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06) 박혜영, 《느낌의 0도》, 돌베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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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영, 《느낌의 0도》, 돌베개, 2018. 출처=알라딘. ⓒ제주의소리

합리적 이성을 중시여기고 그것에 수반되는 효율성을 으뜸으로 간주하는 지금, 이곳에서 별안간 ‘느낌’을 강조하며 효율성의 사슬로부터 풀려날 것을 힘주어 말한다면,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들의 삶이 속도지상주의에 익숙하는 동안 우리는 압축성장의 길에 내몰렸고 잠시 심호흡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여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애초 목표를 달성할 뿐만 아니라 초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온힘을 쏟아붓곤 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노동을 수월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제공하였다. 지금껏 세계와 대면하고 있던 인간의 감각은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의 혜택 속에서 위험과 모험을 감내할 필요 없이 과학기술이 창안한 온갖 도구에게 인간의 노동을 떠넘기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노동 자체가 기술 도구에 몽땅 대체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와 직접 육체적 관계를 맺던 인간의 노동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고, 그 관계도 예전과 양상이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이와 관련하여, 영문학자 박혜영의 《느낌의 0도》는 이러한 삶의 현실에 놓여 있는 우리로 하여금 망실해가고 있는,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새 시나브로 소멸하고 있는 인간의 생태적 감각과 이것에 바탕을 두고 있는 생태적 상상력의 가치를 주목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박혜영은 8명의 삶의 실천에 초점을 맞춰 속도지상주의와 경제지상주의에 붙들린 현대문명의 현주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우리가 이 8인의 삶으로부터 어떠한 소중한 것을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에 자족하는 게 아니라 우리 각자가 이들 8인 다음 아홉 번째의 삶의 실천에 자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박혜영이 주목하는 8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레이첼 카슨, 미하엘 엔데, 슈마허, 웬델 베리, 마흐무드 다르위시, 존 버거, 아룬다티 로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 등이 그들이다. 박혜영은 그들의 서로 다른 삶의 밑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생태적 상상력을 발견한다. 《느낌의 0도》를 읽으면서, 이들 8인의 삶 속에서 생태적 상상력이 구체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의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박혜영은 8인 각자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이들의 삶이 저자인 박혜영 자신의 삶과 어떻게 자연스레 연결되는지를 진솔히 드러내고 있어 이를 접하는 독자에 대한 일방통행식 계몽주의적 태도를 벗어나고 있다. 사실, 저간 생태 문제와 관련한 저서들이 너무 과도할 정도로 생태적 상상력을 주목함으로써 평소 이러한 교양과 실천으로부터 먼 거리에 있던 일반인들에게 계몽주의 일변도로 접근하다보니 일반 독자의 일상과 괴리되었던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느낌의 0도》는 생태적 상상력이 우리의 일상과 얼마니 친밀한 것인지, 그동안 우리가 생태적 감각을 우리 스스로 소외시키고 있는 것에 대한 자기성찰의 길로 안내한다는 점에서 기계적 계몽주의와 분명 거리를 둔다. 또한 이번 기회에 이들 8인의 생태적 상상력이 지금, 이곳에서 어떠한 울림을 갖는지를 생각해봄으로써 생태적 상상력이 역사와 일상과 마주하는 구체적 장면을 만날 수 있다. 생태적 상상력이 환경보호론을 연상시키는 맥락으로만 협소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짧은 지면에서 8인 각자의 생태적 상상력을 상세히 얘기할 수는 없다. 그 중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지켜본 몇 대목을 소개해본다. 

우리들에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저서로 널리 알려진 슈마허를 박혜영은 ‘적정기술’ 또는 ‘중간기술’의 측면에서 그의 생태적 상상력을 주목한다. 박혜영이 특히 눈여겨본 것은 슈마허의 ‘적정기술 내지는 중간기술’이 “민중의 오래된 지혜가 담긴 각종 뛰어난 기술적 장치와 도구들을 발굴하고, 이 작은 기술을 통해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거대 기술, 거대 권력, 거대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들의 삶터에서 자급·자립을 이룩하도록 도왔다”(81쪽)는 점이다. 그러니까 슈마허는 “서구식 대량생산이 아니라 지역 고유의 자원을 이용한 지역적 생산양식을 지켜야 한다고 보았는데, 여기에 필요한 기술이 적정기술 내지는 중간기술이다.”(80쪽)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날이 갈수록 최첨단의 과학기술 발달에 매달리고, 그것은 슈마허의 비판대로 거대한 풍요를 낙관적으로 기약함으로써 인간은 기술의 노예로 전락하고, 노동의 품위는 실종된 채 보다 높은 임금과 포상을 얻고 싶은 욕망의 수레바퀴만을 굴릴 따름이다. 그래서 박혜영의 다음과 같은 노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곱씹을 만하다.

