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적 인간] ⑤ 싱 스트리트(Sing Street), 존 카니,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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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싱 스트리트>의 한 장면. 제공=현택훈. ⓒ제주의소리

1989년 제주. 남자 중학교.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같은 이름의 고등학교와 연계해 지방 명문으로 불리는 학교였다. 아버지도 그 중학교를 나왔는데 아버지가 학교를 다닐 때는 교모가 있었다고 한다. 그 교모가 자긍심의 상징이었다나. 중학교에 입학하니 정문으로 들어설 때 운동장에 세워진 국기를 향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수경례로 붙여야 하는 교칙이 아직 남아 있었다. 순진했던 우리는 정문에 들어서면 소년병처럼 태극기를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경례를 하지 않았다가는 옆에서 감시하는 선생님의 몽둥이가 열다섯 살 중학생의 어깨를 가격했다. 하긴 그때는 운동장에서 공을 차다가 애국가 흘러나오면 경기를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시절이었다. 축구를 하던 중이라서 심장 위에 올린 손이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남학생들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메탈리카 대 본 조비. 간혹 디페쉬 모드나 헬로윈이 좋다며 분위기 파악 못하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메탈리카 아니면 본조비였다. 메탈리카를 따르는 무리들은 과격하고 거친 면이 있었다. 어쩌다 락커라도 된 것처럼 선생님한테 반항적으로 굴다가 아구창이 날아가곤 했다. 메탈리카파에 비하면 본조비파는 다소 얌전한 편이었다. 패션과 머리에 신경을 쓰는 녀석이 많았다. 승마바지를 선호했고, 짧은 스포츠머리에도 앞머리를 치켜올렸다. 메탈리카파는 필기도구는 없어도 조각도를 지니고 다녔다. 책상이나 화장실 문 등에 조각도로 ‘Metallica’ 로고를 새겼다. 무슨 장인이라도 된 듯이 심혈을 기울였다. 

존 본 조비는 게이 같아. 음악도 게이 같아. 메탈리카파는 본 조비파를 그런 식으로 야유했다. 본 조비파는 글렌 메데이로스나 조지 마이클이 있던 왬으로 쉽게 전향해버렸을 때도 메탈리카파는 메탈리카를 고수했다. 그에 대한 보답인지 메탈리카가 1996년 서울에 왔다. 그후 메탈리카는 너바나에 의해 개박살 났다. 아이언 메이든도 아니고, 메가데스도 아닌. 시애틀의 그런지 락 밴드 너바나에게 일격을 당했다. 

더블린에서 런던을 동경하듯 제주에서 서울을 동경했다. 우리에게 제주는 떠나야할 고향이었다. 선배들이 그랬듯이 제주에 남는다는 건 패배자나 다름없었다. 서울에 가지 못하면 고교동창들과 함께 술주정뱅이가 된다는 말이 돌았다. 나는 연합고사에서 떨어졌다. 첫 관문부터 루저였다. 전문대에 들어갔는데 패배감이나 낙오자라는 마음보다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무서웠다. 학교를 그만 두고 군대에 가버렸다. 음악도, 문학도 시작도 못한 채. 

그 무렵 밴드 ‘언니네이발관’이 등장했다. 그들은 ‘싱 스트리트’였다. 어설펐지만 귀여웠다. 그래서 순수했고, 순수했기에 불꽃을 낼 수 있었다. 그들의 데뷔 음반 ‘비둘기는 하늘의 쥐’를 내무반 구석에 찌그러진 채 CD 플레이어로 들었다. 상병이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런 노래도 다 있냐? 병장이 내 볼을 꼬집었다. 투투 틀어라. 룰라 틀지. 그때 다시 꿈을 꿀 수 있었다. 제대를 하면 고향을 떠나 살 거야. 코너와 라피나 앞으로 밀려오던 거대한 파도 같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현택훈 
고등학생 때 비디오를 빌려보며 결석을 자주 했다.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 처음 쓴 소설 제목이 ‘중경삼림의 밤’이었다. 조조나 심야로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영화를 소재로 한 시를 몇 편 썼으나 영화 보는 것보다 흥미롭지 않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한때 좀비 영화에 빠져 지내다 지금은 새 삶을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낸 시집으로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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