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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기영 작가는 13일 제8회 제주4.3평화포럼 기조강연자로 참여해 "미국이 4.3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제주의소리

현기영 작가 4.3평화재단 포럼 기조강연, “냉전체제 구축 위해 저지른 이이제이” 

“변변한 무기도 없이 억제할 수 없는 분노만 가지고 봉기한 200여 명의 젊은이들을 무찌르기 위해 무고한 양민 최소 3만 명을 소탕한 것이 바로 4.3사건의 골자인 것이다.”

“섬주민의 1/9에 해당하는 최소 3만 명이 학살당하고 130여 개 마을이 소각된 그 사건을 생각하면, 그 엄청난 주검 때문에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은 미국의 세 번째 원폭 투하처럼 느껴진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정권 시절, 제주4.3의 참상을 앞장서서 알린 작가 현기영은 말한다. 70년이 지나도 4.3이란 역사를 매듭짓지 못한 오늘날, 미국 정부가 4.3 참사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하는 것이, 꼬여버린 역사의 실타래를 푸는 길임을 힘주어 강조한다.

제주4.3평화재단과 연세대학교 인간평와와치유연구센터가 함께 개최하는 ‘제8회 제주4.3평화포럼’이 13일부터 14일까지 제주칼호텔에서 열린다. 포럼은 13일 오후 5시 30분 현기영 작가의 기조 강연으로 막이 올랐다. 

현기영 작가는 4.3의 성격 규정을 ‘폭동’, ‘빨갱이’ 등으로 덧씌우는 극우 세력의 시도에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당시 봉기 선언문도 첫 문장이 ‘탄압이면 항쟁이다. 앉아서 죽느니 서서 싸우자’라고 돼 있거니와 그 봉기는 이데올로기적 성격보다는 가혹한 탄압에 대한 강요된 저항이었다.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이인은 4.3봉기를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 코를 문 격’이라고 표현했다”고 강조했다.

저항의 원인이었던 ‘가혹한 탄압’도 조목조목 짚어냈다.

▲1946년 대흉년과 콜레라 창궐 ▲일제강점기 강제공출 부활 ▲미국·소련의 한반도 분단 정책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미군정 경찰 발포로 6명 사망 ▲항의성 총파업에 2500여명 체포, 테러, 취조와 고문치사까지.

더욱이 3.1시위, 3.10총파업, 그리고 4.3봉기는 “조선 후기의 임술민란, 방성칠란, 이재수란, 일제강점기 해녀항일투쟁을 잇는 제주도 특유의 전통적 저항의 연장선상이다. 역대 정권들과 극우세력이 일방적으로 붉은색 칠해 버리듯이 계급주의적 성격이 짙은 것이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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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기영 작가의 기조강연. ⓒ제주의소리

현기영 작가는 제주도민은 애초 미국에 우호적이었다고 밝혔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진인(眞人)’이라고 부를 정도였다는 것.

그러나 “미국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친일파(Pro-Jap)를 전문적 업무(Pro-job)이라고 말할 만큼, 친일파를 재등용했다. 무엇보다 개탄스러운 것은 일제 공포정치의 주구였던 경찰의 복귀, 혹독한 탄압과 고문으로 4.3봉기의 직접 원인이 됐던 서북청년단의 중용이었다”고 당시 미군정의 행태를 비판했다.

현기영 작가는 4.3 학살 과정에서 미군정의 자세는 “가능한 제 손에 피를 덜 묻히고 동족으로 하여금 동족을 치게 한 이이제이였다”고 문제 삼았다.

“현장에서 미군복, 미군화에 미제 총을 쥔 조선 토종 병사들만 보이고 미군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무죄인 것은 아니”라며 “보이지 않는 그들은 군사고문단이란 이름을 갖추고서 그 섬을 해상봉쇄한 구축함 속에, 병력 수송의 LST 속에, 제주읍의 CIC 사무실 속에 있었다”고 미국의 책임을 분명히 했다.

