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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단법인 제주장학재단 설립 첫해인 1969년 2학기 제2차 장학금 지급후 촬영한 기념사진. 사진 속 가운데 앉아있는 사람이 故 현오봉 초대 이사장이다. ⓒ제주의소리
[신년 특집] 故현오봉 선생 설립 ‘제주장학재단’ 50돌...1969년 이후 7천여명에 46억 지급 

“돈 없어서 공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없는 살림에 스스로 학비를 벌어 상업학교까지 진학했다. 간절했지만 돈이 없어 꿈꾸던 대학교 문턱은 밟지도 못했다. 그때부터 배움에 대한 목마름은 20대 청년의 한이 됐다.

자신처럼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는 일이 없길 바랐다.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젊은 경영인으로 성장하면서 머릿속에만 있던 ‘사람 키우는 일’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지난 50년 제주 학생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준 초대 제주장학재단 이사장 故 현오봉(1923~1982) 선생의 이야기다. 현재는 차남 현왕수(64) 이사장이 부친의 뜻을 이어 받고 있다.

현 선생은 1923년 서귀포시 성산면 시흥리에서 태어났다. 제주시 북초등학교 졸업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돈을 벌며 학비를 충당했지만 대학 진학은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잠시 경찰 조직에 몸담았다. 1947년 사임 후 상공부 광무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광무국은 석탄 등 귀속광산을 정부로 이관해 관리하는 부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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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재단법인 제주장학재단을 설립한 故 현오봉 초대 이사장(왼쪽). 차남 현왕수(오른쪽) 이사장이 2003년부터 재단을 이끌고 있다. ⓒ제주의소리
현 선생은 이후 대명광업개발(주)에 입사해 당시 정면선 사장의 가르침을 받았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나이 36세였다.

제5대 총선에서 낙선했지만 1963년 제6대에 다시 국회에 입성하며 1979년 제10대까지 내리 5선에 성공했다. 1958년 초선을 포함하면 제주 최초의 6선 국회의원이라는 대기록이었다.

현 선생은 제7대 의원이던 1969년 재단법인 제주장학재단을 설립했다. 1973년에는 재일동포와 인사들이 총 1억원의 기금을 출연해 서울 중구 소공동에 12층짜리 장학회관을 매입했다.

10년 후 강남구 대치동으로 터전(1983년 부지 매입, 1984년 신축)을 옮기면서 기본재산은 15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임대수익이 늘면서 장학금을 받는 제주 출신 학생들의 수도 덩달아 증가했다.

장학재단은 설립 첫해인 1969년부터 장학금을 지급했다. 초대 장학생 중 한명이 제주 출신 대표 언론인인 김수종 전 한국일보 주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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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장학재단이 총 1억원을 출연해 1973년 7월 경매로 사들인 서울시 중구 소공동 12층짜리 제주장학재단 건물(왼쪽). 재개발로 건물이 허물어지자 1983년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부지를 매입하고 1984년 현재의 장학회관을 완공했다. ⓒ제주의소리
한국 민법학의 최고 권위자인 양창수 전 대법관도 1971년 장학생이다. 2014년 퇴임한 양 전 대법관은 제주 최초 대법관이자 현재도 유일한 대법관 타이틀을 갖고 있다.

제주대 사회과학대학장을 지낸 강근형 교수도 1978년 장학금을 받았다. 대법원 부장판사를 지내고 현재 법무법인 이헌의 대표변호사인 김대원 변호사 역시 1985년 장학생이다.

김 변호사의 경우 성적이 뛰어나 서울대 법학과 2학년부터 4학년 졸업 때까지 6학기 내내 장학생 명단에서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장학금은 전체 소득수준 80%이하만 받을 수 있다. 성적은 기본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유지해야 자격이 된다. 관례를 깨고 성적이 다소 낮은 학생에 주는 경우도 있었다.

한 학생의 경우 성적이 떨어지자, 현왕수 이사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이른바 선전 포고(?)를 했다.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사회에 진출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선배들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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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단법인 제주장학재단 설립 이듬해인 1970년 2학기 제4차 장학금 지급 후 촬영한 기념사진. 맨 앞줄 가운데 흰색 양복 차림이 故 현오봉 초대 이사장이다. ⓒ제주의소리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다음 학기 성적이 치솟았다. 군대까지 다녀온 이 학생은 어느덧 취업해 사회인이 됐다. 이후 재단에 전화를 걸어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2018년에는 제주 출신 문건협 변호사 삼남매가 재단을 찾아 기부 의사를 밝혔다. 기금 기부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문 변호사 역시 장학생 출신이다. 그의 누이도 마찬가지다.

장학회관의 공실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손을 먼저 내밀었다. 임대 수익이 줄면 이듬해 장학생 지급 대상이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 변호사의 도움으로 재단은 지난해에도 39명의 대학생에게 6240만원을 전달했다. 반세기 지급한 장학금은 96차례에 걸쳐 46억4600만원에 달한다. 학생수만 7123명에 이른다.

현왕수 이사장은 “아버지는 생전에 '돈이 없어 면학을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며 “제주의 발전을 위해 사람을 키워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현 이사장은 “지난 50년간 장학금을 받은 제주 출신들이 취업 후 세계를 누비고 있다”며 “앞으로 반세기도 재단 설립 취지를 본 받아 사람을 키우는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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