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60) 석 되 부조는 마라

* 부주 : 부조(扶助), 부조금

자녀 결혼이나 이웃 간에 상을 당했을 때 도움을 준다는 의미로 건네는 게 부조금이다. 오랜 풍속인 상부상조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예전에는 혼사나 초상 때 부조를 돈보다 곡물이나 현물로 하는 게 예사였다. 그 양은 대체로 곡식 한 말(斗)이 보통이었고, 형편이 넉넉지 못하면 반말인 닷 되를 했다. 그 시절엔 그래도 흉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단순치 않았던 게 부조금인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하지 않으면 안했지 석 되 부조를 하면, 이래저래 흉보였다. ‘석 되 부주랑 말라’ 한 것은 그럴 바엔 차라리 않는 편이 낫다고 한 말이다. 

비단 부조금에 그치지 않아, 이 말엔 미묘한 뉘앙스가 들어 있다. ‘차라리 ~할 바엔 ~ 않는 게 낫다’ 하는 문장 구조를 지닌다. 그래서 품고 있는 뜻이 유별나다. 부조를 떠나, 이를테면 ‘변변치 못한 참견이랑 말라’는 속뜻이 들어 있다는 얘기다. 일에 끼어들어 책임질 수 없을 것이면, 아예 나서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는 것이다. 실로 공감이 가는 비유다.

결국, 변변치 않은 도움이나 참여는 삼가는 게 좋다는 경계의 말이 된다.   

제주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이 모두 ‘삼춘’이고 ‘조캐’이며 ‘아지방’, ‘아지망’이다. 좁은 지역이라 친하고 가까운 사이로 연 닿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할 정도다. 다 친척이요 친지인 셈이다. 사돈에 팔촌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다. 제주는 다를 지방과 달리 인연사회, 연고사회다.

그러니 부조금을 얼마 하느냐가 고민거리가 된다. 물론 직접 잔칫집이나 초상집을 찾아가 일을 도와주며 축하와 위로의 뜻을 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도 옛말, 요즘엔 예식장과 장례식장에서 제반 절차가 치러지는 시대다. 찾아가 보았자 마땅히 할 일이 없다. 품앗이란 말이 무색해졌다.

형편이 이러다 보니 더욱 부조 문제가 중요한 것으로 떠오른다.

부조금 액수를 얼마로 하면 적당할까? 당장 머리를 써야 할 대목이다. 이럴 때 퍼뜩 떠오르는 말이 바로 이 속담이다. 

‘석 되 부주랑 말라.’

무슨 선언문처럼 지엄하게 귓전을 울린다. 백 번 옳은 말이다. 이왕 하려면 제 수준에서 해야 하는 게 맞다. 부조를 하면서 너무 인색하게 했다간 곧바로 후회가 된다. 조금만 더 할 것을 하고.

결혼식장에 갈 때는 기본적으로 5만원으로 시작하는 것 같다. 물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액면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결혼식에 내는 것은 축의금이라 초상 때 부의금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장례 때가 더 신중을 기하게 되는 게 아닌가.

3만원 부조는 없는 것 같고, 5만원을 내려니 망설이게도 된다. 결혼식장의 경우는 식대가 많이 올라서 대부분 3만원 이상이라 5만원은 넣어야 예의겠지만, 부부동반일 때는 또 사정이 달라진다. 더욱이 요즘엔 호텔 뷔페가 대부분이라 계산이 복잡해진다. 혼자라면 5만원이지만 둘이면 큰 마음먹고 곱절로 가게 되는 건 아닌가.

평소 가족처럼 지내거나 친인척분이 돌아갔을 때는, 가까운 사이라면 10~20만원을 내는 게 관례로 되는 건 아닌가 한다. 친구나 친지, 평소 알고 지낸 동료나 옛 동료, 거래처 직원 등 이런저런 관계에 따라 좀 더 생각을 하게도 될 것이다. 친소 관계도 염두에 둬야 할 것인데, 결국 주관적인 것이라 본인의 결정이 중요한 것은 말할 게 없다.

엊그제 일이다. 이웃집 상에 조문하며 5만원 부조를 하고 돌아왔더니 허전했다. 오가는 길에 동네 사람 몇으로부터 10만원 부조를 했다는 얘기를 들어 가슴 뜨끔한 것이다. 조금만 더 넣을 걸, 이왕 하는 바에 이웃답게 할 것을 하는 후회다. 

작년까지만 해도 5만원 부조가 결코 약하지 않다는 느낌이었는데, 해가 바뀌더니 그새 부조가 세어졌다. 그것도 1~2만원을 얹는 것도 아닌, 5만원에 다시 5만원을 더하는 식으로…. 5만원 지폐가 나와 사람들이 쉽게 들뜨는 것인지 돈 가치가 이렇게 떨어질 수 있는 일인가.

부조금은 5만원, 7만원 하는 식으로 홀수로 하는 게 관례다. 음양오행이론에서 홀수가 양(陽)의 기운을 가졌다고 보는 데서 유래한 것인데, 이젠 원칙처럼 된 지 오래다.

“결혼식이다 조문이다, 이거 원...부조에 등 터젼 못 살키여!”

육지에 오래 살다 귀향한 한 친구의 푸념이 넋두리를 넘어 탄식으로 들렸다. 조석으로 만날 것인데 부조 안하고 배기겠는가.

요즘 축의금 봉투 장만하느라 허리가 휠 결혼 성수기다. 부조는 사람 도리를 하는 일이다. 큰일 치르는 이웃을 돕는다는 상부상조의 전통은 오늘에 계승해야 할 미풍양속이니, 불평도 속으로 삭이면 좋은 것. 이왕 하는 부조다. 

‘석 되 부주랑 말라.’ 

조상이 남긴 말이다. 이 말에 스며있는 함의(含意)를 음미할 일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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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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