는 다수의 소설과 산문집을 펴냈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2001~2003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2003~2005년) 등을 역임했다. <제주의소리> 창간14주년-4.3 70주년 특집 '대한민국 문호들, 4.3을 말하다' 첫번째 순서로 '4.3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현기영 선생을 지난 2월말 경기도 성남시 분당 자택에서 만났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창간14주년 특집-대한민국 문호, 4.3을 말하다](1) 소설가 현기영 선생

역사는 곧 미래다. 역사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의 이야기가 아닌 만큼 역사를 다루는 작가들에게 투철한 역사의식은 혈관에 흐르는 핏물 같은 것이다. 올바른 역사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국가폭력에 의한 대한민국 현대사의 최대비극인 제주4·3. 올해로 4.3이 발발한지 70주년.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대한민국 문호들에게 ‘살아있는 역사’ 제주4.3을 묻는 특별기획을 마련했다. 문호의 글과 입을 통해 평화와 상생으로 나아가는 제주4.3을 조명해본다. <편집자 말> 

하얗게 위로 길게 뻗은 호미(虎眉). 팔순을 문턱에 둔 작가는 세월 테가 역력했다. 근황과 건강을 묻자 “늙음의 바이러스가 활동 중인 것 말고는 별다른 것이…”라는 진반 농반조의 답이 돌아왔다. “글쟁이이니 여전히 ‘글 씁네’하고 있다”거나 “노년의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소릴 들어본 적 있느냐”고 우스개 섞인 반문도 했다. 늙음에 관한 명상은 동서고금이 따로 없겠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어른’으로서의 여유와 관조가 깊숙이 느껴진다.  
 
1948년. 제주4.3이 발발하던 당시, 겨우 8살 코흘리개 소년은 올해로 78세를 맞았다. 만 70년 세월 동안 흡사 샤먼 같은 심정으로, 스스로를 ‘4.3희생자 넋을 진혼하는 심방(무당의 제주어)으로 살아온’ 그다. 단 한 번도 의도한 바는 없었다. 운명적으로 4.3을 만났고, 숙명처럼 4.3에 매어 살았다. 삶의 곡절마다 4.3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때도 있었지만 한걸음도 벗어나질 못했다. 

변방 제주 섬에서 태어나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면서 처음 제주를 벗어나본 촌뜨기 그가 늦깎이 작가로 문단에 데뷔해 1978년 발표한 중편소설 <순이삼촌>은 당시 금기시됐던 제주4.3 민중사를 다뤘고, 1970년대 최고의 문제작으로 평가 받았다. 단연 문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로인한 필화사건을 겪는 등 수난도 컸다. 소설가 현기영(78). 제주민중의 삶을 치밀하게 탐색한 ‘4.3작가’다. 

 ‘4.3’ 금기 깬 <순이삼촌>

4.3이 발발한지 올해로 70년. 창간 14주년을 맞은 <제주의소리>가 제주가 뿌리인 소설가 현기영 선생과 지난 2월말 경기도 성남시 분당 자택에서 만났다. 흡사 제주도내 읍면 어느 시골집에 온 듯, 선생은 궤짝이며 항(항아리)이며 대구덕 등 집안 곳곳에 제주를 품고 있었다. 세 시간 가량 이어진 인터뷰는 70주년을 맞은 4.3의 의미와 과제가 화제(話題)였지만, 100여일 앞둔 지방선거, 제2공항, 관광객, 이주민 등 고향 제주의 굵직굵직한 현안과 관련, 현기영 선생의 생각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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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의소리> 창간14주년-4.3 70주년 특집 '대한민국 문호들, 4.3을 말하다' 첫번째 순서로 '4.3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현기영 선생을 만났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4.3은 불과 30년전만 해도 ‘강요된 금기어’였다. 지금은 누구나 4.3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4월3일이 국가추념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4.3’의 실체를 언급하거나 표현하는 건 국가보안법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었다. 그래서 제주사람들조차 ‘난리’ ‘사태’ ‘그 시국’ ‘사건’이라 쉬쉬하며 줄여 말하는 습관이 생겼다. 4.3이 일어나고 무자비한 학살 광풍이 불던 1948년과 1949년을 뜻하는 ‘무자 기축년 난리’라는 말이 그나마 가장 적극적으로 ‘4.3’ 표현하던 시기도 있었다. 
 
