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청소년아카데미] 김종민 전 4.3중앙위원, 중앙여고서 특강 "4.3은 평화·인권의 상징"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왜곡되고 묻혀왔던 제주4.3. 갓 18살이 된 이들에겐 아득한 옛날이야기, 혹은 막연한 비극으로만 여겨져 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4.3은 평화·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상징이었다. 너무나 잔인하고 참혹했지만, 깡그리 불에 타 잿더미가 된 땅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내 할머니·할아버지가 일궈낸 역사 그 자체였다.

4.3 70주년을 맞아 <제주의소리>가 마련한 '찾아가는 4.3청소년 아카데미'가 30일 오후 2시 중앙여자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렸다. 이날 아카데미는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라는 주제로 중앙여고 2학년 학생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참여형 토크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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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일 오후 2시 제주중앙여자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찾아가는 4.3청소년아카데미'에서 김종민 전 4.3중앙위원이 강의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강사로는 기자 시절 방대한 현장취재에 이어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내며 지난 30년간 오직 제주4.3의 진실규명에 천착해 온 명실상부 4.3 최고의 전문가, 김종민 전 위원이 나섰다. 김 전 위원은 4.3을 단편적인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고 당시의 시대상황과 4.3이 발발하게 된 배경 등을 폭 넓게 설명했다.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말기로 거슬러 올라갔다. 김 전 위원은 "당시 제주는 일본군에 의해 요새화 돼 있었다. 얼마나 무기가 많았냐면 제주도에서 별도의 항복 조인식이 있었을 정도였다. 서울에서 항복 조인식을 했으면 했지, 전라도에서 한번, 경상도에서 한번, 그러지 않았는데, 유독 제주도만은 별도로 항복 조인식을 받은 만큼 엄청난 무기와 병력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우리 힘으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것도 억울하지만, 분단 과정도 우리에게는 굉장히 억울한 일이었다. 전범국가인 독일처럼 일본이 분단됐어야 했는데 엉뚱하게도 당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분단했다. 지정학적으로 한반도가 굉장히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자기네 마음대로 분할 점령을 한 것"이라며 "결국 남한은 미군정에 의해 신탁통치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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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일 오후 2시 제주중앙여자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찾아가는 4.3청소년아카데미'에서 김종민 전 4.3중앙위원이 강의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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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일 오후 2시 제주중앙여자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찾아가는 4.3청소년아카데미'에서 김종민 전 4.3중앙위원이 강의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 전 위원은 "이 과정에서 미군정은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일제의 경찰과 일제의 군을 그대로 등용한 것"이라며 "같은 민족을 탄압하고 독립군을 때려잡던 친일파들을 다시 등용했다는 것은 굉장히 불만요소로 작용했다. 군대 임관자 110명 중 일본군 출신 87명, 만주군 21명, 광복군 2명일 정도"라고 했다. 특히 "그러다보니 당시 제주는 굉장히 부패가 심했다. 중앙언론에서는 제주도가 '모리배 천하'라고 표현할 정도였고, 결국 그 피해자는 제주도민이었다"고 당시 시대상을 전했다.

그는 "4.3은 1947년 3월1일 기념식에서 한 어린이가 기마경찰의 말에 치이면서 촉발됐다. 기마경찰이 이 사건을 수습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자 제주도민들이 돌맹이를 던지면서 기마경찰을 쫓아갔는데, 이 경찰이 총을 쏘면서 총 6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민들은 총파업을 하게 된다. 모든 관공서, 공공기관, 학교, 심지어 제주출신 경찰들까지 파업을 했다"며 "총파업의 요구조건은 가해자를 처벌하고,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한 것이었는데, 갑자기 제주도를 '빨갱이의 섬'이라고 규정지으면서 엄청난 군인들을 파병하게 된다"고 말했다.

제주4.3의 경우 일각의 주장처럼 단순 특정세력의 '무장봉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건 전후의 시대상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김 전 위원은 "육지의 경우 다른 마을로 피신갔으면 됐겠지만, 사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불법으로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결국 무차별 학살이 이뤄졌다. 모든 마을에 불을 지르고, 불길에 놀라 뛰어나온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고 했다.

당시의 상황을 재해석한 그림 등이 화면에 띄워지자 학생들은 일제히 탄식을 내뱉었다. 일가족이 학살당한 후 홀로 살아남은 어린이의 사연이 전해질 때, 몇몇 학생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김 전 위원은 4.3을 단순히 '비극'으로만 끝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그는 "4.3 7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젖먹이 갓난아기가 70세, 당시 10살은 80세가 됐다. 그때의 어린아이가 완전히 깡그리 불에 타버린 땅을 고사리 같이 여린 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 우리가 있는 제주도는 저절로 아름다운 곳이 된게 아니다. 참혹한 사건을 겪었음에도 다시 아름다운 제주를 복원해낸 것은 굉장히 기적적인 일이며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라며 "여러분은 그 분들의 손녀나 증손녀다.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위원은 "제주4.3사건은 평화, 통일,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상징으로 기억될 것이다. 평화와 인권이 가장 철저하게 유린됐던 역사였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제주 사람들은 너무나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키워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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