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화시대, 제주 분권을 말하다] ① 제주도민의 ‘자기결정권’ 확보가 먼저

2006년 7월1일. 한국 지방자치사에 한 획을 긋는 신개념의 지방정부가 탄생한다.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함으로써 제주도를 홍콩과 싱가포르에 필적하는 특별한 지역으로 만드는 1막 1장이 시작된 것이다. 타 시도에서는 지방분권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으로 보고, 인구 100만도 안 되는 대한민국의 변방 제주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 특별자치도 출범과 함께 자치 시·군이 사라지면서 일각에서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후퇴한 날로 기억하고 있다. 10년째 행정체제 개편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는 걸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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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7월1일 '분권의 시범도, 지방자치의 시범도'로서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제주특별치도가 출범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특별자치 12년 현주소, “잘된 것도, 딱히 잘 못된 것도 없다” 기대이하 성적표

제주특별자치도 출범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이던 2003년 2월 제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제주를 분권의 시범도, 지방자치의 시범도로 추진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데서 비롯됐다.

2006년 2월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이하 제주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7월1일 ‘제주특별자치도’라는 신개념의 지방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물론 선택은 도민들이 했다. 중앙에서 법률 정비가 이뤄지는 동안 제주에서는 2005년 7월 주민투표를 실시해 기존 4개 자치 시·군을 폐지하고, 법인격 없는 2개의 행정시를 두는 단일광역자치안(혁신안)을 확정했다.

정부는 제주특별자치도 출범과 함께 외교·국방·사법 등 국가존립 사무를 제외한 모든 사무를 제주도에 이양,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가장 큰 변화는 ‘제왕적 도지사’의 출현이었다. 도지사는 행정시장 임명권을 비롯해 제주시-서귀포시 양 행정시의 예산과 인사까지 쥐락펴락 했다. 각종 인허가 권한이 중앙정부로부터 이양되면서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타 광역자치단체장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그로부터 12년. 2019년, 기해년(己亥年)을 맞은 제주의 모습은 어떤가?

‘무늬만 특별자치’, ‘제왕적 도지사’, ‘풀뿌리 민주주의’ 후퇴, ‘난개발’ 등은 특별자치 12년을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다.

무엇보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특별자치도가 목표로 삼은 ‘분권과 지방자치의 시범도’를 역주행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임계치에 도달하지는 않았지만 자치권 부활 요구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여기서 제주도가 지난해 12월 제주도의회에 제출한 ‘제주특별법 제도개선과제(행정시장 직선제)에 대한 동의안’의 제안이유를 살펴보자.

“2006년 7월1일 제주특별자치도 출범하면서 제주는 종전 4개 시․군 행정체제에서 2개의 행정시 체제로 전환돼 지금까지 운영되어오면서 광역자치시스템은 제주의 특수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과거 행정의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요소를 효과적으로 개선했으나, 행정의 민주성․주민참여 약화, 행정서비스의 질 저하 등 예기치 못한 문제점이 대두됐다.”

행정 스스로 △행정의 민주성 약화 △주민참여 약화 △행정서비스의 질 저하를 인정, 행정체제 개편 필요성을 대내외에 천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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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체제 개편 논의가 10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한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 “자치권 부활” 요구 분출…여당 된 더불어민주당, ‘당론’ 모아 책임정치 구현해야!

사실 이 같은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시장직선제’ 공약을 내건 민선 5기 우근민 도정 때까지는 그나마 행정체제 개편 논의가 활발했지만, 이마저 민선 6기 원희룡 도정 출범 이후에는 실종되다시피 했다.

원희룡 도정은 행정시 기능강화에 주력했지만 ‘저비용 고효율’을 내건 행정계층(3단계→2단계) 축소라는 특별자치도 출범 취지에 역행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곤 했다.

시즌2로 접어든 원희룡 도정이 지난해 12월 제주도의회에 제출한 ‘행정시장 직선제’도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장을 직접 뽑는다고 해서 △행정의 민주성 약화 △주민참여 약화 △행정서비스의 질 저하라는 본류를 되돌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선택지를 받아든 제주도의회로서는 고민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주도의회는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더디 가더라도 반드시 결실을 맺어야 한다.

도민사회의 총의를 모아내는 건 이제 오롯이 민의의 전당인 제주도의회의 몫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도의회 다수당이면서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다. 제11대 제주도의회 의석분포상 더불어민주당이 ‘결심’하면 못할 게 없다. 행정체제 개편도 마찬가지다. 특별법 제도개선 동의안 처리에 필요한 의결정족수(2/3)를 확보하고 있다.