현기영 선생은 암울한 시기, 문학작품으로 이 금기의 벽을 깨뜨리는 첫 단초를 놓았다. 그 시작이 그의 <순이삼촌>이다. 유신의 최고 정점으로 치닫던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발표된 <순이삼촌>은 오랫동안 재갈을 물렸던 ‘제주4·3’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배경은 북촌리 주민 400여 명의 학살사건이다. 그의 펜 끝에서 핀 필화(筆花)로 4.3에 대한 금기를 허물어뜨리고 4.3의 진실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지만 작가 개인으로서는 큰 고통이 뒤따른 필화(筆禍)를 겪어야 했다.

그는 <순이삼촌>에 이어 1979년에는 4·3사건 당시 초토화된 마을과 부역, 폭력에 시달리는 주민들, 가족의 이산과 죽음 등을 처참하게 그려낸 <도령마루의 까마귀>, 4·3사건이란 역사의 거친 소용돌이 속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개인의 운명을 당대적 의미로 재해석하고 복원한 <해룡 이야기>를 잇따라 발표했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세편의 작품으로 1979년 11월말 어느 날 그는 육군정보기관에 무작정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당시를 떠올리며 “참 많이 맞았다. 매를 너무 많이 맞았다. 당시 너무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 살아 나와서도 1년 동안을 글을 못 썼다”고 회고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박정희가 사망하는 10.26사태 직후이고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킨 12.12군사쿠데타 직전의 사실상 ‘군정’이나 다름없는 살벌한 시기였다. 바로 이듬해 1980년엔 광주 민주화항쟁이 일어났다.   

펜을 내려놓고 그렇게 공포와 무력함에 허구한 날 술독에 빠져 살던 어느 날. 그 날도 낮술을 걸치고 집에 자빠졌는데 마치 환각 같은 상태에서 허깨비 같은 환영(幻影)이 갑자기 나타났다. 하얀 소복을 입은 나이든 여인이었다. 그 여인이 자신을 향해 “술이나 퍼먹고, 맨날 드러누워 사냐. 할 일도 많은 놈이, 썩 일어나라”고 불호령으로 나무랐단다. 그 여인이 누굴까? 바로 현기영 선생 스스로 자신의 문학에서 창조한 ‘순이 삼촌’이었던 것이다. 현기영에게 4.3은 역설적이지만 ‘악연의 벗’처럼 일생을 같이 해왔다. 언뜻 사족일 수 있으나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날 수 없고…”라는 선생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렇게 다시 펜을 들어 1981년에는 제주도에서 발생한 방성칠의 난(1898)과 이재수의 난(1901)을 다룬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를 문학잡지에 연재했다. 이후 <변방에 우짖는 새>는 1983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1987년에는 희곡으로 각색되어 극단 연우무대에서 상연되기도 했는데, 거납운동으로 시작된 민란이 어떻게 반봉건, 반천주교 민란으로 전개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며 1980년대 중요한 역사소설로 평가 받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단편 <위기의 사내2> <거룩한 생애> <쇠와 살> <야만의 시간> <고향> 등의 작품에선 소설 형식에 다큐멘터리 기법을 도입하는 등 다양한 실험을 시도함으로써 동일한 소재가 주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는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한 인간의 꿈이 역사의 힘 앞에서 무참히 좌절되는 단편 <마지막 테우리>(1994)와 자전적 성장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1999)를 발표해 1990년대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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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의소리> 창간14주년-4.3 70주년 특집 '대한민국 문호들, 4.3을 말하다' 첫번째 순서로 '4.3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현기영 선생을 만났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다시 ‘빨간 딱지’ 붙은 불온작가

그의 장편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한국 현대사를 아우르는 서사성과 제주도의 자연을 묘사한 서정성이 조화를 이루어 1990년대 소설문학의 최대 성과의 하나로 평가받았다. 책은 출판되자마자 당시 MBC 간판프로그램 ‘느낌표!’가 선정한 권장도서가 되기도 했고, 수십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국방부에 의해 금서(禁書), 즉 ‘불온서적’으로 분류된다. 

군부독재 시절의 유물과도 같던 불온서적 ‘빨간 딱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꼬투리는 역시 ‘4.3’이었다. 당시 ‘더위 먹은 국방부’가 <지상에 숟가락 하나> 자전소설 내용 중 ‘4.3’이야기가 거론된 부분을 문제 삼았단 것이다.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된 제주4.3의 역사로부터 국방부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단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었다. 민간인 학살의 원죄가 부끄러운 탓에 그런 사실을 똑똑한 요즘 군인들이 읽지 않기를 바랐을 게다. 

