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C대학생아카데미] 김종민 전 전문위원 “해방 후 미군정, 친일파 기용에 4.3학살 방조 책임”

7년 7년 개월 동안 3만명에 달하는 제주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 4.3사건. 다시는 끔찍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시민 개개인의 힘을 모아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조언이다.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주최하고 제주대학교와 <제주의소리>가 공동주관하는 'JDC 대학생아카데미' 2018학년도 2학기 아홉 번째 강의가 13일 오후 2시 제주대학교 아라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이날은 김종민 전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이 나서 ‘제주4.3의 개요와 교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4.3이 어떤 흐름 속에 벌어졌는지부터 살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을 향해 갈수록 일본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제주도를 요새화 한다. 1944년 제주 인구가 21만명이었는데 주둔했던 일본군은 7만명에 달했다. 지금까지도 송악산, 정방폭포, 어승생 꼭대기에는 일본군의 흔적이 남아있다.

IMG_8918.JPG▲ 'JDC 대학생아카데미' 13일 강의는 김종민 전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이 진행했다. ⓒ제주의소리

1945년 8월 15일 전쟁은 끝나지만, 정작 분단은 패전국인 일본이 아닌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북쪽은 소련, 남쪽은 미국이 점령했다. 맥아더 장군은 포고령을 발표하는데 ▲북위 38선 이하는 미군이 점령(occupy)한다(1호) ▲미군에 저항하면 사형 혹은 그 밖의 형벌을 처벌한다(2호)는 내용이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를 연다. 여기서 정한 네 가지 기준이 있는데  ▲독립국가로 재건설하기 위해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 ▲미국·소련 공동위원회를 열 것 ▲최고 5년 기한으로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국의 신탁통치를 할 것, 신탁통치 방안은 미국소련공동위원회가 조선 임시정부와 협의 ▲남북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2주 내로 미국, 소련 양군 회의를 연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1945년 12월 27일 한반도 역사를 뒤집은 ‘가짜뉴스’가 등장한다. 동아일보가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고 보도한 것이다. 실상은 정 반대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방 이듬해 모든 한반도 국민의 이목은 신탁 찬반에 쏠린다. 친일파들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김 전 전문위원은 “해방 이후 잠시 조용히 숨죽이던 친일파들은 미국에 빌붙는 행동을 해야, 계속 권력, 명예, 부를 쥘 수 있겠다고 판단한다. 이들은 민족진영의 반대가 공산진영이라는 이상한 프레임을 내세운다. 일명, 친일파 반공주의자들의 등장”이라고 언급했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여운형 선생을 필두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가 기본적인 치안, 질서유지를 맡는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바꾼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대중적인 지지가 높아 온건한 성향을 보였다. 미군정도 제주에서는 인민위원회를 활용할 정도였다. 

향후 미군은 인민위원회를 탄압하며 와해시킨다. 인민위원회 역시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조직을 탈바꿈한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건국 5칙’을 발표한다. 

▲기업가와 노동자가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는 세우자!
▲지주와 농민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여자의 권리가 남자와 같이 되는 나라를 세우자!
▲청년의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를 세우자!
▲학생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김 전 전문위원은 “건국 5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명문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떤 세상을 꿈꿨는지 잘 나타난다. 지금으로 비유하면 북유럽 복지국가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미군정은 경찰 경위 이상 간부 82%를 일제 경찰 출신으로 채용했다. 군대 장교 임관자 110명 가운데 광복군 출신은 2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었다. 주민들이 원하던 새로운 세상과는 다른 현실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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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DC 대학생아카데미' 13일 강의는 김종민 전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이 진행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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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DC 대학생아카데미' 13일 강의는 김종민 전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이 진행했다. ⓒ제주의소리

4.3의 발단은 1947년 3월 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 벌어진 3.1운동 기념식 발포사건이다. 현장에서는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제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온 경찰이 쏜 총에 주민 6명이 숨진다. 정면이 아닌 등에 맞았기에 도망가는 사람을 조준 사격한 것이다. 경찰의 과잉진압에 민간 뿐만 아니라 관공서까지 참여하는 유례 없는 대규모 총파업이 그해 3월 10일 제주도에서 벌어진다. 파업의 요구 조건은 간단명료하면서 당연했다. 발포 책임자 처벌, 피해자 보상, 재발 방지 대책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제주도는 원래 빨갱이 섬’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적반하장식으로 나왔다.

김 전 전문위원은 “4.3이 벌어진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극우세력은 ‘빨갱이’ 프레임을 내세운다. 광주 5.18 학살을 북한군이 저질렀다고 호도하는 주장이나, 의견이 다른 상대방에 ‘너 빨갱이, 종북좌파냐’라고 규정짓는 버릇은 이미 70년 전부터 내려온다”고 꼬집었다.

총파업을 계기로 제주에는 북한 출신이 중심이 된 서북청년회가 대거 내려온다. 총파업부터 1년 동안 경찰, 서북청년회가 붙잡은 도민만 2500명에 달한다. 1948년 3월 고문치사로 3명이 숨지기 까지 한다.

가혹한 탄압이 1년 동안 이어지자 결국 항쟁의 국면으로 전환된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무장대 350여명은 12개 경찰지서를 습격해 서북청년회와 극우청년단원 등을 살해한다. 당시 무장대가 지닌 무기는 도끼, 일본도, 죽창에 불과했다. 

1948년 4월 28일 김익렬 9연대장은 무장대와 평화협상에 합의한다. 72시간 동안 전투행위를 멈추고 서로 무장 해제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5월 1일 경찰의 사주를 받은 극우 청년단원이 오라리 연미마을에 불을 지르면서 협상은 결렬된다.

결국 미군정 수뇌부가 제주에 내려와 강경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에서 북제주군 갑·을 선거구가 투표율 미달로 무효처리되면서 진압은 본격화된다. 일명, 초토화작전이다. 1948년 10월 17일 송요찬 9연대장은 ‘제주도 해변에서 5km 바깥 구역은 적성지역이니 그곳에 있는 인원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한다. 

김 전 전문위원은 “초토화작전 때는 성읍리를 제외한 모든 중산간 마을이 불탔다. 젖먹이부터 80대 노인까지 가리지 않고 참혹하게 죽였다. 청년이 없는 가족은 ‘도피자 가족’이라고 죽였다.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무장대를 도왔다’며 법적 절차도 없이 죽였다”고 당시 잔혹상을 설명했다. 그렇게 3만명이 넘는 도민이 죽임을 당한다.

이런 학살이 벌어지면서도 미군정은 사실상 묵인하거나 조장했다. 1948년 12월 18일 로버츠 미군정 고문단장이 한국 국방장관에 보낸 서류 등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 

김 전 전문위원은 “전체 희생자 가운데 무장대에 의한 희생도 10% 가량 존재한다. 무장대의 분명한 과오”라고 짚었다.

그는 “4.3 당시 태어난 아이가 지금 70대다. 10살 미만 꼬마들이 살아남아 깡그리 불탄 폐허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제주 공동체가 복원된 것은 기적이나 다름 없다. 아름다운 제주는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소년 소녀들이 4.3의 잿더미에서 일으켜 세우고 후손을 낳아서 지금의 제주도를 만들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 전 전문위원은 “지중해에 지브롤터라는 지역이 있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 때문에 수백 년간 분쟁에 시달렸다. 대륙과 바다를 잇는 제주도 역시 지브롤터와 비슷하다는 외신의 평가가 있다. 제주도가 화약고 같은 지브롤터가 되지 않으려면 도민 한 명 한 명의 힘을 모아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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