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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영 전 농협지점장 첫 시집 발간...지적장애 아들 이승일 이어 '모자(母子)' 시인

부모와 자녀 사이, 피를 이어 받은 평범하면서 더 없이 특별한 관계다. 농협 제주대학교 지점장을 역임한 고혜영 씨와 아들 이승일 씨 사이에는 다른 인연이 하나 더 더해진다. 바로 시(詩)다.

고 씨는 최근 자신의 첫 번째 시조집 《하나씩 지워져 간다》(동학사)를 발표했다. 지난 2016년 한라신춘문예로 등단해 젊은시조문학회에서 활동하면서도 본인 이름 석 자를 새긴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100쪽이 조금 넘는 책이지만, 세상에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과 노력, 사연은 그 몇 배를 써도 모자란 정도다. 

평소 고 씨과 가까운 관계로 책 해설을 도맡은 고정국 시인은 “일찍이 고혜영은 시골학교를 졸업하고 힘겹게 금융계 직장에 들어간다. 직장 상사들의 대화를 듣지만 그들의 대화 내용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며 “비로소 세상에 대한 자신의 무지함을 인지하고 국내 대표 신문 다섯 종을 10년간 하나도 남김없이 훑어 읽어내고서야 어렴풋이 세상에 눈금이 보였다”고 저자 설명을 대신했다.

배움에 눈뜨고 나서 대학·대학원 과정을 밟았고, 직장에서는 지점장까지 올랐다. 은퇴 후에는 곳곳에서 출강 제의 같은 러브콜을 받았다.

'엄마'로서는 지적 장애인 막내 아들 이승일 씨를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키우기 위해 지극정성을 기울였다. 

이 씨는 6살에 지적 장애 판정을 받고 망막박리로 양쪽 시력까지 모두 잃을 뻔 했지만, 고 씨의 뒷바라지로 2012년 한라대 방송영상학과에 입학하는 등 세상에 한 발씩 내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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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혜영 씨(왼쪽)와 아들 이승일 씨. 제공=고혜영. ⓒ제주의소리

엄마는 피할 수 없는 제약을 안고 태어난 아들이 누구보다 맑은 영혼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엄마는 아들과 반드시 하루 한 번 책을 읽었고, 아들은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 씨는 19살이 되던 2008년 평소 습작처럼 써오던 글을 모아 시집 《엄마, 울지마세요 사랑하잖아요》(연인M&B)를 펴냈다. 2011년에는 한국장애문화진흥회가 인증하는 ‘한국장애인예술인총람’에 지적장애 문인으로 유일하게 등재돼 제주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지금도 주말이면 두 사람은 함께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면서 서로의 내면을 보듬는다. 

‘한 편의 시는 당사자이든 독자에게든 또 다른 영감의 세계를 향한 징검돌 구실을 합니다. 그 수많은 우여곡절에서 강화된 내공의 힘이 고혜영 시인 전신에 내장돼 있으리라 믿습니다.’
- 《하나씩 지워져 간다》 가운데 고정국의 해설 일부분.
한 줌의 소금을 얻기 위해서는 바닷물, 햇볕, 바람 그리고 시간이 더해져야 하듯, 고 씨의 첫 시조집이 세상에 나오기 까지는 남모르게 흘린 눈물과 끈기가 쌓여야만 했다.

역경을 딛고 일어난 드라마틱한 삶의 궤적 덕분인지 여러 곳에서 그를 찾지만, ‘힘든 세월 속에서 글쓰기로 치유를 얻었다. 내가 평생 가야할 길은 글’이라며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고 씨는 시 뿐만 아니라 수필 등 다양한 글을 쓰고 싶다는 고요한 열정을 품고 있다.

단풍 앞에서
고혜영

아픈 만큼 주신 선물
이제야 받습니다

원망 분노 절망 희망...
십 년 세월 보내고서야

담쟁이 붉은 핏줄의
따스함을 압니다
고 씨는 책 머리에 “음력 십일월 스무사흘. 마당에 하얀 달이 떴다. 낮달이 내 삶을 닮았다. 서쪽으로 기울수록 별들이 하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워지는 것 같지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는다. 낮달, 여러번 수도 없이 보아왔을 테지만 지금까지는 한 번도 알아차리지를 못했다. 작고 일시적인 것에서 기쁨을 얻다니. 이 기쁨은 나의 글쓰기 멘토이며 순수한 영혼을 가진 막내 승일이의 몫으로 남겨둔다”고 소감을 남겼다.

동학사, 104쪽,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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