현기영 선생은 1980년대부터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활동을 했으며, 2001~2003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2003~2005년 한국문화예술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제주4·3연구소장과 제주사회문제협의회장도 역임하는 등 업보처럼 4·3과 마주해왔다. 만해문학상(1989), 오영수문학상(1994), 한국일보문학상(1999) 등을 수상했다.

현기영 선생은 1941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1960년 제주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 광신중학교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등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소설 습작을 병행했다. 1975년 단편소설 <아버지>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 당시 35살, 늦깎이 등단이었다. 

사실 나이 팔십을 바라보는 그가 고향 제주 땅에서 발 딛고 산건 고작 19년이다. 스무 살 되던 해에 대학 진학을 위해 목선(木船) ‘황영호’를 타고 목포를 거쳐 서울로 상경한 이후 줄곧 서울에 살았다. 그런데도 평생 작품에서 제주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 4.3도 그렇다. ‘왜 그렇게 제주도에 집착하나’고 물었다. 

“코르시카섬 출신의 시골뜨기 나폴레옹이 파리에 입성하고 유럽대륙을 정복하는 ‘황제’가 되었다고 누구나 그런 세계관을 동경하는 건 아니야. 나는 제주라는 섬에서 태어나 대학 가느라 처음 제주도를 떠나봤어. 목선을 타고 망망대해에 떠있어 보니 ‘내가 왜 이런 외딴 섬에서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웃음) 제주도가 섬인 줄 못 느끼고 살다가 그렇게 ‘객관적 거리’가 생기니까 고향 제주도가 보이더라고. 만일 내가 제주 안에만 있었으면 4.3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을 것이야. 숨 쉴 수 있는 공기나 일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가 소중함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지.”  

 잊어버리면 되풀이 되는거야

현기영 선생은 지금 일년째 장편소설을 집필 중에 있다. 물론 다시 4.3이다. 무자년 난리통 그 항쟁의 역사를 통해 작품에 ‘인간은 무엇인가’란 화두를 던졌다.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 4.3속의 인간들을 이분법으로 가르지 않고 결국은 인류보편의 평화와 상생, 그리고 미래를 쓰고 있다고 귀띔했다. 평생 4.3진혼굿을 여는 무당처럼 살았지만 아직도 4.3해결에 작가로서 할 일이 남았을까. 말미에 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의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 얘길 꺼냈다. 

“아우슈비츠 입구에 크게 붙은 슬로건이 있어. ‘아우슈비츠 사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류가 아우슈비츠를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4.3도 마찬가지예요. 4.3학살보다 더 끔직하게 무서운 것은 우리가, 제주도민이, 우리 국민이, 인류가 4.3을 잊어버리는 것이야. 잊어버리면 되풀이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세월호도 결코 잊지 말자고 하는 거고.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어”  

현기영 선생은 4.3이 문학에 국한되지 않고, 앞으로 영화, 연극, 미술, 음악 등 좋은 문화예술작품들로 꾸준히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의 향기가 변변치 못하면 역사도 변변치 못한 것이 된다는 우려였다. 좋은 작품이 나오도록 젊은 예술가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우리 제주에 이렇게 참혹한 역사를 기록하고 지켜내려는 아름다운 어른이 있다는 사실이 마냥 고맙고 자랑스럽다. 이 같은 심정이 어디 필자뿐일까. 현기영 선생의 댁을 나서서 지하철역까지 도보로 십여분 거리의 길가에 따뜻한 봄 햇살이 내렸다. 1948년 봄날에도 비쳤을 햇살이다. 아픔이 더 이상 아픔이 아니어야 한다. / 대담·기사 = 김봉현 편집부국장, 워딩 = 문준영 기자

<* 인터뷰 원문은 아래 싣습니다. >

▲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평생 작품에서 고향 제주도와 4.3을 뿌리로 삼았다. 그의 혈관에 4.3이라는 핏물이 흐르는 한 현기영 문학의 근간은 제주도와 4.3이 될 터. 현기영 선생과 인터뷰 중인 김봉현 편집부국장.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오랜만입니다. 4.3 70주년이 됐습니다. 뵙기엔 좋아보이십니다. 건강하시지요? 요사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을 소개해주십시오. 

