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86) 가지나무에 목 걸려 죽고, 접싯물에 빠져 죽는다

* 가지낭 : 가지나무, 말은 나무이나 채소류(나물)에 속함.
* 걸령 : 걸려(서)
* 젭싯물 : 접싯물, 접시의 물
* 빠졍 : 빠져(서)

얕은 내도 짚어 보고 건너고,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 했다. 진리는 멀리서 찾을 게 아니다. 바로 눈앞, 익숙한 곳에 있다. 한쪽 귀로 흘려들을 말이 아니다. 얕은 내도 깊은 데가 있어 쉽게 여겼다 낭패당할 수 있고, 돌다리라고 허술하지 말란 법이 있을까. 다짜고짜 건너다 크게 잘못될 수가 있는 법이다.

‘가지나무’는 말은 나무라 하지만, 실은 나물 종류에 속하는 연약한 식물이다. 그런 채소류를 먹다가 목에 걸려 죽는 수가 있고, 접시에 담긴 물에도 빠져서 죽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 하찮게, 만만하게 여겨 업신여기다 뜻밖에 큰코다칠 수 있는 것이다. 화(禍)는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 가벼이 여기다 자초할 수 있는 게 화다. 화근(禍根)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 함이다. 가지나무와 접싯물이 큰 화를 부를 줄을 모르는 게 문제다.

‘가지나무에 목 걸려’라든지, ‘젭싯물에 빠져’는 상상을 초월한 놀라운 수사(修辭)다. 언어가 밋밋한 평원의 풀밭이 아니라, 성난 물결이 둘둘 밀려오는 거친 바다의 너울처럼 잠자는 우리의 의식을 흔들어 깨운다. 참 극적인 표현이다.
  
세상사는 이치에 통달한 어느 도인의 목소리로 들린다. 상대가 제아무리 약하다고 하나 얕보지 말 것을 단단히 경고한다. 신중해서 나쁠 게 없다.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상대를 우습게보았다가 최악의 사태를 불러들이는 일이 의외로 많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삭막한 요즘 세상임에랴.

유사한 목소리 셋이, 다퉈 가며 뒤를 따른다. 셋 모두 별스러운 맛깔로 우리의 귀를 홀리니, 새삼 우리 제주 선인들의 표현력 한없이 끌려든다. 까딱하다 ‘가지나무에 목 걸리곡, 젭싯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 명심할 일이다.

‘나무랜 낭에 눈 걸린다’ 
(나무란 나무에 눈 걸린다)
옛날에는 일반적으로 나무의 쓸모를 재목감이냐 아니냐에 두었다. 따라서 곧고 굵고 길게 자란 아름드리나무를 재목으로 선호했다. 나머지는 잡목 취급해 땔감으로 쓰였다. 문제가 있다.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나무에 당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길쭉이 자라나지 못한 나무일수록 곁가지가 거칠게 돋아나 있어, 잘못 헤치고 지나다가 그만 그 가시에 눈이 찔려 실명의 위기를 당하게 되는 수가 있다. 

사람 또한 그처럼 만만하다고 우습게보던 사람에게 된통 당하는 수가 왜 없으랴. 이를 유념하라는 경계의 말이다. 다 그만그만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이다. 누구를 특히 얕잡아 보는 것은 그렇게 보는 사람에의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절대적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상대방을 무시하는 일이 있어선 안된다. 대인관계에 조신하는 것도 생활의 지혜에 속하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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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나무에 목 걸려 죽고, 접싯물에 빠져 죽는다. 9월 25일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본인의 치적을 자랑하자 청중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본인도 함께 웃는 모습이다. 부동산 사업가, TV쇼 진행자 등 한때 트럼프를 무시하거나 우습게 본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다. 특히 남한과 북한에게는 더더욱 분명하다. [편집자] 출처=sbs 유튜브.

‘모물축에 야게 건다’ 
(모물죽에 목 걸린다)
참 듣기에 참 가소롭기 짝이 없는 말이다. 그렇잖은가. 메밀죽은 입맛이 없어 곡기를 멀리하는 환자에게 걸맞은 음식으로 부드럽고 매끄럽다. 숟가락으로 떠 입안에서 한두 번 오물거리다 삼키면 목구멍을 타고 잘도 내려간다. 그러나 그렇게 술술 잘 내려가는 음식도 너무 쉽게 여겼다가는 목에 걸려 곤혹을 치를 수 있으니,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함이다.

인간관계에서 상대를 쉽게 보아 홀대했다 좋지 않은 영향이 돌아올 수 있다는 행간의 숨은 뜻을 헤아릴 일이다.

나는 마흔 문턱에서 세브란스병원에서 위 수술을 받은 병력을 가진 사람이다. 수술 받고 누워 있는데, 아침에 병상을 순회하던 외과의사가 한 말이 서른일곱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질 않는다.

“선생님, 앞으로는 우유도 씹어서 삼키세요. ㅎㅎ.” 우유를 앞에 놓으면 떠오르는 말이다. 그 뒤, 내 위장은 튼튼해졌다.

‘우미지에 발 빈다’ 
(우미지에 발 벤다)
‘우미지’란 바다 밑 돌에 붙어 자라는 우뭇가사리의 줄기다.

바다 속의 돌에 붙어사는 우뭇가사리는 아주 부드러운 해조류(海藻類)에 속한다. 그럼에도 까딱 잘못하면 그 부드러운 줄기에 그만 발을 베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생각이나 했겠는가. 미끄럽고 보드레한 것이라 마무 짓밟고 다니다가 생각지도 않게 발을 베어 상처를 입었다니. 이런 한심할 데가 있을까.
약하다고 깔보았더니 외려 당하는 수가 있음을 일깨우는 말이다.

가지나무, 나무랜 낭, 모물축, 우미지들. 모두 연약하거나 보잘것없고 매끄럽고 부드러운 것들이다. 그것들을 사람의 일에 결부시킨 착상이 절묘해 혀를 차게 한다. 제아무리 약하고 하잘것없어도 만만하게 여겼다가는 결국 자신이 어려움을 겪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사물을 바꿔 가며 표현을 달리한 말솜씨에 언어를 교묘히 주물렀던 선인들의 기지가 넘쳐나고 있으니.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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