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87) 소도 황 하면 돌아선다

* 쉐 : 소
* 황허밈 : 황 하고 소리 지르면

가축은 오래전부터 사람에 의해 순치된 동물이다. 그래서 집에 기르며 일을 돕고 함께하므로 가축이라 하는 것이다. 한두 마리 혹은 여러 마리를 몰고 다니면서 말을 잘 듣도록 훈련시키면 고분고분 잘 따른다. 그러니 소도 끌고 가다 외딴 곳으로 가려 할 때면, “황!” 하고 소리치면 굼뜬 소도 알아들어 주인이 잡아끄는 데로 확 방향을 바꾼다. 부드럽게 하다 따르지 않으면 버럭 고함을 치기도 한다. 물론 회초리를 들이대기도 하나, 그냥 부드럽게 타이르듯 해도 대개 첫 마디에 잘 따른다. 

소는 원래 순하고 우직한 짐승이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소도 말귀를 알아 돌아서는데 사람이 되고서 소만 못해서야 쓰겠느냐 함이다.

하지만 아무리 다그쳐도 돌아서지 않는 사람이 있다. 제 고집대로 가는 것이다. 심하면 ‘개야 짖어라’는 듯 아예 말을 귀에 넣지 않는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고집불통에다 심술을 부리는 얄궂은 사람도 적지 않은 세상이다.

억지가 심하고 제 생각만 가지고 우기는 고집 센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옹고집(壅固執)’이라 한다.

옹고집은 고대소설 <옹고집전>의 주인공에서 유래했다. 소설 속의 옹고집은 고집이 세고 심술 사나운데다 불효막심하다. 어느 날 어떤 도사가 보다 못해 옹고집을 혼내 주려고 짚으로 가짜 옹고집을 만들어 보냈다. 가짜 옹고집이 어찌나 진짜 옹고집처럼 구는지 나중엔 진짜 옹고집이 가짜에게 몰린 나머지 쫓겨 나가게 됐다. 박힌 돌이 굴러온 돌에게 뽑힌 격이다. 옹고집은 거지꼴로 다니며 갖은 고생을 하다 끝내는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그러자 도사가 나타나 그를 용서해 줌으로써 제 집에 돌아가 살게 됐다는 얘기다.

옹고집은 이름부터 그렇다.

‘옹(壅)’은 콕 막혔다는 뜻
‘고(固)’는 단단하다, 한결같다는 뜻
‘집(執)’은 꽉 쥐다, 잡다, 지키다는 뜻.
그야말로 꽉 막힌 고집쟁이라는 의미다.

아둔하면서 황소고집이 세어 외곬통인 사람을 일컫는 말로 옹고집과 어름버금인 ‘벽창호’가 있다. 벽창호는 벽창우가 변한 말. 뒤에 붙은 ‘우(牛)’는 ‘소’라는 뜻이고, 앞의 ‘벽창’은 평안북도 ‘벽동’과 ‘창성’에서 앞 글자만 딴 것. 벽동과 창성에서 나는 소가 억세고 무뚝뚝해서 말을 잘 안 들었기 때문에 고집불통이란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그곳 소는 주인이 잘 먹이면서 “황” 해도 돌아서 않았던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벽창호란 말이 그 소에서 나왔겠는가.

▲ 소도 황 하면 돌아선다. '욱일기' 논란을 일으킨 일본 자위대 함정이 결국 제주 국제관함식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짐승인 소도 고함치면 말을 듣는데, 침략 전쟁의 상징인 욱일기를 고집하는 일본의 속내가 궁금하다. [편집자] 출처=오마이뉴스

옹고집에 벽창호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고대소설 <흥부전>에 등장하는 악역 놀부다.

놀부는 부모 유산을 독차지하고 동생 흥부의 가족을 알몸으로 길 밖에 내쫓은 후, 구걸하러 온 동생을 매질해 내보낸 악덕 중의 악덕이다. 제비가 물어다 준 박 씨를 심어 부자가 된 흥부에게 그 내력을 듣고는, 처마에 있던 새끼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려 고쳐 주었지만, 종국에는 모두 잃고 온갖 곤욕에 창피를 당한다. 

놀부야말로 사악한 심성을 가진 인물로, 욕심 많고 심술궂은 인물의 전형(典型)이다.
  
항간에서 주고받은 말이 있다.

“아이고, 그 사름 말이라? 그 사름 보아 봐. 욕심이 더덕더덕 허영 잡아도 피 혼 방울 안 날 사름이라. 그쯤 알앙 상종허여.” 
(아이고, 그 사람 말인가? 그 사람 보아 봐. 욕심이 닥지닥지 해 잡아도 피 한 방울 안 날 사람이네. 그쯤 알고 상종하라고.)
놀부는 근본적으로 놀고먹기 좋아하고 시기‧질투가 어마무지한데다 탐욕스러운가 하면 괜히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 일쑤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오장육부가 있는데, 놀부는 ‘심술보’라는 장기가 하나 더 달려 오장이 ‘칠부’라 할 지경이다. 하나 더 달린 장기가 어찌나 컸던지 담배 쌈지만하다고 묘사했다.

<흥부전>에 나와 있는 놀부의 심술을 볼작시면, 줄여 몇 가지만 열거하거니와 대저 이러하다.

- 수절 과부 욕보이기, 여승 보면 겁탈하기
- 장에 가면 억매 흥정
- 장미논에다 물길 막고
- 우물 밑에 똥 누기
- 갓난아기 똥 먹이지
- 빚값에 계집 뺏기
- 초상 난 데 춤추기
- 불난 집에 부채질하기
- 무죄한 놈 뺨치기
- 아이 밴 계집 배 차기
- 우는 아이 볼기 치기
사회생활에서 놀부 같은 불통은 안된다. 그것은 악덕이다. 인간관계에서 소통과 화합처럼 중요한 게 없다. 옳은 일, 바른 길일 때는 주위 말에도 의당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옹고집으로 일관해서는 외톨이 신세를 면치 못하게 마련이다. 

‘쉐도 황 허민 돌아선다.’ 새겨들어야 할 소중한 교훈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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