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10) 사무엘 베케트, 《몰로이》, 김현 옮김, 문학동네,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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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 베케트, 《몰로이》, 김현 옮김, 문학동네, 1995. 출처=알라딘.

1. 가을은 독서의 계절?

바야흐로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 가을이다. ‘독서의 계절’이란 말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누군가 1925년 조선통감부 계몽어록에 등장한 말이라고 한다. 물론 출처가 없으니 믿거나 말거나다. 제국주의 공무원의 머리에서 나온 말이건, 책 한 권이라도 더 팔아보려는 출판사 사장이 한 말이건, 일단 책을 읽자는 말이니 좋은 말로 들린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면 다른 계절은 독서를 안 해도 되는 계절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그 말을 만들어낸 사람은 책 읽는 고통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모든 계절에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좀 심한 말이므로 가을에만 읽자고 제안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계몽해야 한다는 거만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긴 하나 염치가 전혀 없지는 않은 사람일 터이다. 푸른 하늘과 단풍, 선선한 바람, 낙엽 태우는 냄새 등만 생각해도 가을은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 되는 계절이다. 특히 요즘같이 미세먼지가 없는 날씨에는 밖에 나가 하늘을 보며 걷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이런 계절을 독서로 보내라는 것은 인생을 허비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이러저러하게 시간을 보내라고 하는 것은 각자의 삶을 영위할 자유를 침해하는 폭력이다. 책을 읽으라는 것은 그런 폭력의 예외가 될 수 있을까?

며칠 전 하루의 강의를 마친 필자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피곤한 몸을 실었다. 마침 내리는 문 쪽의 자리가 비어 최대한 몸을 빨리 놀려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게임을 시작했다. 게임을 시작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누군가 게임을 하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꽤 점잖고 교양 있게 들리는 중년 신사의 목소리였다. “요즘은 디지털 시대라서 게임을 하는 것이 일상이지요? 나는 아날로그 시대 사람이라 게임을 잘 몰라요.” 나는 그것이 내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어린애들처럼 게임하는 것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슬그머니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대화를 듣자니 다행스럽게도 그 말은 내게 한 말이 아니라 내 뒤에 앉은 20대 초반의 여성에게 그 옆에 앉은 초로의 남성이 하는 말이었다. 여성은 그의 말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몰라 그저 수줍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 남성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 보았는지 물었다. 여성은 안 읽었다고 했다. 그 남성은 온화한 목소리로 그 책이 읽어볼 만한 매우 중요한 책이며,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왜 그리 중요한 책인지가 궁금해 진 나는 그 이유를 듣기 위해 두 사람의 대화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렇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그 신사는 그 책이 왜 그리 중요한지 끝내 설명하지 않고 그저 중요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내릴 때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뒷좌석의 두 사람을 힐끗 훔쳐보았다. 아가씨는 울상으로 웃고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왠지 내 귀에 살려달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2. 읽기라는 무의미한 행위의 의미

학생들과 독서모임을 이어온 지도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간다.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정해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그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혼자서는 잘 읽지 않을 만한 책을 우선적으로 선정해서 읽다보니 꽤 다양한 독서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혼자서 뿐 아니라 같이 읽자고 해도 결국 안 읽게 되는 책이었다. 나는 명색이 선생인지라 할 수 없이 다 읽었다. 독서모임에 나온 학생들 가운데 가장 많이 읽고 온 학생이 책의 절반 정도를 읽었다. 이 악명 높은 책의 제목은 《몰로이》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부조리극으로 유명한 베케트가 저자이다. 이 책에 비하면 사데크 헤다야트의 환상소설 《눈먼 올빼미》는 매우 짜임새 있는 줄거리를 가진 소설로 여겨질 지경이다.