그렇게 미국의 묵인·방조 속에 벌어진 3만명의 무차별 학살은 흡사 스페인의 마야 문명 멸망, 북미의 인디언 대학살과 다를 바 없다고 봤다. 이런 대량 학살의 공통점은 “아무 죄책감 없이도 살해하려면 대상이 짐승이거나 하등 인간 즉 야만인이어야 했다”면서 “4.3의 대참사는 빨갱이는 아예 사람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그러한 무서운 야만주의가 저지른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현기영 작가는 “4.3의 3만 영령들은 죽음이 아닌 생명을, 전쟁이 아닌 평화를 가르치고 있다”면서 “일본은 아시아 공영권의 평화를 위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고 했고, 미국은 이라크 국민의 자유를 위해서 이라크 전을 수행한다고 했다. 평화를 낳는 것은 평화이지, 전쟁이 평화를 낳는 것은 아니다. 평화를 만드는 것은 이성과 인내, 관용이지 증오와 분노가 아니”라고 4.3이 주는 교훈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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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회 제주4.3평화포럼은 13~14일 제주칼호텔에서 열린다. ⓒ제주의소리

현기영 작가는 “미국이 4.3참사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할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 하와이 침략 100주년 되던 해에 하와이왕국 침략 행위를 사과했듯이, 몇 년 전에 오바마 대통령이 인디안 학살 행위에 대해 사과했듯이, 제주4.3 참사에 대해서도 사과하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한편, 제8회 제주4.3평화포럼은 14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제주칼호텔에서 둘째 날 일정을 소화한다. ▲제주4.3 미국의 도덕적, 법률적, 정치적 책임 ▲국내외 과거사 청산과 미국과의 대변, 대화 극복 사례를 국내외 전문가들의 발표로 들어본다. 

4.3과 미국
현기영(소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은 대흉년의 굶주림 속에서 콜레라의 창궐로 400명 가까운 희생자가 발생하고, 일제 때 악명 높았던 양곡 강제공출이 강행되는 등 민중생활이 최악의 상태에 빠져 버린 한 해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소의 한반도 분단 정책이 민중을 크게 실망시키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민족적 선결과제는 해방과 동시에 그어진 3․8선의 철폐와 일제 잔재 척결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상황은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점령이었다. 새 국가를 건설하려면 남북을 하나로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이 옳지, 남북 각각의 단독정부를 세워서야 되겠는가, 하고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분단은 반드시 내전을 불러 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3.1사건을 발생하게 만들었다. 

1947년 3월1일, 3.1절을 기념하는 거룩한 자리에서, 수만 명이 모인 민중 집회에 미군정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한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 도민은 총파업으로써 항의했는데,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발포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가혹한 탄압이었다. 제주도를 공산주의 일색으로 물들어 버린 것처럼 호도하면서 벌어진 무서운 검거 선풍 속에서 섬 주민들은 미군정의 혹독한 테러와 고문을 당해야 했다. 2,500명이 체포되어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여러 명의 고문치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무자비했던 그 테러와 고문이야말로 4.3봉기의 주요 원인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까 제주도민에게 죄가 있다면, 온 국민이 반대한 단독 정부 수립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죄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제주도에서의 군정 실패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군경토벌대 사령관은 로스웰 브라운 대령이었는데, 그는 “사건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다만 진압할 뿐”이라고 말했다.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이인은 4.3봉기를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 코를 문 격’이라고 표현했다. 봉기 선언문도 첫 문장이 “탄압이면 항쟁이다. 앉아서 죽느니 서서 싸우자” 라고 되어 있거니와 그 봉기는 이데올로기적 성격보다는 가혹한 탄압에 대한 강요된 저항이었다. 
 
공동체 정신이 투철한 제주도민은 조선조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지배세력의 가혹한 가렴주구에 맞서 공동체적으로 저항한 전통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민란이라고 일컬어지는, 조선후기의 임술민란, 방성칠란, 이재수란,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해녀항일투쟁이다.

