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입시의 도구로 전락한 10대들의 글쓰기. 결국 그들의 가슴을 울릴 수도,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없는 글쓰기다. ‘글은 곧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과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하고,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의 결이 드러나는 10대들의 진짜 글쓰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선명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10대들이 자신의 언어로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라. 최근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펴낸 오승주 작가가 지난해 제주도내 중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했던 사례들을 접목시킨 귀 기울일만한 10대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싣는다.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연재다. 매주 1회, 총 30회 집필을 예정하고 있는 이 코너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30) 《돈키호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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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찢고 나서 벌어진 일들

엄마와 장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도중에 깡패가 나타나 엄마에게 데이트나 하자고 희롱했다. 나는 깡패를 제압하고 싶었지만 겁이 나서 가만히 있었다. 엄마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구해달라고 했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깡패는 엄마의 손을 강제로 잡아당겼다. 
엄마는 “엄마야!” 하며 소리 질렀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다. 순간 깡패와 부딪쳤는데 깡패가 넘어졌다. 엄마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엄마의 어깨가 강하게 내 배에 부딪치자 나는 스프링처럼 튕겨나갔다. 내 엉덩이가 깡패의 얼굴을 가격하자 깡패는 큰 충격을 받고 길게 나자빠졌다. 엄마는 내 옆구리에 팔짱을 끼고 웃으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OO아, 너는 든든한 아들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너의 몸뚱이와 엉덩이만큼은 든든하구나.” 나는 엄마에게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인정 어 인정”이라고 말했다. 깡패를 내 힘으로 물리치지 못해서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내 몸으로 깡패를 쫓아냈다는 게 자랑스럽고 든든했다. 
- 중학교 2학년 남학생 단편소설 <든든한 하루> 가운데
오늘은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마지막 글 쓰는 날입니다. 30개의 글을 쓰기로 약속하고 나서 매주 1권의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 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이들의 글은 떨어지지 않았고, 재밌고 새로운 사건도 계속 생겼습니다. 

초롱초롱 빛나는 아이들의 눈빛을 바라보면서 나는 가져왔던 종이를 마음 속으로 박박 찢어 버립니다. 찢은 종이는 수업 계획표입니다. 수업계획표대로 했다가는 아이들 눈빛에 배신이 될 게 분명합니다. 그 대신 눈빛 속에 나를 던지는 겁니다. 재밌는 것을 기다리는 눈빛에는 당연히 재밌는 걸 해야죠. 재미 대신 ‘의미’로만 이루어진 수업계획표가 박박 찢기는 벌을 받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요?

어느 날은 수업계획표와 함께 책도 찢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찢는다고 하자 어른들은 놀랐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분명히 열광하고 좋아할 것 같았습니다. 있는 의미 없는 의미를 갖다 붙여 강행한 ‘책찢 놀이’ 수업은 그야말로 ‘대박’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놀이를 하게 해준 보답으로 ‘책찢’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책 잔해들을 주먹으로 꾹꾹 뭉친 다음 테이프로 이어 붙여 공으로 만드는가 하면, 종이를 나무토막보다 딱딱하게 겹쳐서 멋진 검도 만들었고, 살아남은 책 몸통에 손잡이를 달아 강력한 방패도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책아, 내가 가장 짜증나는 친구를 저주하게 해줘서 고마워, 또 미안하기도 해. 왜냐하면 책을 찢었기 때문이야.” 
- 초등학생 A의 편지

“아름다운 책 안녕! 나는 동홍초등학교에 다니는 OOO야. 나는 너 덕분에 스트레스도 풀고 재미있었어. 네가 책으로 머리를 때리는 것이 정말 멋있었어.” 
- 초등학생 B의 편지
아이들이 ‘아름다운 책’에 고마움을 표시한 것은 이 놀이가 클로드 부종의 그림책 《아름다운 책》이 선물한 놀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이들을 못살게 했던 사람이나 그런 일을 법정에 세워놓고 책을 찢게 했지만 그 이후의 일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책을 찢는다는 행위 자체가 아이들 속에서 뭔가를 크게 자극한 듯했습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돈키호테’의 정신을 제대로 배워야만 아이들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우리 같이 미칩시다!

《돈키호테》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시대는 반종교개혁운동과 절대왕조였던 합스부르크 가의 통치가였습니다. 모든 인쇄물이 검열되었고, 여차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사라졌죠. 세르반테스는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매우 고심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통속 기사소설 형태를 도입함으로써 ‘주목’을 피할 수 있었고, ‘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검열을 비켜갔습니다. 그리고 《돈키호테》의 이야기는 아라비아인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자신은 그저 옮기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해명을 작품 곳곳에 적어 놓음으로써 작품도 작가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대와 작가의 위험한 숨바꼭질도 문학작품을 읽는 또 다른 매력이죠. 

