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90) 동촌 까마귀 사납다
 
* 가마귀 : 까마귀
* 몹쓴다 : 독하다, 사납다

동촌이라 함은 지금의 통합행정시로 되기 전, 그러니까 성안에서 동쪽 마을을 일컫는다. 구체적으로 조천읍 혹은 구좌읍 지역, 그 중에도 특히 구좌읍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고 이 지역 까마귀가 유별나게 사납다는 게 아니다. 바람 센 날 까마귀는 사나워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는 까마귀가 독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의 성향을 우회적으로 나타냄이다. 

그럴 충분한 배경이 있다. 구좌읍 지역은 토지가 척박해서 농토에 의존해 살 수밖에 없던 옛날에는 어려움을 면하기 매우 어려웠다. 밭농사만으로 생계를 꾸리기가 힘들었으므로 물때만 되면 바다에 들어 물질을 해야 했다. 밭일 하랴, 물질하랴. 삼백예순날 쉬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살다 보니 지역주민들이 자연히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같은 노력을 함에도 실제 거둬들이는 소득이 큰 차이가 났다. 보리쌀만 하더라도 동촌과 서촌이 달랐다. 서촌 것은 통통하게 여물어 마치 쌀알 같았는데, 동촌 것은 배싹 몰라 주갈주갈(비쩍 말라 쪼글쪼글) 했다.    

나도 동촌 구좌읍 출생이라 어릴 적에 그런 보리밥을 먹으며 자랐다. 먹고 입고 아이들 교육시키고 나라에 세금 내고.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내야 했으니 다른 지역 사람들 눈에 ‘사납게’ 보였을 것이 아닌가.

더욱이 구좌읍 김녕 주민들의 생활상은 지금도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돼 있다. 학생 때 겨울방학이 돼 집으로 가는 길에서 보았던 그곳 풍경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여인들이 눈이 펄펄 내리고 삭풍 몰아치는 겨울날 바닷가에서 파도에 밀려온 둠북과 감태 등을 거둬 올리는 모습, 그것도 벌겋게 허벅지를 드러내고서 말이다. 여인들이 우마차를 끌고 다니는 것도 김녕 마을에서만 볼 수 있던 풍경이었지 않을까. 나중에 어른이 돼서 들은 얘기지만, 그곳 남자들이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라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비웠던 것이다. 그래서 김녕리 땅값이 엄청나게 비쌌다. 농토 단위면적가가 전국에서 제일 높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억척스레 살았으니 땅값이 오를 만도했겠다.
  
월정리도 인접 마을이다. 주민들의 생활력이 김녕에 못지않다. 주민들도 지역성이 매우 강하다. 부지런은 하늘이 돕는다고 오늘의 월정리 해안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고 발돋움했다. 땅값이 평당 1000만원, 상가 분양가가 2000만원 한 지 오랜 얘기다. 이쯤 됐으니 이제는 ‘동촌 가마귀 몹쓴다’라 한 속담도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 사람 팔자란 게 새옹지마다.

‘동촌 가마귄 눈도 벌겅 코도 벌겅’(동촌 까마귀는 누도 벌겋고 코도 벌겋다)이라 했다.

‘눈도 벌겅 코도 벌겅’이라 한 표현은 실제 삶의 현장에서 부대끼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 모진 바람 눈발 속에서 밭일하고 물에 들던 동촌 지역 사람들의 고군분투하는 생생한 모습이 아닌가. 자연 환경에 맞서서 일하던 의욕으로 충만함이 눈으로 보는 듯하다.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으니 눈도 코도 벌겋게 될 수밖에 있으랴. 그야말로 역동적인 장면이다. 그러고 보니 자립‧독립정신, 강인한 자생력이야말로 제주사람들의 DNA임이 분명하다.

RC00002069.jpg
▲ 1974년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 해녀들이 물일 작업을 위해 기다리는 모습. 물소중이 위에 물적삼을 입고 물수건을 썼다. 먼 바다로 나가기 위해 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출처=제주학아카이브, 서재철.

작은 섬이면서도 동촌과 서촌의 생활환경이 현격히 다르다 보니, 또 흥미로운 속담 하나가 생겨났다. 인과율로 우연찮은 일이다.

‘동촌 여자 서촌에 씨집갈 거엥 허민 남죽 들렁 춤춘다’
(동촌 여자 서촌에 시집갈 거라고 하면 죽젓개 들고 춤춘다)

한라산을 향해 동쪽인 왼편에 있다고 해서 조천읍‧구좌읍을 좌면(左面), 서쪽인 오른편에 있다 해서 애월읍과 한림읍을 우면(右面)이라 불렀다. 좌면인 동촌은 제주시나 우면에 비해 농토가 아주 박해서 사는 형편이 몹시 열악했다.
  
그래서 동촌 처녀들은 제주시 가까운 서쪽 마을로 시집가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제주시는 더 말할 것이 없고, 그 인접 지역만 해도 성공적인 혼인이라 해서 죽젓개(베수기)를 들고 춤을 출 정도로 기뻐했다는 얘기다. 서촌을 얼마나 꿈에 그렸으면 그랬을까. 오죽했으면 제가 나고 자란 곳을 떠나 서촌으로 가고 싶어 했을까. 그나저나 남죽 들고 춤춘다는 말에 실실 웃음이 나온다.

남자라고 문제가 없지 않았다.

내가 장가들었던 1960년대만 해도 ‘동읫놈(동촌 놈)’이라며 푸대접을 받았다. 그것도 같은 동촌인 조천에서. 조천 사람들이 구좌 사람들을 동촌이라 했으니 이도 우스운 일이다. 제주시 동쪽으로 엄연히 같은 동촌 사람들이면서 그랬으니까. 혼인에 성공했지만 ‘동읫놈’이란 소리는 귀에 거슬려 달갑지 않았다. 제주에도 ‘동서’ 지역감정이 있는 건 아닐까.
  
비록 옛날 일이기는 하나, 혼처로 선호할 만큼 서촌 마을로 향하던 동촌 처녀들 심사를 알고도 남는다. 동촌 태생이라 대놓고 말하지만, 지금도 동촌에 비해 서촌 사람들이 마음 넉넉하다고 한다. 농토의 비옥함과 척박함이 그곳 풍토를 만들어 내는 모양이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