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국내 법의학 대가 이정빈 교수 동물사체 실험...사후 7일 직장체온 고온 현상 ‘입증’

제주 보육교사 살인사건 재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범행 당시 혼선을 빚은 피해자의 사망시점을 밝히는데 주력했다.

살인사건 수사의 기본인 사망 시점이 특정되지 않으면 수사 방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용의자의 후보군을 좁히지 못해 증거 능력에서 제약이 따른다.

경찰은 피해 여성의 사망시점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국내 첫 동물사체 실험을 진행했다. 사망 당시 피해자의 상태와 기후조건까지 맞추는 등 실험은 치밀하게 이뤄졌다.

제주지방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은 25일 오전 10시30분 한라상방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중요장기미제(사건번호:2015-173호)에 대한 재수사를 공식 발표했다.

현장에는 국내 법의학계 1인자인 이정빈 전 서울대 법의학교수가 직접 참석했다. 현철호 전북청 과학수사계 검시사무관과 송태화 경찰수사연수원 교수 등 전문가도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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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검의 “사체 발견 직전 사망” vs 경찰 “실종 직후 사망” 9년째 이어진 혼선

법의학계의 관심을 끈 이번 사건은 2009년 1월31일 친구들과 술을 마신다며 집을 나선 이모(27.당시 27세)씨가 8일만인 그해 2월8일 제주시 애월읍에서 숨진채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경찰은 애월읍 고내봉 옆 배수로에서 시신을 수습하고 곧바로 부검에 나섰지만 얘기치 않은 곳에서 벽에 부딪쳤다. 살해 시점이 문제였다.

부검의는 살해 시점을 사체 발견 직전인 2월6~7일로 추정했다. 위 속 음식물이 소화되지 못했고 사망직후 피부에 생기는 자줏빛 얼룩점(시반), 당시 체온, 부패 정도를 이유로 들었다.

베테랑 형사들은 손사래를 쳤다. 시신의 부패가 더디고 음식물이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이유로 당시 기후요건과 오름 옆 농업용 배수로의 구조적 특징을 제시했다.

성인 여성이 납치돼 일주일간 음식을 먹었다는 설정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실제 부검 당시 시신에서 손발이 묶였던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사망 시점부터 혼선이 빚어지면서 경찰은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현장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형사들이었지만 부검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2012년 6월5일 수사본부마저 해체되면서 사건은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경찰은 2016년 2월 미제팀을 신설해 사건을 넘겨받고 올해 3월 TF를 꾸려 이 사건을 전담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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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은 제주 보육교사 살인사건 수사 과정에서 혼선을 빚은 사망 시간을 특정짓기 위해 올해 초 범행 현장에서 돼지와 개 사체를 이용한 동물 실험을 진행했다. ⓒ제주지방경찰청 제공
▲학설은 “인간 사망후 직장체온은 대기온도와 비슷”...돼지사체 실험으로 직장체온 변동 확인

미제팀의 첫 번째 과제는 사망시간 특정이었다. 이를 위해 올해초 개와 돼지를 이용한 부패실험을 계획했다. 법의학 교수와 검시관, 경찰수사연구원 교수 등 전문가들을 초빙했다.

실험은 치밀하게 이뤄졌다. 시신이 발견된 배수로에서 개 3마리와 돼지 4마리를 이용해 7~10일 간격으로 4차례에 걸쳐 동물 부패 실험을 실시했다.

2009년 2월 당시 기후조건을 맞추기 위해 기상청 날씨의 편차까지 분석해 최대한 동일 조건을 만들었다. 동물 사체에는 피해여성이 착용한 무스탕까지 입혀 실험을 진행했다.

핵심은 세가지였다. ‘시강이 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지’, ‘내부 장기의 부패가 전혀 진행되지 않을 수 있는지’, ‘사체 직장체온이 천막 안 대기 온도보다 3.8도가 높을 수 있는지’다.

시강은 사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뻣뻣해지는 현상이다. 당시 사체는 사후 7일이 지난 것으로 추정됐지만 정작 내부 장기에서 부패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통상 사람은 사망 직후 체온이 내려가며 외부온도와 비슷해진다. 반면 피해 여성은 직장체온이 대기 온도보다 높았다. 당초 부검의가 발견 직전 사망 의견을 낸 것도 이 때문이다.

사체 발견 당시 범행 현장의 기온은 8.2도였다. 검안 당시 사체를 옮긴 천막의 온도는 9.2도였지만 피해 여성의 직장체온은 13.0도로 외부 온도보다 오히려 높았다. 

미제팀은 범행 현장의 실제 온도가 7.9도이던 2월말 같은 조건에서 피해여성이 입었던 재질의 무스탕까지 돼지에 입혀 부패와 직장체온을 확인했다.    