= 건강은 뭐(웃음). 바이러스가 몸 안에 있다. 늙음의 바이러스. 그 바이러스의 활동 중인 것 외에는 별로(웃음) 그리고 글 쓰겠다고 해도 옛날과 달라서 총기도 없어지고, 나이가 드니까, 지구력도 많이 없어진다. 거기에다 시간이 밖으로 많이 뺏긴다. 노년의 백수가 과로사할 지경이다. 그럴 정도로 오가라 하는 데가 많다.(웃음)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면 또 술을 먹게 되고 힘들다. 이젠 술 먹는 게 힘들다. 이젠 술 안 먹고 만나는 일을 생각해야 되는데 그렇게 지내고 있다. 말하자면 ‘글 씁네 ’하고 있다. 이게 치매방지용 글쓰기인가 그럴때도 있어. 하하. 이제 이렇게 나이가 점점 드니까 정치문제나 이런 문제들도 옛날처럼 심각하거나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아. 늙음이 뭔지….  

- 선생님을 이어 문단에도 시대적 소명을 가진 후배 작가들이 대신 그 역할을 해줄 거라는 기대감이 있어서 인가요?

= 반드시 그런 건 아니고. 사실 내가 4.3을 만난 건 본의가 아니었어요. 운명적으로 처음에 4.3을 만났다. 본의는 아니었다. 내 일생 화두로 삼을 생각은 사실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필화사건을 겪으면서, 이런 4.3 문제의 해결을 열었던 실천운동도 해오면서 내 문학 생애 중에 4.3 차지하는 부분이 많더라고. 꼭 내 쓴 글이 4.3 문학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문학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도 그렇고 나도 마찬가지로 내 문학은 4.3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4.3에 매어있는 것 같다. 

- 그래서 4.3문학이라는 장르의 단초를 놓게되신 것 아닙니까. 

= 한때 4.3문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4.3을 주제로 한 소설 쓰기, 시 쓰기가 왕성하게 일어났었던 때가 있었지.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은 4.3을 주제로 한 글쓰기가 많이 줄었다. 그 대신 (이미)4.3 문학의 효과로 많은 독자들에게 4.3이 무엇인가를 알렸다. 많이. 80년대말 90년대 초 그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지금은 4.3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사회단체들도 관심가지고 일하고 있다. 4.3평화재단도 설립됐고. 그래도 좋은 후배들이 앞으로도 4.3을 주제로 해서 좋은 장편소설 써주기를 바라고 있다. 사실 나도 지금 4.3장편소설 쓰고 있긴 한데, 내 후배도 좋은 장편소설을 해줬으면 하는 생각이다. 
문학에서 장편소설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4.3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 기다려진다. 장편소설 말고도 좋은 영화나 연극도 기다려진다. 규모있는 작품들이 기대된다. 4.3예술에 다양한 작가들이 도전해봤으면 좋겠다. 

- 선생님은 제주에서 태어나 스무살에 뭍으로 간 뒤 반세기 넘게 육지에서 살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작품 안에 들어있는 모티브나 뿌리는 제주도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제주도에 집착하십니까. 

= 코르시카섬 출신의 시골뜨기 나폴레옹이 파리에 입성하고 유럽대륙을 정복하는 ‘황제’가 되었다고 누구나 그런 세계관을 동경하는 건 아니다. 나는 제주라는 섬에서 태어나 대학 가느라 처음 제주도를 떠나봤다. 황영호라는 목선을 타고 망망대해에 떠있어 보니 ‘내가 왜 이런 외딴 섬에서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웃음) 제주도가 섬인 줄 못 느끼고 살다가 그렇게 ‘객관적 거리’가 생기니까 고향 제주도가 보이더라. 만일 내가 제주 안에만 있었으면 4.3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숨 쉴 수 있는 공기나 일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가 소중함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객관적인 거리가 생기니까 내 고향 제주도가 보이는 거다. 4.3의 문제도 내가 숨 쉬고 있는 공기와 같이 늘 일상적인 것처럼 느껴져서 제주안에만 있었으면 거기에 대해서 발언을 못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밖에 있어보니 ‘4.3이 뭔가’하는 걸 생각하게 됐고. 문학을 워낙 지망했으니까 4.3 얘기하지 않고서 다른 글 쓴다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었다. 4.3에 대해서 한 3편만 중·단편 쓰고 소위 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내가 생각하는 본연의 문학으로 가려고 했는데 운명이 그냥 두질 않더라.(웃음) 그렇게 4.3을 주제로 3편 썼는데 이게 책으로 나오고 나서 문제가 된 거다. 어느 날 육군정보기관에 끌려가서 고문당하는 필화사건을 맞게 됐다.  

- 그게 언젭니까? 