물론 우리는 지금까지 노동을 너무나 많이 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로렌스의 말대로 진정한 노동이 아니라 어딘가에 얽매인 노예 노동이었다. 이제 그런 노예 노동에 종지부를 찍고 진정한 의미의 노동, 즉 재미난 노동을 시작할 때 비로소 노동도 놀이처럼 즐거울 수 있다. 진짜 혁명은 노동시간을 줄여달라거나, 노동의 대가를 올려달라거나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신의 삶이 고귀한 예술품이 될 수 있도록 진짜 재미난 일을 시작하는 데 있다. 돈이 아닌 기쁨과 자유를 안겨주는 진짜 재미난 노동, 탈출한 당나귀들처럼 새장을 벗어난 새들처럼 자유롭게 춤을 추면서 텅 빈 이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노동, 예술 활동과 다름없는 그런 좋은 노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D.H. 로렌스가 노래한 ‘제대로 된 혁명’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87-88쪽)

“예술 활동과 다름없는 그런 좋은 노동”을 하는 것이야말로 달리 말해 슈마허의 ‘적정기술’ 또는 ‘중간기술’이 지닌 생태적 상상력의 핵심이다. 소비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슈마허의 이 같은 생태적 상상력은 노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가다듬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힘들게 해야 하고, 따라서 노동은 재미있기는커녕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며, 이것을 보상받기 위해 보다 높은 임금을 받아야 하고, 사용주는 이러한 노동자와 갈등의 관계를 낳고……. ‘노동 해방’의 가치가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근원적으로 숙고하도록 한다. 

흔히들 생태적 상상력과 인간의 노동을 서로 배타적 관계로 설정하는데, 이것은 이 둘의 관계를 아주 협소하게 파악하는 셈이다. 슈마허를 통해 인간의 노동이 자연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지속적으로 성찰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생태적 상상력은 인간의 사회와 무관한 자연에서의 원시적 삶을 그리워하는 현대의 삶과 고립된 그러한 반문명적 삶을 추구하는 게 결코 아니다. 존 버거의 삶으로부터 박혜영이 묘파하고 있듯, “자연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우리의 감각을 연마시켜주기에 정치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장소에 살면서도 가장 명징한 눈으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155쪽) 정치감각을 벼리게 한다. 말하자면, 생태적 상상력은 정치적 상상력과 긴밀히 연동된다. 그것은 아룬다티 로이에게서 발견한바, “‘나’라는 한 작은 존재가 얼마나 무수히 많은 다른 존재들과 함께 하고 있는지, 그 작은 저마다의 운명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여전히 우리 존재의 의미는 얼마나 불확실한지, 또 존재들 간의 연결 고리는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감탄한 적이 있을 것이다”(179쪽)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는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의 관계와 그 깊이를 자연에서 응시하는 힘이 절로 길러지는 것을, 현실의 구체적 삶과 유리된 신비주의로 치부할 게 아니라 도리어 현실을 보다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성찰적 태도로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정치적 상상력과 밀접히 연동된 생태적 상상력의 요체를 이해했을 때 우리는 팔레스타인 시인 다르위시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그의 고향을 복원하고자 하는 시적 구원의 진실에 닿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가공할 만한 폭탄에 유린되고 견고한 장벽에 감금된 조국 팔레스타인을 되찾아 예전의 고향을 복원하고자 하는 다르위시의 삶과 시에는 생태적 상상력이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느낌의 0도》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부제목이 함의한 ‘다른 날을 여는 아홉 개의 상상력’이 펼쳐지길 간절히 소망해본다. 

마지막 아홉 번 째의 상상력,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상상력이자 이 책을 읽고 감각이 새롭게 일깨워질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지점, 존재들이 무감각에서 깨어나 점차 눈을 뜨는 해빙의 온도인 0도에 주의를 기울인 것도 그 때문이다. 감각이 깨어나면 비로소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도 보게 되고, 인간이란 자연 없이는 살 수 없음도 느끼게 된다.(8쪽)

▷ 고명철 교수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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