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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만능주의 속에서 붕괴되는 사회경제 윤리감각

고명철 교수 news@jejusori.net 2018년 12월 24일 월요일 09:21   0면
[BOOK世通, 제주 읽기] (117) 박완서, 《미망》, 세계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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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완서, 《미망》, 세계사, 1996. 출처=알라딘.

우리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외환보유고의 부족으로 국가부도의 사태를 맞이하였다. 이른바 IMF체제로 들어서게 된 이후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한 사회 전 분야에 걸친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이 흡사 쓰나미처럼 불어닥쳤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이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켜켜이 누적된 한국형 자본주의의 총체적 문제점이 한꺼번에 곪아터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그 발단은 경제 분야에서 촉발되었지만 경제만능주의로 수렴된 한국 사회의 왜곡된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과 그 실제는 사회 전 분야에 팽배해진 부정부패의 구조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후 한국 사회의 참담한 고통과 각고의 노력으로 IMF체제를 벗어났다. 하지만 우리가 겪은 IMF체제의 경험은 한국 사회의 일상 자체를 전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IMF체제 이후 한국 사회의 버팀목이었던 중산층의 삶의 안팎에 대한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는 더욱 경제만능주의 사회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는데, 종래 한국 사회를 지탱시켜주던 사회경제 윤리감각, 가령 빠르고 늦는 정도의 시기가 문제일 뿐 열심히 착실히 노력하면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꿈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회경제 윤리감각이 붕괴돼 버린 것이다. 그 단적인 사례를 들자면, 한 어린애의 장차 꿈을 묻는 질문에 대해 그 어린애는 빌딩의 건물주가 돼 편안한 삶을 사는 게 자신의 꿈임을 천진난만히 웃으면서 답변했다. 이 어린애의 답변은 작금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토록 다양한 꿈들 중에서 어린애는 무엇 때문에 이러한 경제적 삶을 선택하는 꿈을 당당히 드러냈을까. 여러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으나, 어린애가 무심결 자주 접하는 일상 속에서 이와 연관된 경제의 현상들이 어린애의 입장에서는 장차 행복한 삶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원대한 이상으로 다가왔는지 모를 일이다. 그만큼 작금의 한국 사회의 경제 현상에 대해 대중이 피부로 접하는 면모들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자신의 유무형의 노동을 투자하여 경제적 성취를 얻는 것과 거리를 두고 있다. 한국 사회가 IMF체제로부터 벗어났으되 갈수록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노동의 가치가 가벼워질 뿐만 아니라 한층 가속화되는 경제만능주의가 야기하는 물신주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위 어린애의 꿈과 유사한 꿈들이 주류를 차지할 날이 멀지 않을 수 있다는 음울한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처럼 지금, 이곳 한국 사회를 접하면서 박완서의 대하소설 《미망》이 그려내는 모습들은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자화상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경제 윤리감각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21세기 지구화시대를 살아가면서 한국 자본주의의 삶과 현실은 어떠한 사회경제 윤리감각을 벼려야할까.

역사의 미망에 응전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정동(情動)

《미망》에서 각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소설이 다루는 시기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개화기 전후를 포함하여 일제 식민체제와 한국전쟁에 이르는 장구한 시간을 대상으로 하고, 다루는 공간은 ‘개성(옛 송도)–경성-만주/중국-일본’ 등 동아시아를 두루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모든 시공간이 중요하되, 특히 예의주시할 공간은 개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완서가 개성에 주목한 이유는 정치행정적 중심지인 서울의 한양과 달리 개성은 고려시대의 그리고 “조선팔도의, 아니 청국, 아라사, 일본과 물산과 돈이 집산하는 중심지였고 한바탕 꿈을 펴보기에 손색이 없는 대처”(《미망》상:172쪽)로서 “멀리 아라비아 상인까지 자유롭게 드나들던 상업도시로서의 번영과 영화”(상:172쪽)가 면면히 내려온, 말하자면 상업자본주의의 맹아가 싹 튼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성은 고려시대부터 인삼을 주거래 상품으로 한 송상(松商)의 상업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으로, 박완서는 《미망》에서 한국의 근대적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통찰을 이곳 송상의 내력을 중심으로 서사화한 것이다. 