= 1979년 말 11월. 그 다음 부터는 매 맞은 효과가 나왔다. 나를 잡아가 왜 매를 때렸냐 하면 더 이상 (4.3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1년 동안 안 썼다. 아니 못 썼지 무서워서. 80년이 또 무서운 해 아닌가. 광주사건 있고 더 무서운 해인데 그 동안 쓰고 싶어서 에너지가 발동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1년을 쉬었다. 1년을 쉬는데, 그 때는 맨날 술로 허송세월하는 거다. 쓰고 싶은데 못 쓰니까. 쓰지 말라고 매를 때렸으니 매의 효과가 나타나서 못 쓰는거다. 

- 다시, 그런데 왜 다시 쓰기 시작하셨습니까?

= 어느 날 낮술을 하고 집에서 자빠졌는데 갑자기 환시(幻視)가 보이는 거다. 환각상태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이 빛 속에서 나타나서 나를 향해서 꾸지람을 하는 거야. ‘기영아 너는 허구한 날 할 일도 많은데 술이나 퍼먹고 드러누워 있냐. 썩 일어나거라’고 호통을 치는거다. 그 여인이 누구냐 하면 내가 창조한 내 문학 속의 ‘순이삼촌’이었던 거다. 그렇게 4.3은 운명적으로 나와 불가근불가원 악연의 친구처럼 일생을 같이해왔다.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날 수 없고. 

▲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다시 '4.3 장편소설' 집필 중이다. 약 3년후 독자들과 4.3소설로 만날 날을 기약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순이삼촌>을 책으로 발간할 때 나이가 몇이셨습니까?

= 순이삼촌이 책으로 발간된 시점은 1979년. 그 때 나는 서른여덞이었지. 

- 4.3을 친구에 비유하는 분이 4.3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건 역설 아닌가. 

= 왜 벗어나고 싶냐하면, 내 독자들이 현기영 작가는 글은 잘 쓰는데 매일 4.3의 비참한 얘기만 해서 ‘계속 쓰니까, 질린다’ 이런 거야. 나도 이제 독자 따라서 글을 써야 되는 형편이라 4.3을 벗어나고 싶은 거였다. 그런데 못 벗어나고 있다. 그건 바로 운명적으로 매여 있는 거다. 
특히 4.3사건은 당시 3만 이상의 제주도민이 무고하게 희생된 참 어이없는 불가사의하고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이 사건을 추모하고 애도하고 추념하고 이런 걸 계속해야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둘러싼 문화환경, 생활환경이 녹록치 않았다. 아주 적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거다. 지금 우리 주변의 생활환경이나 문화환경은 진지한 가치에 대해서 중요시하지 않고. 정의 문제랄지 공동체 문제를 외면하고 도외시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많다. 엔터테인먼트, 특히 젊은이가 주역이니까 즐거움 좇는 그런 문화. 즐거움을 좇는 생활. 그 속에서 4.3이란 게 불협화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지금의 생활방식과 안 맞는거다. 

- 그렇다고 젊은 세대들과 4.3을 단절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 당연하다. 젊은이들한테 왜 4.3을 왜 모르냐, 왜 기억 못하냐고 하는데…. 4.3 모르는 젊은이들이 굉장히 많다. 환경이 그렇게 된 거다. 너무 무거운 거다. 그래서 꺼리게 되는 거다. 자기는 젊고 가볍고 경쾌한 걸 좇으려하는데 무겁고 비참하니 자연히 멀리하게 되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기억을 해야되는 것 아니겠나. 망각한다는 것은 4.3을 그 역사를 되풀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홀로코스트로 수십만명의 유태인이 거기서 죽는다. 거기 입구에 슬로건이 크게 써서 붙여있다.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류가 아우슈비츠를 잊어버리는 것이다’라고. 나는 그런 말을 한다. 아우슈비츠 거기에 4.3을 대입해서 한 번 읽어보자. 생각해보자. 4.3 그 대학살. 그것보다 더 끔찍한 거 무서운 건 우리 국민이, 도민이, 인류가, 4.3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왜냐면 잊어버리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월호도 잊지 말자고 하잖나. 

- 맞는 말씀입니다. 4.3의 전국화, 세계화라는 명제 앞에서 ‘언제까지 슬프고 무거운 얘기만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인류사회에 평화, 상생, 공존이라는 보편적 메시지를 던지고 기억하게 하는 예술적 노력과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앞서도 얘기했지만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예술작품 이런 게 나오면 4.3에 대해서 친화를 느끼게 할 수 있다. 4.3을 주제로 한 그 예술작품의 향기가 변변치 못하면 4.3 자체가 변변치 못한 것처럼 돼버린다. 그래서 좋은 작품이 나와야 한다는 거다. 그런 좋은 작품이 나오도록 격려해야 되고, 젊은 예술가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만들려고 해야 한다. 그런 좋은 작품이 나오면 그 사람은 천재소리를 들을 거다.(웃음) 

- 혹시 후배 작가 중에 주목하는 분이 있으신가요?