《몰로이》의 내용을 소개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책은 몰로이라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주인공이 말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 주인공 스스로도 자신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난 쥐뿔도 아는 게 없다. 예를 들면, 어머니의 죽음. 내가 왔을 때 죽어 있었던가? 아니면 훨씬 뒤에야 죽었던가? 죽었다는 것은 매장한 것을 말한다. 모르겠다. 아마 아직 매장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 《몰로이》 8쪽
한 사람의 삶에서 어머니의 죽음만큼이나 충격적이고 중대한 일이 어디 있겠냐만 주인공은 자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도 확실히 아는 게 없다. 그 이후의 독백은 주의 깊게 들을 필요도 없다. 그는 이어서 “모든 게 흐릿해진다. 조금만 더 흐려지면 장님이 될 것 같다. 머릿속이 말이다. 머리가 움직이지 않는다”(9쪽)이라고 말한다. 이제부터 독자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 채 머리가 움직이지 않는 주인공의 무의미한 독백을 130쪽 가까이 읽어내야 한다. 그러면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된다. 2부는 모랑이라는 수사관이 몰로이 사건을 담당하여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나 이러 저리 돌아다니는 여정을 그린다. 어떤 줄거리를 기대한 독자는 2부의 몇 줄을 읽자마자 그 기대가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몰로이가 실존하는 인물인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모랑의 독백은 몰로이의 독백과 마찬가지로 종잡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고통 그 자체이다. 독서모임을 권유한 나에게 똑똑한 한 학생이 보냈던 메일이 생각난다. 언론사에 입사하거나 로스쿨에 진학할 것을 고민했던 그 졸업반 학생은 소설을 읽는 독서모임은 자신에게는 ‘사치’로 여겨진다는 것이었다. 사치라는 것이 자원을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면 《몰로이》를 읽는 것은 문자 그대로 사치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으며 가을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나는 이 체류를 이용해서 빨기 위한 돌들을 장만했다. 그것들은 조약돌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돌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이번에는, 아주 많이 장만했다.  나는 공평하게 네 주머니에 그것들을 나누어 넣었다. 그리고 번갈아가며 그것들을 빨았다. 이것은 하나의 문제를 제기했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우선 그것을 해결했다. 열여섯 개의 돌이 있다고 해두자. 그러면 그것을 네 개의 주머니에 네 개씩 넣었다. 바지 주머니가 두 개였고, 외투 주머니가 두 개였다. 우선, 외투 오른편 주머니에서 돌을 하나 꺼내 입에 넣는다.......<중략>......몇 세기 동안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돌을 매번 빤다. 혹은 매번 같은 것을 빤다는 것이 내게 완전히 똑같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돌들은 전부 다 똑같은 맛이었기 때문이다.”
- 《몰로이》 100~109쪽
몰로이는 바닷가에 가서(갔는지 그냥 상상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조약돌을 줍는다. 그리고 그것을 주머니에 나누어 넣은 다음 돌아가면서 입에 넣고 빤다. 어떻게 하면 겹치지 않고 돌아가면서 빨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그는 돌을 이 주머니에서 저 주머니로 옮겨 담고 빠는 행위를 반복한다. 독자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지 못한 채 그 무의미한 행위에 대한 서술을 10쪽 이상 읽어내야 한다. 

독서모임에 대한 권유는 독서가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행위라는 암묵적인 강요를 포함한다. 그 강요에 못 이겨 모임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강변하기 위해 나는 베케트의 이 무의미한 책은 독서 행위의 무용함을 성찰하게 하여 우리의 삶이 무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실존주의 문학의 백미라고 뻥을 쳤다. 그런 다음 마음이 불안해진 나는 역자인 김현의 해설을 훔쳐보았다. 과연 김현답게 《몰로이》에서 ‘요나 컴플렉스’(바슐라르가 어머니의 편안한 자궁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붙인 명칭이라고 한다)를 읽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책의 주제가 아님을 김현은 곧바로 현명하게 지적한다. 김현은 다음과 같이 해설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목적이 없고 수단만 남아 있는 세계, 왜 가는지, 왜 오는지도 모르고, 추측만으로 오고가는 그런 세계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띨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베케트만이 알 것이다.” 
- 《몰로이》 272쪽
내게 와 닿은 구절은 “베케트만이 알 것이다”였다. 결국 역자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베케트는 왜 이런 무의미한 문장들을 썼을까? 나는 왜 고통을 감내하며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낸 것일까? 버스에서 게임으로 시간을 낭비하던 타인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를 권유했던 노신사는 위대한 노벨상 수상작가의 이 책을 권유할 수 있을까? 독서는 인생의 낭비이며 사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돌아온 독서의 계절에 사치를 누려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낭비를 통해 절약의 의미를 알 수 있듯이, 무의미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은 의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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