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62) 아이 앞에서는 입도 다시지 마라

* 앞이선 : 앞에서는
* 촉 : 촉하는 소리, (입도) 다시지
  
아이는 어른이 하는 대로 곧잘 흉내를 낸다. 그만큼 모방 심리가 강하다. 발달단계에서 삶을 익히고 세상을 배우는 데 가장 활발한 때다. 말이나 행동, 몸짓 할 것 없이 그대로 본보며 말하고 행동하려 한다. 선험적이라 할 만큼 놀라운 모방이다. 그러면서 지각이 깨어나고 지혜가 열리는 것일 테다.

그러니 어린아이 앞에서는 남의 말도 함부로 못한다. 더욱이 남을 비방하거나 못할 짓이나 시늉을 했을 때는 취사선택하지 않고 고스란히 옮겨 몹시 난처해지는 수가 있다. 말도 그렇지만, 장애인 흉내를 낸다든지 했을 때는 큰일로 번져 뒷감당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아이는 순진해 꾸밀 줄을 모른다. 그러니 듣는 쪽에서도 사실 그대로라고 인식할 게 아닌가. 아직 분별이 서지 않는 아이 앞에서 공연히 흠 잡힐 짓을 했다가는 후환의 빌미가 되기 십상이므로 그런 언행은 삼가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 앞에서 신중하지 못한 말이나 행동을 했다가 근심걱정을 자초하게 된다는 가르침이 숨어 있다.

“아이 앞이서 입도 촉 말라.”

심상하게 흘려들 말이 아니다. 짧은 한마디 말 속에 깃들어 있는 삶의 요체를 놓치지 말 일이다. 아이가 어른의 언행을 따라 하는 것은, 옆 사람이 덜덜 다리를 떨면 모르는 새에 따라 하는 것과 같다. 하품하는 것을 쳐다보는데 어느새 하품을 하고 있는 그런 것.

어른이 손가락을 콧속에 넣어 코딱지를 파는 걸 보면 바로 흉내를 내는 게 아이들이다. 어른이 킁킁 콧소리를 자주 내면 곧바로 전이된다. 눈을 자주 깜빡거리는 버릇, 뒷손 지는 습관 하나까지 어김없이 본 뜨는 게 어린아이라고 보면 좋다. 

‘그 애비에 그 아덜’이란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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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쿠스 피스터의 그림책 '아빠처럼 할래요'. 출처=교보문고.

그러니 엄마 아빠가 이웃집을 향해 욕하거나 비방하는 것을 귀로 듣고 그냥 있겠는가. 그 집 아이에게 “너의 엄마가 나쁜 말을 했다며?” 하고 가감 없이 말전주를 하게 된다는 얘기다.

나만 그런 걸까. 아이를 양육하며 왜 그러지 못했던가 하고 후회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어릴 적에 아들을 데리고 낚시도 하고 등산도 했어야 하는데, 돈도 많이 드는데다 팍팍한 일상에 치여 먼 데 여행을 못하더라도, 아침저녁 가까운 마을 둘레길이라도 함께 거닐었어야 하는데 하고. 

아들은 그 부모를 동일시하게 된다. 부모는 아이에게 세상으로 나가는 출구이고 인생을 비쳐 보는 거울이다. 

어느 글에서, 네 살배기가 막대사탕을 다 빨고는 막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더니 담배 피는 시늉을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는 젊은 엄마의 얘기를 읽으며 웃음이 나왔던 적이 있다. 남편이 집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지만, 아이 눈에는 오히려 그게 별나게 보였던 것이다. 아이가 그냥 있겠는가. 아빠가 맛있게 담배 피우는 모습을 훔쳐보며 나도 한번 해봐야지 했을 것이고, 그걸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실제로 여자 아이는 두세 살만 돼도 엄마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품을 뒤진다. 얼굴에 분칠하고 입술 바르고 난리를 피운다. 만날 거울에 매달리는 엄마를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이다.

다섯 살 난 아들이 틈만 나면 옆집 아이와 싸우는 걸 보고 그 아빠가 이렇게 말했다 한다.

“사내란 모름지기 이노오옴! 하고 딱 잘라 애기하는 법이야.”

그 뒤부터 다섯 살배기 아들은 그 아빠더러 호통을 치더라고 하지 않는가. “이노오옴!” 하면서. 바로 아빠가 가르쳐 준 그대로.

옛 어른들 말이 있다. 

“아이 앞이선 무시거 좁아먹지도 못 헌다.” 
(아이 앞이선 무엇을 집어먹지도 못한다.)

밥 먹다 밥알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면 손으로 주워 먹던 시절이 있었다. 어른이 집어먹는 걸 보면서 자란 아이는 커서도 손이 바닥에 가 있다. 버릇이란 무서운 것이다.

‘아이 앞이선 입도 촉 말라.’ 

말인즉 백번 옳다. 아이 마음은 텅 빈 백지와 같다. 하얀 바탕에 어떤 색깔을 칠하느냐에 따라서 원색 그대로 그려진다. 아이 앞에서는 남에게 눈 흘기거나 사소한 말 한마디도 조심할 일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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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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