그 결과 사체 직장체온이 대기 온도보다 낮아졌다가 다시 높아지는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부패도 일반적인 사체의 부패속도와 비교해 현저히 늦었다.

미제팀은 피해여성이 무스탕을 입어 내부 보온 현상이 나타났고 배수로의 콘크리트 벽면이 복사열을 흡수해 직장체온이 대기온도보다 높은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분석했다.

낮은 온도와 높은 습도로 기화열이 발생하면서 체온 저하효과가 더해져 부패도 지연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를 토대로 미제팀은 사망 시점을 발견 시점이 아닌 실종 당일로 판단했다. 

▲ 제주 어린이집 보육교사는 2009년 2월8일 실종 8일만에 제주시 애월읍 고내봉 인근 배수로에서 숨진채 발견됐다. 실종 다음날 제주에서는 이틀간 비가 내렸다. ⓒ제주의소리
▲사체에서 발견된 흙먼지 실종 당일 제주는 ‘비’...배수로에 흐른 물 영향 설명 가능

사망시점을 특정 지을 증거는 또 있었다. 실종 당일 애월읍에는 비가 내렸다. 2009년 2월2일 제주시 강수량은 1.0mm, 고산은 3.0mm였다. 이튿날에는 더 많은 비가 내렸다.

사체 발견 당시 시신에는 흙먼지가 많았다. 미제팀은 비가 내린 후 배수로에 물이 흐르면서 흙이 자연스럽게 시체에 묻은 것으로 해석했다.

실제 사체가 발견된 2009년 2월8일을 전 5일간 제주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부검의 소견대로 발견 직전 사망했다면 사체에 묻은 흙먼지를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사체가 발견되기 이틀 전 이 지점에서 30km 떨어진 제주시 아라동의 한 숲에서 피해여성의 가방이 발견됐다. 당시 가방은 물론 안에 있던 소지품들도 젖어 있었다.

제주시에 비가 내린 날은 2월2일과 3일이었다. 경찰은 범인이 실종 당일 여성을 죽이고 소지품을 이 곳에 던진 것으로 봤다. 이 경우 비에 젖은 가방에 대한 설명도 가능해진다. 

이정빈 전 서울대 법의학 교수는 “당시 현장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면 나도 부검의와 같은 의견을 냈을 것”이라며 “이번 사건은 기후와 지형적 여건이 특이한 사례였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범행 현장 특성에 따라 사망시간 추정을 위한 직장체온이 변할 수 있다는 범의학적 성과가 있었다”며 “향후 유사 범죄에도 이번 실험이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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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법의학계의 대가인 이정빈 전 서울대 법의학 교수가 25일 오전 10시30분 제주청 2층 한라상방에서 동물사체 실험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동물사체 실험 결과 ‘법정 증거채택 관심’...2016년 국내 첫 니코틴 살인사건도 증거 인정

경찰은 감정결과를 토대로 보육교사 살인사건의 범행시점을 실종 당일로 좁히고 추가 증거 수집에 집중하고 있다. 용의자 후보군을 추리기 위한 수사도 본격화 했다.

용의자가 특정되고 실제 기소까지 이를 경우 이번 실험 결과는 공소유지를 위한 중요 증거가 된다. 관심은 실제 법정에서 범행 입증을 위한 증거로 작용할 수 있느냐 여부다. 

이정빈 전 교수는 2016년 4월  국내 첫 니코틴 살인사건에서도 동물실험을 통해 이를 입증했다. 실험 결과는 실제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돼 유죄까지 이끌어 냈다.

니코틴 살인은 2015년 4월22일 경기도 남양주시 한 아파트에서 오모(당시 53세)씨가 숨진채 발견된 사건이다. 검안에서 특이점은 없었다. 근데 부검에서 특이한 점이 나타났다.

몸 속에서 니코틴이 너무 많이 나왔다. 혈액 중 니코틴 농도가 L당 3.7mg 이상이면 죽을 수 있다. 오씨의 몸에서는 L당 1.95mg의 니코틴이 나왔다. 오씨는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았다.

당시 이 교수는 니코틴 원액을 동물에게 접촉해 실제 치사량에 이르는 수치를 데이터화 했다. 이 실험 결과는 법정 증거 자료로 제출됐고 부인은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이 교수는 “이번 사건과 관련한 동물 실험이 법정에서 증명력이 있는지 여부는 단정할 수 없다”며 “다만 과거 사례에 비춰 법정에서 증명력을 갖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기헌 제주청 형사과장은 “9년 전 범행을 재수사하는 만큼 조심스럽고 세밀하게 접근하고 있다”며 “사망시점 특정으로 수사방향도 달라지는 만큼 범죄 해결에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25일 오전 10시30분 제주청 2층 한라상방에서 김기헌 제주지방경찰청 형사과장이 동물사체 실험 결과를 설명하며 재수사를 공식화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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