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갈이 찢겨지는 사회

“사악한 사람은 음모를 꾸미지만 선량한 사람은 계획을 세운다. 사악한 사람은 증오에 찬 추악한 말을 외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비판을 조용히 속으로 삭인다”.
50-60년대 미국의 인권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남긴 말이다.

저주와 욕설이 이성과 합리를 압도하는 최근의 사회적 갈등 구조속에 새삼 가슴을 치는 잠언(箴言)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갈갈이 찢겨지고 있다. “너는 죽고 나만 살자”는 저급하고 용열한 공격만이 난무하고 있다.
증오에 찬 추악한 언어들이 날뛰고 있다. 남을 죽이기 위한 사악한 음모가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돋아나고 있다.
아우르는 포용력은 보이지 않는다. 독선과 분열만이 있을 뿐이다.

정부와 신문, 여당과 야당, 신문과 방송, 신문과 신문이 서로를 할퀴고 상처를 주기에 여념이 없다.
여기에다 지식인은 지식인 끼리, 시민단체는 또 그들 끼리, 독사의 날름거리는 혀처럼 상대방에게 독을 뿜어내고 있다.
어디 이 뿐인가. 남남(南南)갈등·노사갈등·보혁갈등 등 ‘갈등의 가마솥’이 죽 끓듯 끓고 있다. “진보다”, “보수다”하며 이념적 색깔 논쟁까지 가세해 무한 갈등의 양극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진흙탕 싸움이다.
“ 해방공간에서의 좌·우익 대립보다 더 치열하고 더 살벌한 분위기”라는 우려가 나온지는 이미 오래다.

비판 수용못하는 옹고집

그렇다면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한마디로 원인을 찾자면 정치권의 욕심 때문이다.
정치(政治)를 정의롭게 다스리는 정치(正治)에서 찾지 않고 상대를 정복하고 군림하는 정치(征治)로 착각하는 정치권의 권력욕심 때문이다.
여기서는 상생(相生)을 기대할 수가 없다. 상극(相剋)의 용광로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다 옹졸한 고집에 사로잡힌 정권의 편가르기식 ‘코드 의식’과 ‘아마추어리즘’도 한 몫이다.
귀를 열어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고 비판을 오히려 타도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속좁은 정권운용도 갈등과 불신의 씨앗이다.
물론 탈권위주의와 분권을 통한 사회적 균형발전등 정치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대적 불가피성으로 이해 할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의 국가적 갈등과 분열과 불신을 참여정부 6개월의 과도기적 현상으로만 정리하기에는 뭔가 찜찜한 느낌을 저버릴수는 없다.
음악이 청중을 감동시키고 연극이 관중을 감화 시키듯 정치도 국민을 감동시켜야 한다. 그것이 정치의 본령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감동 정치’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그 분위기 마저도 느끼지 못한다.
이미 공자는 말하지 않았던가. “국가는 지배자들의 쾌락이 아니라 백성들의 행복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그렇다. 감동의 정치는 권력의 욕심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권력욕을 버리는 정치적 봉사가 감동정치의 출발이다. 그런데도 여든 야든, 우리의 정치권은 국민에 대한 봉사보다는 권력만을 좇는 ‘무한 욕망의 덫’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권력 욕심이 나라 결딴

권력의 단물만을 탐닉하는 ‘욕망의 덫’은 결국은 ‘죽음의 덫’이나 다름없다.
지금 나라가 이분법적 양극화 현상으로 치닫고 있는 이유도 정치권이 ‘욕망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권 여당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른 채 내년 총선만을 겨냥한 신당 싸움으로 난장판이 된지 오래다.
야당은 또 어떤가. 다수당으로서 국가 위기극복의 처방제시 보다는 상대방 약점만 물고 늘어져 딴죽 걸기에 여념이 없다.
여기에다 세속에 굴종하고 야합을 통해 권력과 상종하려는 온갖 어둠의 세력들의 음험한 음모가 계속되고 있다. 결국 불쌍한 백성들만 등터지고 허리가 휘어질 뿐이다.
‘욕망의 덫’은 인도의 ‘원숭이 덫’에서 출발한다. 원숭이의 욕심과 집착을 이용하여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그것이다.
숲속에 조그만 구멍을 만들어 놓고 향긋한 과일 한 알을 넣어둔다. 원숭이 손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다.
과일 냄새를 맡은 원숭이가 구멍에 손을 넣어 과일을 잡고 손을 빼내려 용을 쓰지만 어림없다. 과일의 부피만큼 손이 커져 구멍에서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일을 버리면 될 터인데
녀석은 과일에만 집착한다. 그것만을 욕심내다가 결국은 잡히게 마련이다.
권력의 열매를 탐하는 정치권의 욕망도 마찬가지다. 한 옴큼 권력만을 좇다가 그것이 잡혀죽는 덫이 될 수있다.
문제는 탐욕의 권력이나 정치권만 죽는게 아니고 그들 때문에 나라전체가 결딴나는데 심각성이 있다. 죄없는 백성이 함께 죽어나는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모두가 한줌의 욕심을 버리고 구멍에서 손을 빼내야 한다. 그래야 함께 살수가 있다.
‘노무현 참여 정부’가 출범한지 6개월. 이제 수습은 끝났다. 그렇다면 실망을 넘어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감동의 정치’로 나가야 할 때다. 절망을 안겨줘선 안된다. 110 볼트든, 220 볼트든, ‘나의 코드’보다는 ‘국민의 코드’에 맞는 정치를 해야 한다.
<김덕남 대기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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