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입시의 도구로 전락한 10대들의 글쓰기. 결국 그들의 가슴을 울릴 수도,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없는 글쓰기다. ‘글은 곧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과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하고,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의 결이 드러나는 10대들의 진짜 글쓰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선명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10대들이 자신의 언어로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라. 최근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펴낸 오승주 작가가 지난해 제주도내 중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했던 사례들을 접목시킨 귀 기울일만한 10대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싣는다.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연재다. 매주 1회, 총 30회 집필을 예정하고 있는 이 코너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21) 《이인(異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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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만에 ‘나의’ 분신을 만난다면?

기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훨씬 더 젊고 파란 넥타이에다 회색 모직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앞에다 펜을 내려놓고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약간 비대칭인 그의 얼굴에선 아주 맑은 두 눈만이 보였고, 그는 그 맑은 눈으로 나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나 자신이 나를 바라보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알베르 카뮈, 《이인》 2부
“학생 OOO는 생각하는 게 기발하고 독특해요”라는 칭찬으로 시작한 선생님의 말씀은 뒤로 갈수록 안타깝게 흘러갔습니다. 항상 다른 관점으로 생각하고 진지하지만 어렵게 접근하려 하다 보니 단순한 문제도 무척 복잡하게 바라본다는 평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슬슬 식은 땀이 났습니다. 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성적은 생각만큼 나오지 않는다는 말에는 온몸에 힘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건 내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이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살인죄를 저질러 뜨거운 여름날 재판정에 세워졌을 때 그를 취재하던 수많은 기자들 틈에서 유난히 눈에 띄던 눈 맑은 젊은 기자. 심지어 뫼르소는 젊은 기자에게 시선을 빼앗기느라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 마리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죠. 자신의 어릴 적 분신을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는 기분은 참 묘했습니다. 

저는 그 학생을 눈여겨보고 한마디라도 대화를 더 나누었고 좋은 책을 소개해주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 학생’ 나이였던 시절에는 참 외로웠고 누군가 그리웠습니다. 사랑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어른의 사려 깊은 조언과 내 마음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무척 그리웠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맨땅에 헤딩한다는 건 몹시 피곤한 일이죠. 친구들은 어찌나 빨리 요령을 터득하는지. 요령을 터득한 친구들은 좋은 성적과 좋은 직장을 꿰차고 남부끄럽지 않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뭔가 부조리하다는 생각 안 드세요?

부조리(不條理)의 사전적인 의미는 ‘이치에 맞지 아니하거나 도리에 어긋남. 또는 그런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2병’의 장본인 중학교 2학년들은 뭔가 꼬이고 구부정해 보입니다. 여학생들은 말을 걸면 무슨 낱말이 튀어나올지 알 길이 없고, 남학생들에게는 말조차 걸기 어려운 묘한 냉기가 흐릅니다. 카뮈 표현대로 하자면 상당히 부조리해 보입니다. 하지만 중학생들이 아니라 ‘세상’이 부조리한 것이라면? 찌그러져 보이던 10대들이 곧게 펴지는 지점에서 《이인》의 주제 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서둘러 봉합해서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다들 경험한 적이 있을 겁니다. 부모님이 며칠 비운 집에서 친구들과 못된 짓을 하다가 뜻밖의 방문에 서둘러 덮고 가리고 치운 방의 모습처럼 말이죠. 멍한 눈으로 ‘그저 그렇겠거니’ 하다가는 멀쩡한 상태에서 불합리니 부조리니 문제아니 하는 허물을 덮어쓰기 십상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침대’ 이야기를 아시나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악당 프로크루스테스는 자기 집에 들어온 손님을 침대에 눕히고 침대보다 키가 크면 다리나 머리를 자르고, 작으면 사지를 잡아 늘여서 죽였죠. 하지만 영웅 테세우스를 만나는 바람에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죽였던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대한민국의 정규 교육체계는 비유컨대 거대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습니다. 침대에 제대로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개별적인 자아와 개성이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정규 교육을 졸업했다고 해서 침대를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직장의 침대, 사회의 침대, 상식의 침대, 정치의 침대. 

자, 선거철이니 정치 침대 한 번 들려드릴까요? 제주도지사 선거에서 범국민적 지지를 받는 당의 후보자가 상대 후보에게 밀리면서, 주요 포털사이트를 보면 도민을 싸잡아 공격하는 댓글이 많아졌습니다. ‘제주도 답 없다. 개·돼지 소굴이냐’, ‘부산 경남은 정신 차렸는데 제주도는 아직 미개한가봐’, ‘4.3학살자 후속정당 뽑아놓고는 우리더러 4.3을 이해시키려 하지마라’ 등입니다. 정치적 신념을 침대에 맞추기 위한 강한 압력이 느껴지시나요? 만약 이런 것들이 부조리하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프로크루스테스 공화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부조리한 10대’임이 분명합니다. 