수탈당하고 억압받는 민중은 메시아 사상을 갖는다. 도탄에 빠진 민중을 규합해서 활로를 찾아줄 메시아의 도래, 대담한 영웅의 탄생을 그들은 애타게 기다린다. 그러한 영웅을 섬사람들은 진인(眞人)이라고 불렀다. 고통 받는 민중의 절규를 구중심처의 왕실까지 들리게 하려면, 만 개의 입이 한 입 되어 와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란의 집단행동에는 반드시 주동자들이 잡혀 참수당하게 마련이었으므로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차별정책이 자심했던 변방 땅 제주도에서 그러한 영웅이 탄생한다는 것은 민중을 규합하여 민란을 이끌다간 결국에는 처형되고 마는 역적의 출현이나 다름없었다. 민란 끝에 예외 없이 죽임을 당했던 비극적인 영웅들, 저 한 몸 바쳐 만인을 살리고자 했던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살신성인한 영웅이요, 잔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3.1시위, 3.10총파업과 4.3봉기는 제주도 특유의 이러한 저항의 전통,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지, 역대 정권들과 극우세력이 일방적으로 붉은색 칠해 버리듯이 계급주의적 성격이 짙은 것은 아니었다. 

붉게 색칠해진 그 섬은 무차별 학살의 처형도로 변하고 말았다. 주민들은 전통적 방식의 저항을 했건만 수난 양상은 너무도 판이했다. 자기희생으로써 만인을 살린 전시대의 민중 지도자(장두)들과 달리 4.3항쟁의 지도자들은 자신도 죽고 만인도 죽어야하는 비극의 운명을 맞고 말았다. 전통적 민란밖에 모르는 당시 그 섬 주민들에게 4.3이란 민중파괴의 대참사는 너무도 기상천외이고 도무지 이해불능이었을 것이다. 민란도 이해할 수 있고, 시위와 총파업도 이해할 수 있지만, 4.3의 대재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엄청난 재앙의 배후가 된 미국은 과연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주도민은 처음 미국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맨(Trueman)이었는데, 그 이름은 문자 그대로 번역해서 ‘진인(眞人)이라고 호칭할 정도로 미국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해줄 진인, 즉 메시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pro-Jap(친일파)’가 ‘pro-job(전문적 업무)’이라고 말했다. 이 두 단어가 발음이 비슷하다고 들먹거리면서, 친일파가 업무에 전문적이라고 친일파를 재등용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개탄스러운 것은 일제 공포정치의 주구였던 경찰의 복귀, 그리고 혹독한 탄압과 고문으로 4.3봉기의 직접 원인이 되었던 서북청년단의 중용이었다.

미군정 장관 딘 소장의 고문관이  9연대 연대장 김익렬을 회유한 사실은 그의 유고집에 나와 있다. 27세의 젊은 김익렬에게 아버지뻘인 그 고문관이 온갖 특혜를 제시하면서, 4.3봉기를 빠른 시일 내에 진압하지 않으면 미국은 국제적으로 난처해지고, 신생정부에도 불리하다고 하면서 초토화작전을 요구했던 것이다.

미구축함 크레이그호가 제주해상을 봉쇄한 가운데 그 해 11월 대학살, 대방화가 자행되었다. 대학살은 비밀이었고, 항상 그렇듯이 무서운 비밀은 강력한 힘을 갖는 법, 그 풍문이 본토인들을 두렵게 했다.

다음은 나의 단편소설 <쇠와 살> 중의 한 대목이다.

먼 데 불은 아름답다
고려 목종 때 그 섬에 마지막 화산 폭발이 있었다. 두 이레 열나흘 동안 하늘과 땅이 맞붙어 천동치고 지동치는 그 무서운 재앙불 속에서 섬사람들이 두려움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떨고 있을 때, 먼바다에서 본 그 섬은 보랏빛 상서로운 구름에 휩싸여 매우 아름답게 보이더라고, 어느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1948년 11월 그 섬의 중산간지대 130여 개 부락들이 초토화 불길에 불탈 때, 천지간에 가득 찬 화염의 그 붉은빛은 먼데서 봤을 때 또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해상봉쇄의 임무를 띠고 바다에 떠 있던 미해군 함대의 장교, 수병들은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증언해주기를 바란다. 장엄하게 아름다웠는가? 불가사의하게 아름다웠는가? 웅혼하게 아름다웠는가? 처절하게 아름다웠는가?

