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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4.3집체극 <한라>가 4월 1일 제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됐다. ⓒ제주의소리

[리뷰] 4.3집체극 <한라>

4월 1일 제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4.3집체극 <한라>가 뇌리에 남는 건, 거리 공연을 실내로 옮긴 이유만은 아니다.

4.3집체극은 2001년부터 4월마다 열린 4.3역사맞이 거리굿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역사맞이 거리굿은 2016년부터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삼촌》과 강요배 화백의 화집 <동백꽃지다> 작품을 결합해 연극화했다. 비 날씨 속에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인 2016년, 망루를 설치하고 인원도 늘린 2017년에 이은 올해는 세 번째 시도다.

앞서 두 번의 거리굿은 4.3의 종합예술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다만 종합예술로 향할수록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요구 역시 함께 상승했기에 기대와 아쉬움이 늘 교차했다. 그래서 거리가 아닌 정식 실내 무대로 옮긴 올해 거리굿에 일찌감치 관심이 모아졌다.

<한라>를 시작하기에 앞서 프롤로그(prologue) 성격의 4.3역사거리굿 <해방>이 문예회관 야외 마당에서 열렸다. 흥겨운 풍물 가락으로 1945년 해방에 대한 기대와 미군정 점령 후 갈등 양상, 1947년 3월 1일 28주년 삼일절기념대회까지를 그렸다.

30분의 쉬는 시간을 가지고 공연 시작 시간이 되자, 마치 <해방>이 다시 이어지는 듯 풍물에 취한 배우들이 출입구에서 들어와 무대를 채웠다. 야외 공연을 흥겹게 재현하던 중 별안간 들리는 총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라>는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다.

<한라>는 지난 2016~2017년 구성을 큰 틀에서 유지한다. 3.1발포사건부터 초토화작전까지 주요 순간을 <동백꽃지다>와 함께 보여주고, 막바지 학살의 순간은《순이삼촌》의 한 구절로 재현한다. 그림은 영상 배경이 되고, 소설 속 문장과 시·노래는 대사가 된다. 김경훈 시인이 《순이삼촌》을 낭독하는 현기영 작가 겸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내레이션을 맡았다. 배우 여상익, 현애란, 신제균과 거리굿에 3년째 출연하는 볍씨학교 학생들이 연기자로 참여했다.

지난해와 달라진 점이라면 무엇보다 실내 공연을 빼놓을 수 없다. 야외 공연도 가설무대를 설치하지만, 음향·조명 시설을 체계적으로 갖춘 무대는 총소리, 배우들의 쓰러지는 동작 하나에도 확연히 차이나는 몰입감을 선사했다.

디지털 음원이나 풍물 연주 대신 국악오케스트라가 등장했다. 청주에서 온 국악관현악단 '더불어 숲'은 노래 연주뿐만 아니라 효과음까지 소화하며 공연을 한층 풍성하게 만들었다. 공연 클라이막스, 군인들의 민간인 학살 장면은 더불어 숲이 만들어낸 날카로운 총소리와 무대 한 가운데서 쓰러지는 배우 연기가 더해져 객석을 숙연하게 했다. 학살이 끝난 뒤 시체가 즐비한 장면에서 김경훈 시인은 한동안 대사를 읽지 못했고, 고요한 적막 속에 훌쩍이는 소리가 객석에서 흘러나왔다.

중요한 역사 순간을 재현한 시도 역시 인상적이다. 김익렬 9연대장과 김달삼 무장대 지도자의 평화 협상 과정은 이전 거리굿에선 없었다. 시간과 내용을 제법 공들여 소개했는데, 이미지가 흐름 끊기듯 나열되던 지난 공연들과 비교하면, 협상 장면은 4.3 진행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실제 역사가 여러 국면이 얽히고설키기에 더욱 그렇다.

제주작가회의 회원들의 낭독, 퍼포먼스 출연은 다른 연출로 대체하고, 《순이삼촌》 현기영 작가를 연기한 이경식 마임이스트는 조연출로 자리를 옮겼다. 미군정이 4.3 당시 촬영한 사진·영상을 추가하는 등 실내 공연에 맞게 편집한 노력도 눈에 띈다. 3년째 출연하는 볍씨학교 학생들은 노래나 연기에 있어서 프로다움보다는 풋풋한 에너지로 활력을 불어넣었다. 배우 현애란은 개인이 주목받기 어려운 집체극이라는 여건에서도 학살의 흔적에 소스라치며 절규하는 짧고 굵은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4.3을 알리는 <한라>에 아쉬움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공연의 한 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강요배 화백 그림은 내내 흐릿한 화면으로 답답함을 자아냈다. 어떤 노래는 자막이 있고 어떤 노래는 자막이 없는 불균형에, 소품도 보다 다양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출연하기로 했던 합창단도 결국 빠졌다. 시나리오, 연출, 조명, 영상, 무대 구성, 연기, 소품·장치 등 엄격하게 실눈을 뜨고 바라보면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모든 공연에는 기대치가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 배우, 제작비 등을 따져보며 평가하는 것이다. 유명한 배우, 많은 돈이 투입되면 그만큼 기대치는 높아지고, 반대의 경우는 낮아진다. 그러나 '가능성'은 이런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 <한라>가 바로 그렇다. 

제한된 여건에서 머무르지 않고 17년간 이어온 거리굿의 저력이 응축된 <한라>는 마치 겉으로는 깡말라 보이지만 뿌리만큼은 단단하게 박힌 작은 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최근 3년 동안 매해 완성도를 끌어올리며 4.3 종합 공연예술로서 가능성을 분명히 확인시켰다. 보완과 발전이 이뤄진다면 4월 봄날 만개한 벚꽃나무처럼 4.3을 대표하는 공연으로 커나가리라 확신한다. 

수 억원의 세금을 들여 공연 작품을 만들고 몇 번 무대에 올려 사라지기를 반복했던 제주도 예술 행정의 예전 사례를 기억하면 <한라>가 지나온 길은 더욱 선명하다. 현장에서 만난 김동현 문학평론가는 “<한라>는 4.3 예술운동 30년이 쌓여서 만든 소중한 성과”라고 호평했다. 

“냉정하지만 좋은 예술 작품만이 4.3을 명예롭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들이 기억해야 한다. 4.3을 후세들에게 재 기억시키고 세계화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술뿐이다. 행정은 민간 차원에서 벌이는 이런 노력이 가능하도록 뒷받침해달라.” - 현기영

“4.3의 사실을 드러내고 확산시키는 예술 작업은 꽤 나왔다. 이제는 감성적인 예술로 가야되지 않나 싶다. 영화 <지슬>처럼 대중적으로 감동을 주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너무나 선명한 의식으로 사명감이 앞서서 예술성을 떨어뜨리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 강요배
지난 2016년 4.3예술의 현 주소를 취재하면서 두 원로 예술가는 이렇게 조언했다. 4.3집체극 <한라>는 이런 조언에 부합하는 종합예술로서 가능성을 품고 있다. 힘들게 걸어왔고, 또 갈 길이 멀지만 <한라>는 4.3 70주년 예술 운동의 뜻 깊은 성과로 기록될 만하다. 막이 내리고 난 뒤, 관객들의 힘찬 박수와 격려의 함성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라> 최상돈 총감독은 “다음에는 시민배우를 모집해서 공연하는 구상이 있다. 국악관현악단 더불어 숲과 연계해 청주에서 선보이는 계획도 논의 중”이라며 <한라>는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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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4.3집체극 <한라>가 4월 1일 제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됐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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