《이인》, 부조리한 사회에서 서둘러 제거된 한 사나이의 이야기

《이인》은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 ‘뫼르소’가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해변에서 석연치 않은 살인사건을 저지르는 과정을 1부에 담았고, 검찰의 조서와 재판에서의 사형 언도, 상고와 사면 등의 자질구레한 일이 벌어지는 과정을 2부에 담았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의 충동적인 권총 살인 이야기가 어째서 20세기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고, 뫼르소라는 인물은 돈키호테나 햄릿에 버금가는 유명인이 되었던 걸까요? 국내에서는 《이방인》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뭔가 주변적인 느낌이 드는 번역어 ‘이방인’보다는 ‘전대미문의 것’,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 ‘다름으로 인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자’라는 의미가 포함된 아랍어 ‘이인(異人 : El Gharib)’이 더 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처음에 이 작품이 10대에게 맞는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뫼르소는 관능적인 사람이라 예쁜 여자를 보면 눈이 자연스레 돌아가고, 결혼을 약속한 마리가 예쁜 옷을 입거나 아양을 떨면 정욕이 일어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뫼르소를 ‘한국의 10대’라고 생각해보니 부적처럼 들어맞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만나 본 10대들은 “이러거나 저러거나 마찬가지”라는 말과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고 의미가 없다”는 말을 습관처럼 했었거든요. 물론 그 친구들은 ‘부조리’했죠. 만약 10대가 뫼르소를 본다면 ‘재수 없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이인’은 《데미안》의 ‘카인’과 친구임이 분명합니다. 

《이인》에서 우리들의 마음을 헤집어놓는 것은 2부에서 시작합니다. 어쩌면 정당방위일 수 있었던 뫼르소의 권총 살인은 존속살인에 버금가는 계획적이고 악마적인 살인이 되어 버리고, 정작 뫼르소 자신은 재판에서 배제된 채로 마치 남의 재판처럼 지나가는 말로 ‘사형 언도’를 듣습니다. 뭔가 정상적이지 않아 보이고 부조리한 것도 같은 인물의 하루하루가 묘사되다가, 살인사건 이후의 과정들은 매우 숨 가쁘게 흘러갑니다. 숨 막힐 것처럼 부조리한 공격이 뫼르소의 앞으로 쏟아지고 변호사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은 뫼르소가 ‘상고’도 아까운 ‘쓰레기’가 된 채로 쓸쓸히 처형 날짜를 기다리는 것을 보면서 심각한 부조리를 느낄지도 모릅니다. 1부에서 보았던 뫼르소의 부조리에 비하면 2부의 부조리는 ‘애교’였죠. 

“어머니가 사망한 다음날, 너무나도 추잡한 난봉질에 빠졌던 바로 그 인간이 그럴 만한 이유도 없이, 게다가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치정사건을 뒤치다꺼리하기 위해 살인을 한 것입니다.”
“본 검사는 저 인간이 범죄자의 마음가짐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기소하는 바입니다.”
“본 검사는 여러분께 저 인간의 목을 요구합니다. 그것도 가벼운 마음으로 요구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오랫동안 검사 생활을 해 오면서 이미 여러 차례 사형을 구형한 적이 있지만, 오늘처럼, 성스럽고 절대적인 명령에 대한 책임감 덕분에, 그리고 오로지 흉악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얼굴 앞에서 느끼는 혐오감 때문에, 이 힘든 의무가 보상 받고, 상쇄되고, 조명 받는다고 느낀 적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 《이인》, 검사의 논고
혹시 ‘강상죄(綱常罪)’를 아시나요? 조선시대의 절대 윤리인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배신한 범죄를 말하며 해당 죄인은 거열형(車裂刑), 즉 찢어 죽이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죄인이 살던 마을은 등급이 강등되어 세금과 부역 등에 심각한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거나, 노비가 그 주인을 폭행하고 살해 및 모욕한 경우가 강상죄의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서학(西學)의 영향을 받아 제사를 지내지 않은 선비에게도 강상죄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들끓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정조 시대의 윤지충(尹持忠)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뫼르소는 프랑스판 ‘강상죄’로 다스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 보면 불편할 수도 있는 성격이 중형의 가장 큰 이유였으니까요. 《이인》의 이야기의 결말이 재판과 ‘사형’이라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도 ‘반공주의’라는 ‘국시(國是)’가 엄존하죠. 성리학과 반공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국가폭력(옥사와 학살)이 자행되었습니까? 국시란 거대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습니다.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침대들’이 현실에서 떵떵거리는 모습이 몹시 부조리하지 않으신가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지금까지는 ‘부조리가 삶의 문법이자 사회의 문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뜻 있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용기를 내서 침대가 좀 느슨해졌을 뿐입니다. 만약 더 많은 사람들이 당당하게 침대의 서슬에 맞서 두 다리를 쭉 뻗는 일이 벌어진다면 침대는 어느새 세상에서 가장 안락하고 푹신한 최신형으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마치 그 거대한 분노가 내게서 악을 몰아내고 희망을 비워주기라도 한 듯이, 별들이 가득하고 징조들로 가득 찬 이 밤과 마주하자, 난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의 문을 열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비슷하고, 마침내 그토록 형제같이 느껴지자, 난 행복했었고, 여전히 행복하다는 걸 느꼈다. 모든 게 완성되기 위해서는, 내가 외로움을 덜 느끼기 위해서는, 내게 남은 소원이 있었다.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주기를. 
- 《이인》, 뫼르소의 마지막 독백 

#  필자 오승주는?

1978년 제주 성산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10여 년간 서울 강남에서 입시컨설팅, 논구술 특강 등의 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입시구조와 사교육 시스템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후 언론운동과 시민정치운동, 출판문화운동, 도서관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변화의 힘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끈이 이어지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소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직전, 아이의 간절한 외침 소리를 들었기 때문. 

2013년 《책 놀이 책》을 써 아이와 부모를 놀이로 이어 주었고, 3년간의 공부방 운영 경험과 두 아들과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썼다. 아빠 육아, 인문고전으로 아이 깊이 읽기로 가족 소통을 꾀했다. 

현재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사마천의 사기》를 집필 중이며 아주머니와 청소년을 작가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글쓰기·책쓰기 강사로서 지역 도서관과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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