그 삼광(三光)의 초토화 작전에서 섬주민의 1/9에 해당하는 최소 3만 명이 학살당하고 130여 개 마을이 소각된 그 사건을 생각하면, 그 엄청난 주검 때문에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은 미국의 세 번째 원폭 투하처럼 느껴진다. 

4.3은 종전 후 냉전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 구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동족이 동족을 학살한 그 사건에서, 미국은 손에 피가 묻지 않았다고 해서 무죄인가? 현장에서 미군복, 미군화에 미제 총을 쥔 조선 토종 병사들만 보이고 미군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무죄인 것은 아니다. 전쟁 속의 인간은 본능적, 충동적이기 마련인데, 말단 소총수에게까지 살인 면허를 줌으로써 인간의 야수성을 극대화한 장본인은 누구인가. 보이지 않은 그들은 군사고문단이란 이름을 갖추고서 그 섬을 해상봉쇄한 구축함 속에, 병력 수송의 LST 속에, 제주읍의 CIC 사무실 속에 있었다. 점령국이 식민지 민중을 제압하는 가장 효과적인 책략은 가능한 제 손에 피를 덜 묻히고 동족으로 하여금 동족을 치게 하는 것임을 미국은 잘 알고 있었나 보다.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미소 냉전의 최전방에서 미국이 흘려야 할 피를 한국이 대신 흘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것을 우리는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부른다. 

다음 역시 나의 단편소설 <쇠와 살> 중의 한 대목이다.

이것은 누구의 범죄인가. 기관총인가, 기관총 사수인가, 사격 명령을 내린 장교인가, 무선전화로 처단명령을 내린 대대장인가, 그 위의 연대장인가, 그 옆의 그림자 같이 붙어있는 미군사고문관인가, 그 위, 마침내 삼각형의 꼭지점은 누구인가? 트루먼(Truman)은 정말 진인(眞人 true man)이었나?

변변한 무기도 없이 억제할 수 없는 분노만 가지고 봉기한 2백여 명의 젊은이들을 무찌르기 위해 무고한 양민 최소 3만 명을 소탕한 것이 바로 4.3사건의 골자인 것이다. 그 당시에 백살일비(百殺一厞)라는 말이 있었는데, 양민 백을 죽이면 그 중에 게릴라 한 명쯤은 끼어있게 마련이라는 것. 그래서 게릴라 2백 명을 죽이기 위해서 양민 3만을 소탕했던가.

미국과 이승만의 지배권력은 제주도의 8할을 붉은색으로 칠하여, ‘붉은 섬’ 혹은 ‘RED ISLAND’라고 명명했다. 혹은 당시에 그 붉은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4·3의 수많은 양민들이 붉은색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어갔다. 그 대량학살을 ‘레드 헌트’(RED HUNT)라고 불렀다. ‘레드 헌트’는 문자 그대로의 “빨갱이 사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4.3사건에서 보듯이, 그보다는 오히려 무고한 사람들을 빨갱이로 날조하여 사냥하는 행위를 일컫는 아주 역설적인 용어이다. 이 용어는 중세의 마녀 사냥(WITCH HUNT)에 빗대어 만들어진 것이다. 중세의 암흑 속에서 수많은 여인들이 사악한 마녀, 혹은 마녀와 내통한 자로 낙인찍혀 종교 제단의 희생물이 되었듯이 현대에는 수많은 양민들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이념의 제단에 희생물로 바쳐졌던 것이다. 
 
용공조작을 영어로 말하면 매카씨즘이다.