《미망》에서 우선 주목할 인물은 ‘전처만’이다. “개성에서도 가장 삼포(蔘圃)가 널리 분포돼 있는”(상:32쪽) 마을의 가난한 소작농 출신인 소년 전처만은 향반 이생원으로부터 아비가 당한 수모를 목도하고는 이생원처럼 몰락한 향반의 권위를 부여잡고 무고한 양민 위에 군림하는, 즉 “의롭지 못하게 비롯된 새로운 왕조에 나아가 벼슬을 함으로써 망국의 한을 더욱 욕되게 하느니 차라리 돈을 벌자, 새로운 왕조의 이념인 유교가 가장 능멸하여 거들떠보지 않는 장사꾼이 되어 돈을 벌자고”(상:46쪽) 굳게 맹세한다. 그러면서 전처만은 상업활동 중 특히 인삼과 관련한 상업에 매진하여 개성 상인을 대표하는 거부(巨富)로 성공한다. 분명, 전처만이 이룬 경제적 성공은 애초 향반 이생원에 대한 분노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그는 “돈으로 하여금 도리(道理)를 잃게 했을 때 저절로 부를 누릴 자격이 없어진다는 걸”(상:193쪽) 자신의 파란만장한 상업활동의 경험 속에서 깨닫는다. 그리하여 전처만이 경계하고 질책하는 대상은 상도덕(商道德)을 어기고 시장의 질서를 유린하면서 오직 돈을 버는 데만 집착하는 상업활동이다. 그래서 전처만은 아무리 자기 자식이되 “그의 아들 이성이가 얼마나 파렴치한 방법으로 왜놈과 결탁하고 관을 매수해서 돈을 벌었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마지막으로 역성들어야 할 것은 자식이 아니라 송방의 계율”(상:194쪽)임을 몸소 실천한다. 이것은 박완서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근대적 자본주의 이전 상업자본주의 맹아 단계에서 보이는 사회경제 윤리감각의 한 전형이다.  

여기서, 비록 전처만도 ‘이성이’처럼 한때 인삼 밀무역을 통해 돈을 벌기도 하였으나, 그러한 자신의 상업활동이 더 이상 존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자기성찰은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전처만은 그의 손녀 ‘태임’에게 각별히 기대한다. 이것은 개화기에 직면한 시대의 한 단면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성리학적 유교질서가 지배적인 가부장중심제 조선조 사회는 개화기 무렵 각종 근대의 문명이 서구로부터 유입되면서 그것에 대응하여 근대적 제도가 생겨났는데, 여성에게도 신교육의 기회가 개방되면서 주체적 개인으로서 자기인식이 널리 확산되고 있는 저간의 흐름을 전처만은 주시하고 있었다. 전처만의 총애를 받은 태임은 이러한 개화기 신문명의 흐름을 자신의 방식으로 섭취함으로써 송상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새 세대의 송상 역할을 맡는다. 말하자면, 태임은 어엿한 여성 경영자로서 거듭난 셈이다. 그리하여 여성 경영자로서 태임이 관리 및 수행하는 ‘인삼 농사‐송농(松農)’과 ‘인삼 상거래‐송삼(松蔘)’은 할아버지 전처만의 경영방식보다 진전된바, ‘고려인삼’이란 상품브랜드 가치를 신장시키기 위해 홍보 및 광고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상행위 형식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자본이 잠식해온 국내 인삼 시장에서 “새로운 살 길”(하:111쪽)을 개척한다. 이것은 달리 말해 제국의 식민지 자본과 맞서 길항한 민족자본의 움직임으로 평가해도 손색이 없다.

기실, 《미망》에서 태임과 같은 이러한 민족자본의 움직임은 태임의 남편 ‘종상’과 그 아들 ‘경우’에게서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태임의 경제 활동이 그 조부 전처만 세대보다 한층 본격적 상업자본주의로서 민족자본의 모습을 보인다면, 종상은 가내공업으로서 양말공장과 본격적 공장제 공업의 형태를 띤 방직공장을 운영하면서 벌어들인 돈을 만주와 중국 일대 항일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하고, 경우는 일본 유학을 통해 배운 고무 화학 기술을 활용하여 고무 관련 제조업 공장을 운영하는 경제 활동에 열심을 보인다. 이렇듯이 태임과 종상 부부 그리고 그 아들 경우는 일제 식민지의 경제적 억압과 착취의 엄혹한 현실의 역사 한계 안에서 비굴하게 굴종하지 않는 민족자본의 존재 가치를 보증한다. 이것은 전처만의 아들 이성이와 친일협력자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박승재’의 삶과 대비시킬 때 보다 뚜렷해진다.

《미망》의 제목이 고스란히 말해주듯, 박완서는 송상 전처만을 필두로 한 태임을 중심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식민지 자본주의의 파고(波高) 속에서 어떻게 생성 및 성장하는 지 그 험난한 도정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추적하고 있다. 20세기 전반기 한국 사회의 현실이 웅변해주는바, 전처만 가계의 경제 활동은 식민지 근대 속에서 난경(難境)을 겪으며, 말 그대로 미망(迷妄)에 놓여 있다. 이 역사의 미망 속에서 태임 집안의 경제 활동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채 그 남동생 ‘태남’의 아들 ‘경국’이 과연 고향 개성을 떠나 강화도에서 인삼 농사를 어떻게 안착시킬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경국이 역시 그 전 세대가 헤쳐온 또 다른 역사의 미망 속에서 경제 활동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정동(情動)은 이렇게 역사의 미망에 대한 응전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성숙한 미래의 지평을 쉼 없이 모색하리라. 

▲ 고명철 교수. ⓒ제주의소리
▷ 고명철 교수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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