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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일 열린 도립무용단의 <자청비 오름에 부는 바람> 무대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리뷰] 제주도립무용단 창작무용극 <자청비 오름에 부는 바람>

제주도립무용단이 제주신화 속 농경신 ‘자청비’를 소재로 꾸준히 공연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민망하게도 7~8일 열린 최신작 <자청비 오름에 부는 바람>을 통해서다. 무용단 창단과 함께 <생불화>(1990)를 제작했고 <무속악의 어울림 자청비뎐>(1996), <서천꽃밭>(1998), <생불화>(2000), <자청비>(2017)에 이번까지 여섯 번째다. 

‘파란 많은 곡절 끝에 하늘 옥황에서 오곡씨를 가져와 중세경으로 농경신이 되는 인물’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줄거리를 보면 남녀 간의 사랑, 고난, 초월 등 극적인 요소가 풍부하고, 자청비 인물에게서는 순종·희생 대신 주도·개척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자작나무숲(음악), 전통예술공연개발원 마로(허튼굿), 연극인 한은주 씨(모노드라마) 등 자청비를 다룬 도내 예술 작품이 최근만 해도 장르를 달리하며 여럿인데, 그만큼 매력적인 소재임은 분명하다.

올해 도립무용단의 <자청비 오름에 부는 바람>은 지난해와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안무자가 다르고, 안무자의 성향도 직전 현대무용-현재 한국무용으로 다르다. 그에 따라 연출, 무대, 조명, 음악, 의상, 소품, 분장 모두 바뀌었다. 새로운 대본(강방영 제주한라대 교수)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작품이 낫다는 비교는 개개인의 몫이기에 큰 의미가 없다. 다만 지난해 <자청비>를 기억하는 관람객은 올해 공연에서 상당한 변화를, 도립무용단의 자청비 작품을 처음 접하는 이들은 무용극 본질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겠다.

가장 큰 변화는 새로 등장한 ‘정수남’이란 인물이다. 자청비를 연모하는 머슴이지만 짝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며 끝내 자청비에게 살해당하는 본래 줄거리를 충실히 반영, 구현했다. 자청비와 인연을 맺는 문도령이 흡사 ‘모범생’이라면, 정수남은 거칠지만 솔직하게 본인 감정을 표현하는 ‘터프가이’에 가깝다. 그런 에너지를 발산하는 안무까지 더하면서 주인공만큼이나 인상적인 인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다만, 상대적으로 문도령이 밋밋하게 느껴진다. 

김혜림 도립무용단 상임안무자는 “보드라운 느낌의 문도령, 정 반대 성격의 거친 정수남, 그 사이에서 고난을 이겨내고 초월의 길을 향하는 자청비의 삼각관계를 일종의 삼위일체 같은 구조로 설정했다”고 설명한다.

<자청비 오름에 부는 바람>에서 깊은 인상을 주는 건 다름 아닌 ‘춤’이다. 자청비와 문도령의 서당 장면, 주인공 3명의 독무, 후반부 문도령과 자청비의 이별 등 극 전반에 걸쳐 극중 모든 진행 과정과 갈등 요소를 영상, 소품, 춤이 아닌 일반 연기 보다는 최대한 '몸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느낌을 받았다. 안무자의 치열한 고민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무대 세트 운영은 춤에 초점을 맞추는 듯 소박하게 꾸렸다. 세트는 최대한 안쪽으로 들어가 동선을 확보했고, 무색에 가까운 톤으로 여백의 느낌을 줬다. 높낮이에 차이를 둔 건 그나마 눈에 띄는 시도다. 이런 무대 운영은 2개월 미만의 짧은 준비 기간과 부족한 예산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여건도 어느 정도 이유가 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음악은 화룡점정이었다. 김혜림 안무자는 이번 공연 음악에 대해 “완벽한 상태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타악과 현악, 국악과 양악을 넘나드는 구성은 관객의 감정을 증폭시키는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도립무용단원들의 연기는 신구의 조화가 잘 어우러지며 주어진 역할을 잘 소화했다. 초반부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군무의 합도 잘 맞아떨어졌다. 정수남의 혼을 달래는 씻김 장면에서 악기를 떨어뜨리는 실수는 옥의 티로 남는다.

앞서 말했지만 <자청비 오름에 부는 바람>은 엄밀히 말해 급하게 만든 작품이다. 9월 초 취임해 12월 7~8일 공연일까지 온전히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많이 잡아도 1개월 조금 넘는다. 안무자 역시 소개의 글에서 “적응기간도 잠시, 너무나 짧은 제작기간과 자청비 컨셉으로 작품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임무 같은 기획에 처음엔 주춤하기도 했다”고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때문에 안무자가 새로운 구상을 고민하고 구현하는데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색종이가 흩날리는 클라이막스 방식이, 도립무용단 취임 전인 지난 8월 창무국제공연예술제에서 선보인 창작 무용극 <메멘토 모리> 속 장면과 유사하거나, 당시 손발을 맞춘 의상·분장 담당자와 다시 함께 작업한 것도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장면이나 담당자에 대한 만족도와는 별개임을 밝힌다.)

김혜림 안무자의 다음 작품을 어서 보고 싶은 건, 이틀 동안 제주문예회관 대극장 객석을 꽉 채운 사람들 가운데 나만의 생각은 분명 아닐 것이다. 기본에 충실한 춤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그만의 방식은 이번 <자청비 오름에 부는 바람>에서 맛보기로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안무자 창작 여건이 100% 발휘될 도립무용단의 다음 공연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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