= 아직은 모르겠는데...(웃음)

- 선생님 스스로 자신을 4.3을 진혼하는 무당으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태생이 제주도이니 4.3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선생님 스스로는 나이가 들었다고 하시지만 좋은 문화예술인들에게 동기부여하고 그들을 무대로, 판으로 끌어내는데 여전히 하실 일이 많아 보입니다.

= 우선 나에겐 글 쓰는 일이 중요하지. 쓴다고 하고 있긴 한데 앞으로 더 노력을 해야 해. 글 쓰는데 노력을 해야겠다고 매번 다짐을 하고 있어.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 삶 자체가 너무 복잡하고 너무 가벼운 것 쫓고 그래서 문학자체도 아주 말초적인 그런 감각, 이런 데에 의존하는 문학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그런데 가끔씩 역사적인 문제나 정책을 다루는 그런 젊고 좋은 작가들이 나오고 있기도 해. 

- 순이삼촌이 나온 지 벌써 40년이 흘렀습니다. 4.3이 발발한지는 70년입니다. 4.3의 완전한 해결, 4.3의 전국화, 세계화 등등. 여전히 무거운 숙제인데, 그 동안 방식으로는 한계가 많다는 게 느껴집니다. 언론인들도 4.3 70주년 뭘 할까 큰 숙제입니다. 

= 내가 한 5년전부터 제주도 내려가서 강연 기회가 있을 때 ‘다크 투어리즘’을 많이 강조했다. 수년 전 우연히 외국 어떤 문서에서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말을 발견했다. 이것이야 말로 제주에 해야 될 게 아닌가. 밝은 풍경만 보여줄게 아니라 그 배후의 음습한 그늘에 깃들어 있는 4.3에 대한 슬픔. 이런 것도 관광대상이 돼야한다. (관광이)평화에 이바지해야겠다. 또 미국이 관여된 사건이기 때문에 세계를 향해서 제주도민은 평화를 외칠 자격이 있다는 거다. 
그 방식은 뭐냐 하면, 그 전 노무현 정권 때 ‘세계평화의 섬’이라고 명명돼 있지 않나, 명목만 그렇고 (내실은)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태인데. 4.3의 비극을 딛고 세계평화를 위해서 세계의 정상들, 중요한 지도자들이 제주에 와서 평화를 의논하는 ‘피스 토크’ 이런 것들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앞으로 제주도에서 (다크 투어리즘 관광객들을)유치해야 되는데, 평화 관광객들이 밝은 관광만 보는 게 아니라 그걸 통해서 전쟁의 비참함을 느끼고 밝은 풍광에 대비되는 슬픔도 알았으면 한다. ‘전쟁은 아니다. 전쟁이 아닌 평화’ 여기에서 생각하게 하는 거다. 다크 투어리즘의 계획, 프로그램을 잘 짜야한다는 거다. 유적지나 전시관 말고도 더 많은 것들이, 더 정교해져야 한다.
그리고 2~3년 전까지만 해도 4.3을 주제로 한 문학·미술·연극이 활발하게 이뤄졌는데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어. 탐미협이나 한라산 놀이패가 그런 일들을 했지. 언론도 거기에 적극 힘을 보내야지. 

▲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2차 세계대전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홀로코스트로 수십만명의 유태인이 학살당한 역사를 잊으면 안되는 것 처럼 제주4.3을 잊는 것은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 하는 것이라며 4.3을 왜 기억해야
하는지를 강조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다시 4.3장편소설을 집필 중이라고 하셨는데?

= 시작한 게 1년 전이다. 옛날 젊었을 때는 다 뿌리치고 글 쓰는데 집중했는데, 이젠 누가 부르면 가고 그래서. 하하. 이런 식이 돼서 이제 쓰는 속도가 안붙어. 이제라도 (속도를) 올려볼까 하고 있어요. 

- 언제쯤 독자들이 선생님의 4.3장편소설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 글쎄. 한 3년은 지나야?(웃음) 이 나이가 그렇게 빨리 나올 수 있는 나이가 아니잖아.

- 이제 글쓰는게 싫을때는 없으십니까? 평생을 펜을 잡았는데 제주어로 ‘실퍼질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하하. 

