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E001899283_STD.png

[초점] 횡령 사건으로 본 제주 연극계...'열악한 여건-지급 기준' 간극 메울 현실적 대책 절실 

제주도 유명 극단 대표가 보조금 횡령 혐의로 재판 받은 일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 사안에 대해 지역 연극계에서는 대놓고 얘기할 수 없지만 마냥 나무라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라는 공감대가 높다. 이유는 무엇일까? 연극계 현실과 제한적인 지원 사업 사이의 간극을 꼽는다. 제주도는 현실성 있는 예술 단체 보조금 지원을 위해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 횡령, 그 이면에 자리한 '불편한 현실'

최근 제주도 모 극단 대표와 부인이 나란히 징역 4개월의 선고를 유예받았다. 이들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문화예술위원회(한문위), 제주문화예술재단으로부터 받은 보조금 총 6311만8780원을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횡령은 배우들에게 출연료를 지급한 후 되돌려받는 식으로 이뤄졌다. 이렇게 남긴 금액은 자부담금과 극단 운영비 등으로 썼다.

보조금을 법이 정한 대로 사용하지 않은 행위는 분명 잘못이다. 두 사람 역시 잘못을 반성하고 횡령한 액수 만큼을 한문위에 공탁하면서 선고유예를 받았다. 두 사람이 받은 보조금은 국비(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한문위), 지방비가 함께 투입된 사업비다. 한문위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창작 예술 지원 행정을 총괄·대행하는 기관이다.

한문위가 제시한 보조금 운영관리 규정(제7조 제5항)을 보면 보조금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항목이 명시돼 있다. ▲단체운영 목적의 자산 취득비, 시설비, 수선비, 시설부대비, 전화 설비 등 자본적 경비 ▲단체 대표자의 급여성 인건비, 사업과 무관한 직원의 급여성 인건비 및 단체 운영경비 ▲사업과 무관한 단순 업무추진비 성격의 비용 ▲기타 해당사업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간접경비 등이다.

보조금은 오직 사업 성격에 맞게 사용하도록 정해놓은 것이다. 일례로 이번 사건에서도 등장하는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 사업으로 사용 가능한 경비는 ▲제작비·재료비·출연료·홍보비·사례비·임차료 ▲기획·행정인력 인건비 ▲사무용품 등 소모성 비품 구입비 ▲상주공간 사용료분 공공요금 ▲공연장 관객 안내 등으로 제한한다.

문제는 이런 기준을 정확히 지켜가면서 현실적인 씀씀이를 맞춰가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더욱이 정산 시스템인 ‘e나라도움’은 사용 방법이 불편하기로 예술인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다. 

물론, 국민 혈세인 보조금을 투명하게 사용해야 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어려운 여건을 들어 불법 행위를 정당화해서도 안된다. 모든 극단 대표들이 선의만 가지고 운영한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다만, 예술 단체의 보조금 횡령이 어제 오늘의 아니라는 점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2017년에도 제주도 모 극단이 한문위의 감사에 적발됐는데, 그때도 출연료 되돌려 받기가 드러났다. 왜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될까. 제도가 고단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게 현장의 변명 아닌 변명이다.

제주에서 다른 극단을 운영하는 O씨는 “예를 들어 연습 때마다 단원들 식비 같은 비용은 보조금으로 사용하기 정말 까다롭다. 더욱이 보조금으로 만드는 공연은 대부분 무료 공연이라 부담은 더욱 크다. 제주에서 현실적으로 극단이나 예술 단체를 운영하려면 대표자가 개인 재산이 많거나, 본업이 따로 있어야 하는 게 현실”이라며 “제주에서 활동하는 어느 문화예술단체라도 이번 횡령 사건과 같은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실태를 전했다. 

# 지원 현실화하되 처벌 엄격히 한다면...

연극 뿐만 아니라 제주 예술인들의 창작 여건은 이미 통계로 열악함이 확인됐다. 지난 2015년 제주문화예술재단은 도내 예술인 1050명을 대상으로 성별, 연령대, 소득, 거주 지역 등 다양한 정보를 조사한 바 있다. 응답자 770명 가운데 예술 활동이 주업이라고 대답한 경우는 356명(46.2%)이었다. 주업이 아니라고 응답한 예술가는 414명(53.8%)으로 절반을 넘었다.

주업이라고 밝힌 356명도 월평균 소득이 125만7000원에 그쳤다. 소득이 없다고 밝힌 예술가는 77명(21.6%), 0~100만원도 78명(21.9%)이나 되면서 절반에 가까운 43.5%가 한 달에 100만원도 벌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4년 ‘제주도 문화예술인 복지 증진에 관한 조례’가 제정됐다. 이에 따라 2년 마다 도지사는 문화예술인복지증진계획을 수립·시행해야 하지만 피부에 와 닫는 변화는 없다. 열악한 운영 여건→지원 사업 선정→보조금 문제가 반복되면서 더욱 행정 지원에 의존하고 창작 예술의 질은 나아지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는 형국이다. 그래서 극단마다 후원자를 모집하면서 관객들을 끌어 모으려 애를 쓰고 있다. 

이번 사건을 지켜본 지역 연극인들은 극단 운영비 정도는 현실적으로 보전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연극인 K씨는 “관람료로 충당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이겠지만 지금 제주 연극판에서는 꿈 같은 이야기다. 관객이 만족하는 공연을 선사하기 위한 각자의 치열한 노력은 당연하겠지만, 연극인으로 살 수 있는 기본은 있어야 하지 않냐”며 “국비가 투입되는 지원 사업은 정부 차원에서 풀어야 해서 당장 시행하기 어렵더라도, 지방비 사업부터라도 특례 조항을 둬서 숨통을 트이게 하자”고 제안했다.

제주연극협회 관계자 L씨는 “제주도내 연극 공간 대부분이 임대로 운영하는데, 이런저런 비용을 다 감안하면 극단 대표는 재력가가 아니고선 힘들다”며 “제도적으로 적정한 선에서 운영비를 지원하되 더욱 엄격한 처벌 규정을 둔다면 오히려 투명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해당 사안은 이미 제주도와 연극인 간의 만남에서 여러 차례 거론된 바 있다. 제주도 역시 문제 제기에 공감하면서 현실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는 입장이다.

제주도 문화정책과 관계자는 "관건은 극단 대표의 역할이다. 그들의 역할을 어디까지 인정해 비용으로 지급할지, 방법을 찾아 올해 상반기 내로 보다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