제주미래의 중차대한 문제를 ‘43분의 1’, 각자 판단에 맡길 게 아니라 당론을 이끌어내야 한다. 원내지도부가 됐든, 제주도당이 중심이 됐든 당 차원에서 움직여야 한다.

제주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 확보를 위한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행정체제 개편과 관련해 제주도민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기 결정권’을 약속했다. 문재인정부 100대 국정과제에 ‘제주특별법 전면개정(2019년)’이 포함된 이유다.

현재 거론되고 있는 행정체제 개편 대안은 △행정시장 직선제(의회 미구성) △기초자치단체 부활(의회 구성) △읍면동 자치(행정시 폐지) 등 크게 세 갈래다.

문제는 뭘 선택하든, 제주의 운명이 국회 손아귀에 잡혀 있다는 점이다. 현재로서는 행정체제 개편을 위해서는 반드시 법률을 개정해야 해 국회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도민총의를 모아 법률개정안을 마련하더라도 국무회의 의결→국회 제출→국회 소관 상임위원회 회부→소관 상임위원회 제안설명 및 의결→ 법제사법위원회 검토→본회의 상정 및 의결→정부 이송→법률안 공포까지는 곳곳이 다 지뢰밭이다.

6단계 제도개선 과제를 담은 제주특별법 개정안이 지난 2017년 12월 국회에 제출됐지만, 해를 두 번이나 넘기고 있는 상황이 이를 잘 대변한다.

이 때문에 대통령이 공약한 ‘자기결정권’을 확보하기 위한 원 포인트 제주특별법 개정이 오히려 더 시급한 과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 “특별자치 핵심은 자기결정권” 특별법 8조에서 제주형 자치모형 찾자!

결국 제주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건 제주도, 제주도민들의 몫이다. 중앙정부로부터 이양 받은 특례를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의 문제다.

제주도·도민의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제주도 공직자들 중에는 세율조정 특례를 활용해 연간 1000억대의 재정수입원을 찾아내는 ‘저력’을 발휘한 바 있다. 이렇게 숨은 고수들을 찾아내고, 성과를 낸 공무원에게 특별승진 등 과감한 인센티브를 준다면 잠자고 있는 무한 상상력의 DNA를 깨울 수 있다.

해법이 안 보이는 듯한 행정체제 개편 문제도 마찬가지다. 제주특별법 제8조(지방의회 및 집행기관의 구성 특례)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특별법 8조는 “지방자치법의 지방의회와 집행기관에 관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따로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제주도의 지방의회 및 집행기관의 구성을 달리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제주지역 정치환경에 맞는 제도의 선택권을 제주도민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 하지만, 이 규정만으로는 권한 영역이 명확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따라서 ‘~불구하고,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를 ‘~불구하고, 도조례가 정하는 바에 따라’ 정도로 개정(권한이양)하면 특례 활용과 관련해 매번 국회에 목매다는 일은 사라지게 된다.

차제에 행정체제 특례 규정을 신설하는 방안도 모색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위성곤 국회의원(서귀포시)은 “행정체제 개편은 제주도민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전제한 뒤 “도민들이 결정한 행정체제를 중앙의 간섭 없이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제도개선이 필요하다”며 행정체제 특례규정 신설을 제안한 바 있다.

민기 제주대 교수(행정학과)는 “제주특별자치도 출범의 가장 큰 의미는 지방자치의 ‘자기결정권’을 부여했다는 점”이라며 “지방자치 강화를 위해서는 권한이양뿐 아니라 제도 선택 등과 관련된 특례를 운영함에 있어 법률에 규정된 입법결정권을 국회에 두는 것보다 조례로 정할 수 있도록 해 지역주민들의 결정권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도민의 자기결정권 확보를 통해 행정체제 개편에서부터 지방자치단체의 권력구조를 전통적인 기관대립형에서부터 기관통합형(의원내각제), 또는 제3의 형태로 전환하는 등 ‘무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방자치’의 핵심은 자기결정권이다. 제주도민들이 제주특별법에 상상력을 얼마만큼 입히느냐에 따라 제주특별자치도가 힘찬 날갯짓을 시작, 미래 10년을 향해 비상할 수 있다.

당면한 행정체제 개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제주도․도민들의 자치역량이 시험대에 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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