하지만 《돈키호테》가 당대인들은 미처 알아볼 수 없었던 놀라운 언어 예술이라는 사실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발견되었습니다. 《돈키호테1》이 발표된 해는 1605년, 그가 57세였습니다. 2편은 10년 후이자 죽기 1년 전인 1615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작품이 발표될 당시에는 그저 웃기는 만화책 같은 작품으로 받아들여졌지만, 18세기부터 진가가 인정되더니 19세기에는 새로운 해석이 계속 더해져 철학자, 역사가, 사상가, 비평가, 그리고 정치가들이 《돈키호테》에 담긴 메시지를 탐색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매달렸습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작가들이 제1의 문학작품이라도 평가할 정도로 불멸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셰익스피어와 함께 유럽 문학의 거대한 봉우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착한 알론소 키하노’라고 부르는 시골 귀족이 기사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다가 미쳐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급기야 그는 스스로를 기사소설 속에 등장하는 편력기사들 중 한 명이라고 믿고 ‘돈키호테’라는 이름까지 붙인 뒤 중세의 복장과 무기를 갖추고 상상 속 공주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야윈 말 로시난테를 타고 모험을 떠납니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달려든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꿈에서 거인들의 목을, 현실에서는 적포도주가 든 통을 박살내는 장면이 더 재밌었습니다. 바닥에 널브러진 포도주통의 잔해들과 시뻘건 피 같은 포도주들. 그리고 냄새만 맡아도 취할 것 같은 느낌과 포도주통의 임자인 여관 주인과 피투성이가 되도록 주먹질을 하는 모습이 한눈에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에게 피할 틈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칼을 뽑을 새도 없이 소나무 몽둥이로 제 어깨를 후려치는 통에 저는 눈앞에 캄캄해지고 다리 힘이 풀려 버려 지금 누워 있는 이 자리에 쓰러진 거죠. 그들의 몽둥이질이 제 등에 남은 자국만큼이나 기억 속에 또렷이 새겨져 있으니 그 몽둥이세례가 모욕이니 아니니 하는 건 무의미한 일입니다.”
“산초, 이 모든 것에서 네가 깨우쳐야 할 점은 시간이 지우지 못할 기억이란 없는 것이며, 또한 죽음이 희석시키지 못할 고통도 없다는 것이다.” 
- 《돈키호테1》, 산초 판사와 돈키호테의 대화
돈키호테는 산초와 섞이며 현실에 조금씩 눈을 뜨고 통찰이 깊어지는 한편, 산초는 점점 돈키호테가 되어 갑니다. 긴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내인 후아나 산초가 자기 외투나 애들 신발이라도 얻어 왔느냐 물었을 때 산초는 “아니, 그런 것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어. 여보,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가지고 왔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투는 돈키호테의 것인지 산초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험을 찾아 나서는 정직한 편력기사의 종자가 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는 거야. 사실 백 가지 모험을 만났다 하더라도 아흔아홉 가지는 항상 정도에서 벗어나거나 꼬이게 마련이어서 좋은 대로 일이 잘 풀리지는 않는다는 거지.” 
- 《돈키호테1》, 산초가 아내에게 해준 대답
돈키호테가 섬의 영주를 미끼로 산초를 종자로 삼은 것은 신의 한 수입니다. 만약 혼자 미치면 그야말로 ‘미친 놈’이 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같이 미칠 만한 사람을 찾는다면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됩니다. 제가 방구석에 틀어박혀 혼자 소설책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면 내가 어떤 생각을 하던 그것은 한 사람의 망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읽고 생각한 것들을 서로 나누고 글을 통해서 공유하는 순간 ‘같이 미치는’ 일이 됩니다. 내 글을 읽고 한 사람이라도 공감을 해준다면 우린 ‘공범’이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제대로 미치는 방법입니다.

돈키호테에게 배운 ‘제대로 미치는 법’이 정말 제대로 들어가면 세상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생각과 행동을 한 사람들 중에서 ‘미쳤다’는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거든요. 오늘 《돈키호테》를 마지막으로 제 글은 끝나지만 우리들의 ‘미친 이야기’는 끝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나의 글을 애써 읽어준 ‘나의 돈키호테들’ 안녕! <끝>

#  필자 오승주는?

1978년 제주 성산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10여 년간 서울 강남에서 입시컨설팅, 논구술 특강 등의 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입시구조와 사교육 시스템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후 언론운동과 시민정치운동, 출판문화운동, 도서관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변화의 힘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끈이 이어지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소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직전, 아이의 간절한 외침 소리를 들었기 때문. 

2013년 《책 놀이 책》을 써 아이와 부모를 놀이로 이어 주었고, 3년간의 공부방 운영 경험과 두 아들과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썼다. 아빠 육아, 인문고전으로 아이 깊이 읽기로 가족 소통을 꾀했다. 

현재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사마천의 사기》를 집필 중이며 아주머니와 청소년을 작가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글쓰기·책쓰기 강사로서 지역 도서관과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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