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농민'의 '농심'뿐만 아니라 모든이의 심금을 울리는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 중심의 줄세우기 WTO를 항거하다가 자신의 몸을 던진 이경해 선생의 죽음이다.

'농사'가 뭔지를 학문으로 깨닫고 몸소 실천해온 그이가 '절망'의 대해에 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처절한 현실이다.

내가 약간 철들기 시작할 무렵, 초등학교 입학식 기념으로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기가 막힌 선물하나가 있었다.

대장간(불메왕)에서 내 고사리 손에 딱 알맞게 마춤한 아주 귀여운 '골겡이'였으니...

이제부터 '너는 어머니와 함께 보리 검질 메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라는 엄명이었다.

그 '엄명'을 한 번도 거스르지 못하고 중학교 2학년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보리, 조, 감저 밭 검질을 꼬박 메었다. 학교 안가는 공휴일이나 방학때는 폭풍이 불거나 비오는 날을 제외하곤 꼬박 농사일을 도왔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봄, 할아버지는 나에게 아주 큰 선물을 주셨다. 7순이 가까워진 할아버지는 더 이상 쟁기를 몰고 밭을 가는 일을 할 수 없다면서 나에게 황소 한마리와 '구루마' 그리고 쟁기 한대를 주셨다. 나는 속으로는 동네 형들이 즐겨 타는 자전거 한대를 간절히 원했었는데.

중 2 때부터 고 3 겨울방학 직전까지 쟁기로 밭을 갈고 우마차로 농산물을 거둬들이고 공판장에 실어다 파는 일은 내 몫이었다.

할아버지의 소망은 내가 장차 이 세상에 '살아남는 방편'으로 철저한 농부를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할아버지의 소박한 소망을 거역하고 '선생'이 되기를 선택하게 되는 커다란 몇가지 동기가 있었다.

맥주보리나 유채 또는 고구마가 당시에 '환금작물'로 주종을 이루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돈'으로 환산되었을 때 그 가치는 우리 식구들의 노력에 비하면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었다.

어떤 시기에는 태풍이나 가뭄 등으로 인해서 소출이 전무하다시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번 교육 공무원이 되면 정년퇴직하기 전까지는 흉년이나 풍년이란 것이 없이 꾸준한 소득을 볼 수가 있다고 판단하였었다.

할아버지는 농꾼이길 거역하는 손자에게 그래도 농사는 배워둬야 한다면서 끝내 마스터하도록 하셨다.

나는 '선생'이 되고팠는데 나의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모든 것들을 접고 농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니 옛날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새삼스러워진다.

나는 한 달여전에 메릴랜드에 농장을 마련했다. 하긴 농사짓는 것은 뒷전이다. 오래전부터 꿈꾸어 오던 것은 메릴랜드에 연구소를 하나 마련하는 일이다. 지금은 내가 진입하려는 곳까지는 약 2시간 떨어진 거리라서 상당히 불편하긴 하지만, 한 시간대 이내로 좁혀 들어갈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큰 딸이 이제 성장하여 건축설계사가 되어서 독자적으로 사업을 전개해 나가는 일차 과제로 나의 집을 지어주겠다고 나섰다. 연구를 하다보니 자기 엄마집을 지어준 사람이 의외로 성공을 하는 케이스가 더러 있더라나...

할아버지가 평생 소원하던 사업을 이어받고 줄기차게도 투쟁하여 왔다. 좀더 증거 자료들을 모으고 책으로 펴내는 일과 또 세계 널리 알려야 하는 일이 내게 주어졌다. 물론 열심히 농사도 지어야 한다. 자금이 필요하니까.

메릴랜드 미국 정부문서 보존소에 연구차 오려는 후학들에게 편의제공도 해야 할 터이고...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도 부탁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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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해 선생의 명복을 빌며 또 유가족에게는 심심한 조의를 드리며...올해에도 천재지변으로 농사를 그르친 농심을 또한 위로하며...
<이도영의 뉴욕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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