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기해년] 예부터 전국 최고 양돈 산업지...지하수 파괴 책임 ‘오명’

2019년 기해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기해년(己亥年)은 노란 돼지의 해입니다. 돼지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제주와 각별한 인연을 자랑합니다. 척박한 도민 살림에 큰 도움이 됐지만, 오늘 날에는 지하수 파괴의 원흉이라는 오명도 받고 있죠.

제주와 돼지의 인연을 잘 나타내는 기록이 있습니다. 까마득한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위지동이전>에는 당시 제주 사람들을 향해 “소와 돼지 키우기를 좋아한다”고 기록해놨습니다. 이런 경향은 조선시대를 지나 일제강점기, 산업화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4만7000호가 넘는 거의 모든 제주 가구마다 돼지를 키웠다는 1930년대 기록도 존재합니다.

예전 평범한 제주사람들의 일상을 흥미롭게 모은 고광민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위원(2018년 제주도문화상 학술 부문 수상자)의 명저 《제주 생활사》(한그루)에는 왜 제주사람들이 돼지를 가깝게 두고 키웠는지 잘 정리돼 있습니다. 책 내용 일부를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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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제주도 돼지우리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옛 제주 사람들은 인분(사람의 똥)을 돼지 먹이로 제공했습니다. 1m 깊이로 판 돼지우리(돗통) 위에서 대변을 보면, 돼지들이 맛있게 먹어치웠습니다. 이렇게 정성스레(?) 기른 돼지우리 안에서 거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돗거름’입니다. 보리짚, 외양간의 퇴비, 해조류, 쇠똥, 말똥, 돼지 배설물이 섞이면서 거름이 됩니다.

고 위원은 “서귀포시 토평동 오모(1930년생) 씨 마을에는 ‘아기구덕에 쇠똥을 담아 지고 와야 부자 된다’라는 말이 전승됐다. 예전에는 어린아이의 사망이 많았다. 아기가 죽으면 죽은 아기를 아기구덕에 지고 가서 무덤을 만들어 줬다. 이때 죽은 아기를 지고 갔던 아기구덕은 봉분 주변에 놓아두고 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 아기구덕에 쇠똥을 담아 지고 온다는 것은 여간한 마음이 아니고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며 “자식을 잃은 아픔을 딛고, 살아가기 위해 죽은 아이를 지고 갔던 아기구덕에 쇠똥을 담아오는, 그런 강인한 정신력이 있어야 부자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이라고 돗거름과 쇠똥에 관한 이야기를 책 속에 남겼습니다.

소중한 돗거름은 보리를 키우는데 사용했습니다. 조선시대, 제주가 아닌 다른 한반도 지역은 인분을 보리 재배용 밑거름으로 썼다고 합니다. 액체라면 그대로 땅 속으로 스며들 화산회토 특성을 고려해, 인분을 돼지에게 주고 돼지우리에서 굳힌 고체 거름(돗거름)을 농사에 이용한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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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돼지우리를 재현한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 돼지하면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있죠. 푸른 눈의 ‘돼지 신부’ 故 임피제(맥그린치. P.J Mcglinchey, 1928~2018) 신부입니다. 임피제 신부는 1954년 불모지에 가까운 한림 지역에 터를 잡아 목축업을 도입했는데요, 요크셔 암퇘지를 끌고 인천에서 제주까지 데리고 온 일화는 지금도 유명합니다.

임피제 신부가 1960년대에 설립한 성이시돌목장은 지역 축산업을 선도했습니다. 병원, 경로당, 요양원, 유치원, 노인대학 같은 복지시설을 운영했고, 제주 최초의 지역신용협동조합, 가축은행, 방직회사 등을 연이어 설립하면서 삶이 고달팠던 도민들에 희망을 심어줬습니다.

제주 돼지는 어느새 수천억 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제주양돈농협이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유통 사업으로 얻은 매출은 무려 2631억200만원입니다. 여기에는 돼지 판매, 육가공, 약품, 사료, 종돈 사업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제주 양돈산업 전체로 넓히면 5000억원에 달한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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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냄새 저감 시설에만 4억원 넘는 비용을 투입한 남원읍 신례리 양문석 씨 돼지 축사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하지만 오늘날 제주에서 돼지에 대한 평가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지난해 여름, 온 도민을 충격에 빠뜨린 한림 지역 지하수 ‘숨골 무단 분뇨 투기’ 사건 때문입니다. 인근 주민들을 괴롭게 한 악취도 모자라, 일부 양돈 농가들이 몰래 땅 속으로 돼지 분뇨를 버린 사실이 뒤늦게 발각되면서 도민 사회 전체가 분노했습니다. 

분뇨 무단 배출 인근 지역의 지하수 관정을 조사해보니, 질산성질소 농도가 지하수 환경기준(10mg/L)을 초과했다는 결과까지 나왔습니다.

양돈 농가들은 재판에 넘겨지고, 제주도는 불법 배출에 대한 보다 강력한 관리·제재 조치를 선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가 양돈장 59곳을 악취관리지역으로 지정 고시했는데, 해당 농가들이 법적 대응에 나서는 씁쓸한 모습도 연출됐습니다.

이 같은 상황이 되자 “누구를 위한 양돈산업이냐”는 성토와 함께 공해부과금 부과, 농가 구조조정 같은 강력한 조치의 필요성도 제기됩니다.

예전 제주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재산이자 자원이었던 돼지. 그러나 시대가 흐르고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일부 농가 때문에 돼지는 ‘지하수 파괴의 원흉’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돼지가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인간이 문제지요. 

황금돼지의 해라는 기해년. 복스러운 돼지 미소처럼 도민 모두가 행복하게 지내는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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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8월, 제주시 관음사 입구에서 돼지 80여 마리를 실은 트럭이 넘어져, 돼지와의 추격전이 벌어졌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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