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주 칼럼] 《벤야멘타 하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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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벤야멘타 하인학교》. 출처=알라딘.

‘열심히만 했다고 잘 되지 않는 시대’의 자녀 교육

엄마들과 문학 수업을 스무 번 정도 진행하면서 깊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엄마들과 꾸준히 대화를 해왔지만 이렇게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 ‘문학’은 마법의 양탄자처럼 저를 ‘사람의 마음속’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도대체 문학이 무엇이 길래 대화가 달라졌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높은 수준의 대화를 하고 싶었고, 그래서 깊이 문학 작품을 읽고 토론을 했던 것입니다.  

엄마의 뜻대로 달려가다가 갑자기 멈춰서버린 아이, 잘 다니던 교회를 그만 다니겠다는 아이, 엄마와 평행선을 긋는 아이, 부모를 속이는 아이, 눈치 보는 아이, 스마트폰에 빠져 사는 아이. 오늘도 부모님들은 아이와 힘겨운 줄다리기를 합니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제대로 진전하지 못해 답답합니다. 

부모님들은 늘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계속 엇갈립니다. 부모님들의 부모님들도 그랬던 걸까요? 그때는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도 성장하니까요. 부모님들도 예전의 부모님들과 같지 않고, 아이들도 예전의 아이들과 같지 않습니다. 아이와의 관계에서 그 어느 것 하나도 나아가지 못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부모님들은 어릴 적에 보고 배웠던 부모님이 쓰셨던 방법을 자신의 아이에게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던 대로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요? 그건 더 위험한 일입니다. 세상의 변화가 그곳만 피해갔다는 뜻이니까요. 

경기도에 살 때는 입시설명회를 빼놓지 않고 열심히 다녔던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남편의 직장 문제로 제주의 시외 지역에서 살게 되었기에 경기도에 있을 때처럼 학원차가 다니기를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문학 수업을 진행하면서 저는 그 분의 가족이 성장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마음만 먹으면 아이에게 과외도 시킬 수 있었고 정보력을 이용해 경기도에 있을 때처럼 발품을 팔아서 좋은 교육 서비스를 구매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고, 문학으로 아이의 감정에 다가갔기 때문입니다. 

문학, 상식의 언어에서 성찰의 언어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왜 그것을 해야만 하는지, 그걸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이 모든 사념 없는 복종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복종한다. 우리가 그 일들을 해내야만 한다는 사실이 과연 합당하고, 정당한가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수행한다. 
- 《벤야멘타 하인학교》중에서
엄마들과 함께 읽었던 문학작품 중에서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귀족 출신의 야콥이라는 소년이 자신의 모든 신분을 버리고, 가족까지도 버리고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스위스 소설작품입니다. 스위스 국민작가 로베르트 발저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소총 같은 펜 하나만 들고 용감히 뛰어들었고,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기차를 멈추기 위해 브레이크를 잡아당기는 작가입니다. 사춘기 아이들의 정서와 매우 잘 맞기에 청소년을 키우는 부모님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소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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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들과 열권의 문학고전을 깊이 읽고 자녀 키우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도 많이 성장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공=오승주. ⓒ제주의소리

교회를 안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모범생 엄마’는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읽고 한 발자국 물러났습니다. 교회에 가기 싫다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아이는 교회의 프로그램이 재미없고 지루해서 차라리 쉬는 게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를 가지 않으면 믿음을 버리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엄마는 교회를 쉬게 했습니다. 강제로 교회를 가게 하면 거꾸로 믿음이 파괴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그런 식으로 하나씩 내려놓았습니다. 

그 사이에 경기도 시절 함께 열심히 입시설명회를 다녔던 엄마들은 아이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답안지를 베끼는 아이의 습관을 잡기 위해서 답안지를 장바구니에 넣자 아이는 스마트폰 검색으로 답안지를 찾아냈습니다. 스마트폰을 없애자 아이는 친구 휴대폰을 빌려서 답지를 기어코 찾아냈습니다. 엄마가 통제하고 제한할수록 아이는 사력을 다해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방법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했죠. 

인생은 결국 시간입니다. 우리는 허락된 시간만큼만 숨 쉴 수 있죠. 일분 일분이 소중한 시간을 누구와 어떤 대화로 채우고 계신가요? 혹시 자녀와의 다툼이나 잔소리로 소중한 시간을 수놓고 있지는 않은가요? 잔소리를 해도 시간은 가고 사랑을 해도 시간은 가지만 함께 했던 시간 동안 나눴던 대화의 성격이 자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부모의 모습일 것입니다.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200쪽 남짓의 길지 않은 소설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가슴속에 스며들면 2,000쪽 이상의 힘으로 커집니다. 가슴속에 2,000쪽 이야기가 활활 타오른다면 그만큼 생활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이번 추석 때는 “요즘 어떤 소설책 읽어요?”라는 인사로 대화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  필자 오승주는?

1978년 제주 성산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10여 년간 서울 강남에서 입시컨설팅, 논구술 특강 등의 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입시구조와 사교육 시스템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후 언론운동과 시민정치운동, 출판문화운동, 도서관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변화의 힘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끈이 이어지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소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직전, 아이의 간절한 외침 소리를 들었기 때문. 

2013년 《책 놀이 책》을 써 아이와 부모를 놀이로 이어 주었고, 3년간의 공부방 운영 경험과 두 아들과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썼다. 아빠 육아, 인문고전으로 아이 깊이 읽기로 가족 소통을 꾀했다. 

현재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사마천의 사기》를 집필 중이며 아주머니와 청소년을 작가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글쓰기·책쓰기 강사로서 지역 도서관과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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