4.3사건이 있었던 1948년과 미국내 매카시 선풍이 있었던 1950년은 트루먼 대통령이 재직한 시기이다. 매카시 선풍 속에서도 ‘레드 헌트’라는 말이 흔히 쓰였던 모양인데, 극우파의 책동에 의한 그 용공조작 사건에서 수백 명의 공직가가 직장에서 쫓겨 나가고, 많은 문인․예술가․지식인들이 빨갱이라고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미국내의 그 ‘레드 헌트’와 제주도의 그것은 얼마나 다른가! 그 섬에서 그것은 3만 명의 무차별 학살을 의미했다. 

사냥이란 짐승에 사용하는 말이지, 인간에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빨갱이 사냥’이 말이 되려면 빨갱이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어야 한다. 16세기 스페인이 마야 문명을 멸망시키면서 엄청난 대량학살을 저지를 때, 그 나라의 가톨릭은 인디오에게는 인간의 영혼이 없다는 판단을 내림으로써, 즉 인디오는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깝다는 판단을 내림으로써, 그 대량학살에 면죄부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무 죄책감 없이도 살해하려면, 대상이 짐승이거나 하등 인간 즉 야만인이어야 했다. 

미국이 프론티어를 확장해 나가면서 저지른 북미 인디안 대학살도 그러한 문맥에서 이루어졌다. 1900년 경, 미국의 팽창주의가 필리핀을 침략할 때 아무 거리낌 없이 대학살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가공할 편견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자기 조국이 저지르는 그러한 야만행위를 보고, 미 해군함대에 게양된 성조기를 해골이 그려진 해적기로 바꾸어야 옳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4.3의 대참사는 빨갱이는 아예 사람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그러한 무서운 야만주의가 저지른 사건이었다. 빨갱이는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아예 사람이 아니었거나, 하등 인간 즉 야만인으로 간주되었고 그러기에 누가 그들을 죽여도 면죄부가 주어졌다. 그러나 학살된 최소 3만 명 중에서 좌익사상을 가진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무고한 양민들이었다.
 
3만이라는 그 막대한 죽음은 우리에게 인간이란 과연 무엇이고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4.3의 3만 영령들은 죽음이 아닌 생명을, 전쟁이 아닌 평화를 가르치고 있다.

정의의 전쟁은 없다. 모든 전쟁은 평화를 전제로 했지만, 전쟁은 전쟁을 낳을 뿐이 아닌가. 어떠한 전쟁도 이길 수 없다. 승전의 순간에 패배가 시작되는 것이 전쟁이다. 그들은 항상 평화의 이름으로, 자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킨다고 했고, 또는 제2차세계대전을 전쟁을 종식시키는 마지막 전쟁이라고도 했다. 일본은 아시아 공영권의 평화를 위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고 했고, 미국은 이라크 국민의 자유를 위해서 이라크 전을 수행한다고 했다.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전쟁이다. 푸에블로호 사건 때 닉슨 정부는 북한에 핵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을 세웠다가 포기했다고 하는데, 그 작전 이름이 ‘FREEDOM DROP'이었다. 북한의 자유를 위하여 핵포탄을 투하한다는 것이었죠. 클린턴 정부 때도 북폭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부분 핵전쟁은 남북한의 무고한 민간인 수십만이 파괴됨을 뜻하지 않은가. 
 
평화를 낳는 것은 평화이지, 전쟁이 평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평화를 만드는 것은 이성과 인내, 관용이지 증오와 분노가 아니다. 

지금 이 포럼의 자리를 빌어서 우리는 미국이 평화를 위해 전쟁을 만드는 war-maker가 아니라, 평화의 방식으로 평화를 만드는 peace-maker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리고 미국이 4.3참사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할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 하와이 침략 100주년 되던 해에 하와이왕국 침략 행위를 사과했듯이, 몇 년 전에 오바마 대통령이 인디안 학살행위에 대해 사과했듯이, 제주 4.3 참사에 대해서도 사과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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