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102) 입고 있는 옷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

* 봥 : 보고서 
* 금세 : 값을 쳐줌, 평함, 평가함

한 사람을 입은 옷 하나 보고 평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실로 놀라운 시각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 옷은 몸에 걸친 한낱 장식(입성)에 불과하다. 물론 품위를 생각하고 단정히 하는 것이 예절이긴 하나, 그게 사람의 인품을 재는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사람의 성품이나 능력, 인격이나 성정(性情)은 마음속에 숨어 있어 입은 옷 따위로는 알 수 없는 법이다. 옷은 겉에 입고 있는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옷이 날개라 말한다. 좋은 옷, 고급스러운 복색을 갖출 수 있다면 오죽 좋으랴만, 그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잖은가. 반드시 좋은 옷, 화려한 의상만 입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가 누더기 같은 남루를 걸치고 다니려 할까. 하지만 돈이 없으면 되는 대로 입고 나설 수밖에 없다. 아무리 총명하고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라도 하릴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러하니 입고 있는 옷을 보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건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귀에 담아 둬도 실제로는 입고 있는 눈부신 옷에 끌리니 문제다. 비록 차림이 허름하더라도 그 사람의 눈빛을 보거나 행동거지의 남다름을 눈여겨볼 수는 없는 걸까.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심안(心眼), 마음의 눈 말이다.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사람에 눈 씌었다가,  나중에 겉만 허울 좋게 꾸민 게 들통 나 움찔 놀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장에 가민 엇인(없는) 놈이 큰 떡 든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옷이 사람을 평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만약, 겉만 보고 사람을 저울질한다면, 반드시 한번쯤 떠올려야 할 말이 있다.

‘빛 좋은 개살구’라~

겉만 번지르르 하고 실속이 없다는 말이다. 바로 번지르르 한 그 행색에 끌려 사람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립하는 말도 있다. ‘뚝배기보다 장맛’. 겉은 보잘것없어도 속이 꽉 차 실속 있고 알차다 함이다.

같은 살구이면서 개살구는 어쩌다 눈에 난 걸까. 개살구는 개살구나무에서 나는 열매인데, 일반 살구보다 맛이 시고 떫다. 게다가 맛없고 그나마 잼이나 즙으로나 먹을 수 있다. 다만 열매 모양은 제법 예뻐 완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말만 앞세우면서 꼴값 못하는 사람을 일컬어 ‘빛 좋은 개살구’라 했으니, 우리 선민들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여간 수준이 아니다. 요즘 같으면 표현기교 또는 수사법이라 해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필수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것인데….

이와 비슷한 말이 있다. ‘소문난 잔치에 먹어 볼 것 없다,’

사자성어도 있다. 

외화내빈(外華內貧), 겉은 화려하나 속은 빈곤하다.

양두구육(羊頭狗肉),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것으로 겉보기만 그럴 듯해 보이고 속은 변변치 않음을 일컫는 말이다.

허장성세(虛張聲勢)도 있다. 실속은 없으면서 큰소리치거나 뒷심도 없으면서 허세를 떤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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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 봥 사름 금세 허지 말라.

한때 사법 권력의 정점에 올랐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지금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 소송 재판거래 등 중대 범죄에 연루된 피의자로 전락했다. 대한민국 3부 요인, 사법부 수장, 법관(法官)이란 수식어는 이제 껍데기, 허울에 불과하다. 

사진은 1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서울중앙지검 소환 직전 서초동 대법원 정문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장면. [편집자]

출처=오마이뉴스.

이 말들을 음미해 보면, ‘옷 봥 사름 금세 허지 말라’는 말을 실감케 된다. 진리가 담긴 말엔 번득이는 지혜가 숨어 있는 법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올곧은 사람, 또 좋은 인연들을 놓치며 사는가. 그게 다 겉만 보고 속을 살피지 못한 탓이다. 사람을 놓치지 말 일이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 됨됨이가 보인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더니
가는 이 오른 이 흙이라 하는고야.
두어라 아는 이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
고시조가 핵심을 짚었지 않은가.

입성을 보고 사람을 평하는 걸 알고, 일부러 옷을 허술하게 하고 나서는 경우가 있다. 옷이 날개라는 점을 역이용하는 행각이다. 물론 어떤 의도에서다. 웬만해선 그렇게 꾸민 복색에 속아 넘어가게 마련이다.

바로 ‘미복(微服)’하는 것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남의 눈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입는 남루한 옷이 미복이다. 그러니까 초라한 행색으로 위장해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것이다.

조선시대 군주들은 평상복 바람으로 무예별감 같은 경호원만 대동한 채 은밀히 궐 밖의 민심을 살피는 ‘미복잠행(微服潛行)’에 종종 나섰다는 기록이 있다. 일종의 백성과의 소통 수단인 셈이다. 여염가를 직접 돌아 고충을 해결해 주거나 국정운영에 반영했다.
  
성종의 경우가 유명하다.
 
임금의 발길이 지난해 복원된 청계천 광교에 이르러, 다리 밑에 커다란 보퉁이 하나를 곁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한 백성을 만났다.

임금이 그에게 물었다. “어디 사는 뉘시기에 거기 그렇게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게요?” 하자, 대답했다. “아주 어질고 착한 임금님을 만난 덕분에 백성들 살아가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임금님께 드리려고 해삼과 전복을 좀 가지고 올라왔는데 어디 뵐 수가 있어야지요. 임금님 사시는 데 좀 가리켜 주세요.” 임금이 감탄했다. 그가 천리 먼 길, 경상도에서 올라온 김희동이라는 숯장수였다. 곧바로 후한 벼슬을 내린 것은 불문가지다.

옷 봥 사름 금세 허지 말라, 언즉시야(言則是也)라. 말인즉 맞는 말이다. 옷 입은 것 하나로 사람을 평하는 것이야말로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소견머리가 없다 해도 이런 속 좁음이 없다. 비단 사람뿐이랴. 무릇 사물에 대한 가치판단은 객관화된 기준을 따라야 하는 법이다. 소홀히 했다 큰 낭패를 부를 것인즉.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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