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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민 전 위원이 애월고 미술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4.3 청소년아카데미 강연을 하고 있다.
[4.3청소년아카데미] 김종민 전 4.3위원회 전문위원, 애월고에서 세 번째 강연

“아내와 부모, 장모와 처제를 모두 잃었던 고 김태생님은 애국의 혈서를 쓰고 군대에 지원했습니다. 4.3에서 ‘빨갱이’로 몰렸던 청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지켰습니다.”

지난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0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 추도사 내용으로, 제주4.3 피해자 고(故) 김태생씨 얘기다.

김씨는 4.3 당시 삼양리(지금의 제주시 삼양동) 학살극을 피해 산으로 피신했다. 토벌대는 김씨의 아내와 부모는 물론 처가 식구들까지 폭도 가족이라며 몰살시켰다. 사태가 조금 진정된 후 은신처에 나온 그는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쟁에서 총상까지 입은 그의 군번은 0310413. 일부가 주장하는 4.3 폭도이자 국가유공자인 셈이다.

4.3 70주년을 맞아 <제주의소리>가 마련한 '찾아가는 4.3청소년 아카데미'가 17일 오후 2시 애월고등학교에서 열렸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역사입니다'라는 주제로 애월고 1~2학년 미술과 학생 80명이 함께한 가운데, 토크콘서트로 진행됐다. 강연자는 김종민 전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
기자 출신인 김 전 위원은 1988년부터 4.3 관련 기획기사를 무려 456편을 쏟아냈다. 자타공인, 명실상부 제주4.3 최고의 전문가다. 30년간 생생한 증언 확보를 위해 만난 4.3유족만 7000명이 넘는다.

최근 4.3 정명(正名)운동이 조금씩 활발해지고 있다. 사건과 항쟁 등등. 김 전 위원은 “4.3 정명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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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월고 미술반 학생들이 김종민 전 위원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4.19혁명과 6월민주화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대부분은 10일 정도로 소요사태가 마무리됐다.

반면, 제주4.3은 1947년 3월1일을 시작으로 1954년 9월21일 한라산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장장 7년 7개월에 걸쳐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다.

김 전 위원은 “1954년 9월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됐다. 4.3 발발 원인이 된 1947년 3월1일 이후 한라산은 아무나 입산할 수 없었다. 1954년을 4.3이 끝난 시점으로 보는 이유다. 7년 7개월에 걸쳐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4.19혁명이나 6월항쟁, 5.18 등은 비교적 기간이 짧아 성격을 규정하기 쉽지만, 4.3의 경우 7년 7개월간 여러 고비가 있어 정의가 쉽지 않다. 탄압의 국면이 있었고, 항쟁의 국면도 있었다. 또 수난의 국면도 있었다”고 강조했다.

김 전 위원은 “4.3 당시 희생자의 약 10%는 무장대에 죽임을 당했다. 그 중엔 경찰 가족도 있고, 군·경과 아무 관계 없는 사람도 있다.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었다. 그 희생자 유족들의 아픔도 헤아려야 하는데, 4.3을 항쟁으로 규정하면 무장대에 의해 숨진 무고한 민간인이 항쟁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고 덧붙였다.

그는 “4.3 7년7개월의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면 안된다. 개인사, 가족사 등을 넘어 길게 호흡해야 한다. 세월이 흘러 후세가 역사적 관점으로 제대로 정명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김 전 위원의 특강은 4.3이 발발하게 된 시대 상황 설명에 집중됐다. 특강이 끝나고 방송인 오한숙희 사회로 애월고 학생들이 4.3에 대해 묻고, 김 전 위원이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4.3 70주년을 맞아 기획된 청소년 아카데미는 제주중앙여고, 제주제일고에 이어 이번이 3번째다. 오는 6월께에는 미술로 4.3을 널리 알린 강요배 화백과 이날 청소년 아카데미를 수강한 애월고 미술과 학생들의 만남도 예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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