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적 인간] ⑥ 변산(Sunset in My Hometown), 이준익, 2018.

qustks.jpg
▲ 영화 <변산>의 한 장면. 출처=네이버 영화.

영화 <변산>에서 시를 쓰던 문학소년은 래퍼가 되었다. 문학소년들이 모두 래퍼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시가 덜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래퍼라고 해서 모두 스타가 될 수는 없고, 무명 래퍼나 무명 시인이나 비슷한 처지일 테지만. 

마니아가 될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이긴 하지만 ‘노을 마니아’가 되듯 우리는 무언가 어떤 아름다움에 경도되어 평생 그것을 그리워한다. 그것이 음악이나 사물이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사람이라면 세월 보내기 좋은 대상이다. 이 세월이 ‘함부로 쏜 화살’(정지용의 시 <향수>)처럼 날아가기 때문에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그 대상에 대한 마니아가 되어 헤어나지 못한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영화 속에서 문학을 꿈꾸던 고등학생의 시 일부다. 교생 선생님이 이 학생의 시를 훔쳐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이것은 명백한 표절이지만 그 풍경에도 주인이 있을까 생각하면 고향 인심처럼 너그러워진다. 우리는 고향의 풍경을 훔쳐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원풍경은 평생 살아가게 하는 그리움의 미학이 된다. 나는 감귤 창고에 딸린 방에서 태어났다. 귤꽃, 푸른 귤, 노란 귤, 귤나무에 내린 눈을 보며 유년을 보냈다. 고향인 화북 부록마을 가운데로 아스팔트가 났지만 지금은 사라진 그 집과 감귤밭을 기억한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에서 윤동주가 1940년대를 그렇게 살아갔다면, 2000년대에 이르러 학수는 사회에 대한 반항 넘치는 래퍼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므로 학수는 우리 시대의 저항 시인인 셈이다. 

그리고 소설가의 꿈을 이루긴 했지만 여전히 지역에 머물며 소설을 쓰는 선미는 이제 뮤즈가 된 첫사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 문학소년이 쓴 시의 구절을 되뇌며.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현택훈
고등학생 때 비디오를 빌려보며 결석을 자주 했다.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 처음 쓴 소설 제목이 ‘중경삼림의 밤’이었다. 조조나 심야로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영화를 소재로 한 시를 몇 편 썼으나 영화 보는 것보다 흥미롭지 않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한때 좀비 영화에 빠져 지내다 지금은 새 삶을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낸 시집으로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가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