= 하하. 그런 것도 있다. 그런데 쓰기 싫어도 막상 앉으면 조금 써진다. 사실 글 쓰는 게 자연스럽지 못한 일에 매달리는 거다. 인간이 자연스러운 건 도구를 들고 골갱이(호미의 제주어)로 검질(잡풀의 제주어)을 맨다거나,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팬다거나 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지, 조그마한 펜대 가지고 글 쓰고, 아니면 탁탁탁탁 노트북 두드리고 하는게…. 사실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다. 

- 지금도 육필로 쓰십니까?

= 지금은 컴퓨터로, 노트북으로 쓴다.

- 지금 쓰는 작품은 4.3의 무엇을 다루고 있나?

= 이념적인 것은 아니고 4.3 속의 인간들, ‘인간은 무엇인가’란 화두 그런 거다. 가해자는 그렇게 가해자가 됐으면, 가해자들도 평범한 인간이었을 텐데 왜 그렇게 됐을까. 이분법으로 선과 악, 피해자 가해자로 가르지 않으려 한다. 물론 가해자의 광기와 악랄함은 잘못된 것이다. 당시로선 군정 수뇌부가 생사여탈권을 졸병에게 다 준거다. 그걸 정권 수뇌부 다 준건데. 진짜 범죄자인데. 이승만 정권이 범죄자이지. 미국의 책임도 당연한거고. 
당시 서청(서북청년단)들에게 봉급도 안주고 현지에 약탈해서 먹으라는 식이었다. 그냥 사냥개 풀어놔 버린거다. 그렇지만 인간적인 서청도 있었다. 무근성에 세들어 살던 서청 출신 장교가 4.3이 어느 정도 진압되니까 육지로 떠나면서 세 들어 살던 집주인한테 울면서 ‘제주도 백성 다 죽이고 갑니다’ 하던 사람도 있었다. 명령에 의해서 총질할 수 밖에 없던 것 아니겠나. 그런 것도 다루게 된다. 

- 후배 작가들한테 4.3을 다룰 때 어떤 자세로 임하라 하는 당부를 남겨 주신다면요?

= 후배들은 4.3을 너무 처참하게, 또는 너무 직설적으로 푸줏간 얘기하듯 쓰지 말았으면 한다. 내가 그렇게 해봐서 안다. 너무 처참한 것만 강조하니까 이 처참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히려 아름다운 자연까지도 조금 왜곡 시키게 된다. 눈 속에 피어있는 동백꽃을 비유해서 나는 ‘하얀 백설 위에 떨어진 동백꽃 통꽃으로 떨어져. 이파리는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런 식으로 4.3에 참수 당하는 죽음을 묘사했다. 하도 그러니까 사람들 읽기를 꺼려하더라고. 
순이삼촌 처음 나왔을 때가 40년 전이니 정치상황이 엄혹했다. 그때 선배 부인이 읽다가 까무러쳐버렸다. 당시 글에 묘사된 내용이 심약한 사람은 까무러칠 정도니 누가 읽겠나. 거기에 꼭 그렇게 처참하게만 하지 말고 그곳의 아름다움과 기쁨도 있을테니 잘 버무려서 조화로운 글쓰기를 하면 좋겠다. 

- 4.3 70주년이다. 4.3의 전국화가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웃들에게, 도민들에게,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4.3을 이렇게 봐달라는 당부의 말씀 부탁한다. 

