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을 돈으로 살수 있다?

로맹 롤랑(1866-1944)은 소설가이며 극작가다.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 작가중 한사람이었다. 대표작 ‘장 크리스토프’와 ‘싸움을 넘어서’로 1915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재판은 돈에 따라 백(白)을 흑(黑)이라 말할수도 있고 흑을 백이라 말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다”는 말은 그가 남긴 명언이다.

그러나 로맹 롤랑은 “비록 재판은 돈으로 살수 있을 지언정, 진실은 돈으로 살수 없다”고 법의 정의에 대한 믿음은 저버리지 않았다. 사법 시스템과 관련하여 때때로 우리 사회를 관류(貫流)했던 ‘유전무죄(有錢無罪) 또는 무전유죄(無錢有罪)’의 부끄러운 사법불신 한계상황도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을 터이다. ‘권력자는 무죄이고 빽(?)없는 백성은 유죄’라는 이른바 유권무죄(有權無罪)나 무권유죄(無權有罪)도 뿌리깊은 법조 불신에서 비롯된 ‘안티테제’나 다름없다.

만약에 법의 정의와 법관의 양심이 이처럼 돈에 의해 거래되고 권력이나 정치적 고려에 의해 유린되거나 법관의 유쾌하지 못한 개인적 감정에 의해 요리된다면 이는 여간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사회는 허약해진다. 비틀거리게 마련이다. 그 나라 역시 정상적일 수가 없다.

불신받는 법의 정의와 양심

법에 대한 믿음은 법관에 대한 신뢰에서 싹튼다. 법관에의 신뢰는 사회적 안전망이다. 그것은 바로 법의 정의와 법관의 양심이다.

법의 정의가 날줄이 되고 법관의 양심이 씨줄이 되어 짜올린 사회적 안전망이 튼실해야 불의와 악이 제대로 걸러진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수 있다. 그래야 안정된 사회를 기대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제주의 사회적 안전망은 어떠한가. 튼실하고 건강한가. 정의와 양심의 그물코는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가. 애석하게도 오 케이(OK)사인을 보내는 이는 많지 않다. 오히려 “쿡쿡”거리는 비아냥만 번지고 있다. 되레 법조 불신만 새끼치고 있다.

‘6·13 지방선거’와 관련하여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전·현직 지사에 대한 지난 7월4일 제주지법 1심 판결에 대한 도민의 법 감정이 그렇다.
“현직은 작량감경(酌量減輕)이라는 덧옷을 입혀 솜방망이로 형(刑)을 경감하고 전직은 괴씸죄(?)로 발가벗겨 쇠방망이를 들이 댄 것이 아니냐”는 형평성 논란도 여기서 비롯된다.

물론 재판업무는 전적으로 판사의 판단의 문제다. 그러나 양형(量刑)이 국민의 법 감정과 현격하게 동떨어지거나 검사와 판사의 형량이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면 그것은 법이나 재판불신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안주감으로 전락한 법률용어

전·현직 지사 관련 선거법 위반 혐의 1심 판결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오죽해야 참여환경연대·제주여민회등 도내 7개 시민단체가 “상식 밖의 판결”이라고 들고 일어났는가. 오죽해야 법원앞에서 판결에 항의하는 ‘릴레이 시위’까지 벌였었는가.

휴가차 내려와 만났던 현직 판사도 이와 관련한 양형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재판 결과가 시정(市井) 술자리 안주감으로 희화화(戱畵化)되는데 심각성이 있다. 형량을 덜어주기 위해 동원 됐던 작량감경(酌量減輕) 때문이다.

국어대사전에는 “법관이 범죄의 가엾은 정상을 작량하여 그 형(刑)을 경감하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세상에, 그렇다면 법관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가슴을 찡하게 울린 가엾고 애달픈 사연은 무엇인까.

남을 깔아뭉게는 ‘허위사실 공표’가 가엾은 정상인가. 자기당선을 위한 유사기관 설치나 사전 선거운동 또는 기부행위가 참작해야할 애달픈 정상인가.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풀이되는 ‘작량 감경’은 시니컬 하다. 작량(酌量)의 작(酌)은 한자 뜻으로는 술이다. 주고받는 술잔을 의미한다.

그래서 “작량감경은 얻어 마시는 술의 양에 따라, 또는 주고받는 술잔의 질이나 양에 따라 형을 경감해주는 것이냐”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이다. 술잔을 반씩 따르며 “작량 감경 하자”는 부끄럽고 웃기는 술자리 수작까지 나돌고 있다.

로맹 롤랑의 말처럼 재판이 돈에 휘둘리거나 술에 취해버린다면 그것은 이미 재판이 아니다. 개판일 뿐이다.
최근의 ‘사법개혁 진통’도 ‘불신받는 개판’이 아닌 ‘정의로운 재판’으로 국가의 안전망을 튼실하게 세우자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달넘은 전·현직 지사 선거법 위반 1심재판을 재삼 떠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2003년 7월4일의 그 재판은 ‘정의로운 재판’이었는가. 아니면 ‘불의한 개판’이었는가.

이 글은 '제주타임스'에도 실렸습니다.
<김덕남의 대기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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