4.3 70주년을 맞아서 주력하고 있는 것이 힘쓰고 있는 것이... 제주도에만 국한되고 거기에만 갇혀있던 제주 4.3을 국민 전체가 공유해주기를 바라고 세계가 알아야 겠다는 그런 테마가 있는 것 같다. 그 당시 희생된 분이 3만 이상인데 제주도민의 9분의 1이 넘는다. 엄청난 희생인데, 이 엄청난 죽음을 위로, 위령, 진혼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집안에서 한 사람 돌아가셔도 제사 지내면서 진혼하잖나, 위령하고 그러는데... 아니, 3만 이상이 엄청난 억울한 죽음 이 그냥 자연사 죽음이면 모르는데 이건 엄청난 억울한 죽음이다. 이 원혼은 억울함을 안고 원한을 안고 돌아가신 영혼은 언젠가는 산 자에게 해코지 한다고 한다. 그들이 위령되고 진혼되지 않으면 생존자에게 해코지 한다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4.3 영령을 다 함께 진혼하기 위해서 기억하고 잘 진혼해드려야 한다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4.3을 잊지 않고 그들을 역사의 거룩한 한 페이지에 제대로 안장시키는... 딴 데 안장시키는 게 아니라 역사에 제대로 안장시켜야 이 분들이 원한이 풀리겠다는 생각이다. 좋은 역사 만드는데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 좀 다른 질문입니다. 올해는 지방선거가 6월에 치러집니다. 유사 이래 가장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제주도와 도민 입장에서는 어떤 인물을 뽑아야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 이전 도지사들이 도민 의사와 무관하게 벌여놓은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원희룡 지사는 부임초 ‘협치’라는 이름으로 정치하던데 성산 제2공항 문제는 잘못하는 것 같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 했는데 좁은 지역에서 또 공항은 아닌거지.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는 것 같다. 관광객이 많아지면 그 관광지가 관광지로서 역할을 잘하겠어요. 결국 못하게 된다. 섬 관광지는 쾌적해야 되고 여유로움이 있어야 하는데 제주도가 점점 너무 콩나물시루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우려가 커요. 이 관광객들도 제주도에 포화상태처럼 넘쳐나면 관광객들이 오히려 안 올 거란 말이지. 그들이 분비하는 분비물들, 내 버리는 쓰레기나 오염물질이나 그게 엄청날 것이고. 교통. 식수 문제도 나중에 있을 거고. 이런 걸 전체적으로 고려해서 공항 짓는다고 해서, 무조건 관광객 많이 들어오면 돈 벌고 잘 될 거라고 하면 안되는 거지. 제주의 가장 큰 보물은 청정자연이야. 자연은 천연 그대로 있어야 자연이지. 자연은 천연이란 말과 같아. 이 자연을 인공의 들어가서 가공시켜버린다는 이거는 볼썽사납게 되고 그런 자연, 그런 관광상품은 보러오지 않을 거야. 절대로. 

- 사실 제2공항 문제는 언론에도, 도민사회 모두에 책임이 있습니다. 최근 10여년 가까이 도민사회가 공항인프라 확장 여론에 최면에 걸려있던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신공항이든 제2공항이든 부족한 공항인프라를 더 확충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다수였죠. 저희같은 언론도 제대로 검증을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깊이 반성할 문젭니다. 

= 간단한 문제다. 공항이 문제가 아니라 제주도 땅이 그걸 수용할 수 있을까. 지금도 넘쳐나는 관광객에 감당이 안되는데 공항 늘려서 어떻게 하자는 건지. 안타깝다. 궁극적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중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해변도로를 싹 달리는데, ‘아스팔트 길을 적색 형광펜으로 줄을 쫙 긋는 것처럼 경쾌하게 내달렸다’는 표현이 있어요. 그런 관광을 하고 싶은 사람도 꽤 있지. 그런데 경쾌하게 내달리는 게 관광의 본질이 아니야. 실은, 거기에 비하면 제주올레길이 참 잘하는 거다. 느리게 걷고 여유롭게 보는 것. 그게 관광인거지. 

- 요즘 제주는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인구가 꾸준히 대거 유입됐고, 몇 년 간 집값 땅값 상승률 등 부동산 관련 지표는 전국 1위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제주 사람들끼리 만나도 첫 마디를 부동산 얘기로 시작해 부동산 얘기로 끝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의 세탭니다.

= 부동산 가격이 높아져서 갑자기 부자가 되고. 물질의 포로가 되는 세태는 안타깝다. 그 땅은 토지는 4.3 때 돌아가신 분들이 잘 먹지도 않고 고생하고 일만하다 남겨주신 재산들이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남겨주신 유산이라고 생각할 때 그 땅을 물질적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 돈을 잘 써야 한다. 모두 4.3유산 성격의 토지라고 할 수 없지만 많이 부분이 그럴 것이다. 그 분들이 물려줬거나 없어져서 생긴 토지가 많다. 토지 가치를 물질적으로만 보면 정신이 황폐해질 수 밖에 없다. 너무 물질적인 것에 포로가 되지 말기를 바란다. 만일 돈이 있으면, 그걸 어떻게 가치있게 써야 할지 고민하면 좋겠다. 

- <제주의소리>가 독립언론으로 창간한 지 어느덧 14주년이 됐습니다.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내부 구성원들에게 축하와 격려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 축하드린다. 독자들께도 축하와 감사 드린다. 벌써 14년이 됐어. <제주의소리>가 창간될 때부터 저는 알고 있었어요. 제주지역 대안언론으로 출범한 창간정신이 여전히 관철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주도의 바른 목소리, 낮은 목소리, 소수자의 목소리도 좀 더 알려줘. 지금까지 이런 목소리들을 여론화시키고 이런 일을 착실히 제주의소리가 해왔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변치 않고 초심 그대로 정론의 길을 걸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먼길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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