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나의 열여덟일기④]그대, 두려워하지말지어다[Delhi-②]
"자미마스지드 사원내 탑 입장불가는 인도에서 겪은 성차별의 시작"

▲ 자미마스지드 사원 전경. 사원 정문에서 입장할 때 카메라를 소지하면 촬영비로 200루피를 내야했기 때문에 빡빡한 경비에 여유가 없어 휴대폰 카메라로 몰래 사원을 촬영했다.

아직도 아침에 눈을 뜨면, 1월 1일의 내가 생각난다. 2007년의 첫날. 그리고 본격적인 인도여행의 시작. 돈과 여권이 든 힙쌕을 품에 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샌 그 차갑던 새벽이.

누가 인도를 더운 나라라 했던가. 물론 남인도쪽으로 내려가서는 그 말에 뼈저리게 긍정했지만 아직 나는 북인도에 있었다. 북인도의 겨울은 상당히 춥다. 동절기가 짧기 때문에 난방시설을 갖춰두지 않은 탓이다.

김 로마나는...

   
 
 
김 로마나(18) 양은 고교1학년 때인 지난해 학교를 자퇴하고 부모님 밑에서 홈 스쿨링(home scooling)으로 검정고시와 대학진학을 준비하고 있는 이 시대 청소년이다.

지난해 12월31일 홀연히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지난 2월1일 귀국할 때까지 약 한 달여간 인도의 구석구석을 훑고 돌아왔다. 겨울방학(?) 기간을 활용해 늘 꿈꿔왔던 인도로의 여행이었다.

서귀포가 고향인 섬소녀의 눈에 비친 인도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로마나와 함께 간디의 나라 인도로 떠나보기로 한다. <편집자>

무지막지한 부피를 감수하고 겨울용 오리털 침낭을 챙겨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몸에서 나는 소리가 ‘삐걱삐걱’을 넘어서서 ‘우득우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잘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허리를 직각으로 숙여야 될 만큼 낮은 세면대에 고개를 파묻고 고양이 세수를 했다. 뼛속까지 파고 들어올 것 같은 냉기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편안한 일상의 때를 다 지우지 못한 탓일까.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따뜻한 물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난방시설조차 되어있지 않은 인도에서 더운물 세안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사실 외출은 추위가 좀 가셨을 때에 하려고 했었지만 그러려면 한낮이 되어도 모자랄 듯 한 느낌이 들어서 꽁꽁 언 몸 그대로 방을 나섰다.

공사 중인 듯 잔뜩 어질러진 복도를 지나고, 가파른 계단을 지나 아눕의 문 앞에 도착했다. 아직 가시지 않은 두려움과 밤을 지샌 후의 피로감, 추워서 꽁꽁 언 몸 탓에 그 부실한 문 하나를 밀어젖히는 게 그렇게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내가 아눕의 문을 여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문을 연 것이 아니라, 다른 여행자가 연 문으로 내가 나갔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문을 나선 이후는 쉬웠다. 갓 문을 나선 내게 수없이 쏟아지는 “Happy new year!!!”라는 인사에 정신없이 답해주다 보니 나는 이미 바자르의 먹자골목에 들어서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밝아서였을까, 조금 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니 간밤의 소음도 새해맞이의 즐거움을 나누는 사람들의 기쁨어린 소리였다고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신정이 굉장히 조용히 지나가는 편이다 보니 다른 나라는 다를 것이란 생각을 못했던 건 분명 나의 실수였다.

거리는 간밤과 다름없이 새해맞이로 정신없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뜬눈으로 지새웠던 밤과는 달리 여유 있게 신년맞이의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인가?' 라는 생각을 하고 슬며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만큼의 여유도 생겼다.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나서는 모든 게 신기할 뿐이었다.

기왕 바자르에 들어 선 김에 군것질이나 실컷 하자는 생각으로 시도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해 보이는 군것질거리를 물색했다. 그러던 중 공갈빵처럼 생겨서 기름에 노릇노릇 튀겨지고 있는 과자. '또띠'와 '쩌리'의 중간 발음쯤 되는 '그 씨'가 눈에 확 하고 들어와 박혔다.

저 정도면 도전해 볼 수 있겠다 싶어 주인에게 짧은 영어로 이게 뭐냐 물으니 예의 그 기묘한 억양으로 또띠인지 쩌리인지 구분이 안가는 '그 씨' 란다. 값은 5루피.

가이드북에서는 무조건 깎으라고 적혀 있기에 일단 '멩가 헤~' 부터 외치고 봤다. 그때 그 아저씨의 표정을 사진으로 찍어뒀어야 했다. 얼마나 날 한심하게 보는지. 새해 첫 장사라서 절대 깎아줄 수 없단다.

별 수 있는가? 그냥 5루피를 내고 하나 달라 했더니 아직 다 안됐단다. 한참을 기다리래서 결국 그 자리에서 10분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귀하신 '그 씨'를 손에 받아 볼 수 있었다.

바나나 잎사귀를 겹치고 자르고 해서 만든 동그란 일회용 접시에 예의 그 또띠인지 쩌리인지 모를 그 씨를 얹고, 그 위에 시뻘건 스위트소스를 끼얹어주더라.

먹어보니 기름 탕에서 십 수분을 뒹군 그대로의 느끼함에 소위 말하는 '들크렁함' 과 시큼함이 기묘하게 섞인 맛이었다. 빈말로라도 맛있다고는 못 할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먹다보니 그렇게 못 먹을 것도 아니더라. 그 묘한 중독성이란.

나중엔 자꾸자꾸 더 먹고 싶어지는 걸 인도의 커리에 대한 집착으로 이겨내고 식당 '말호트라'로 걸음을 옮겼다. 선배 배낭여행자들이 극찬한 그 곳. 같은 이름의 식당 두 곳이 나란히 있기에 한참을 고민하다 오른쪽으로 들어섰다.

왼쪽보다는 더 어두침침하고 깔끔하지 못해보였지만 그래도 인도인 몇몇이 보이는 게 '인도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게 마음에 들어서였다.

치킨커리 하나와 버터 난, 갈릭 난을 각각 한 장씩시키고 가이드북을 팔랑팔랑 넘겼다. '오늘은 어딜 갈까, 뭘 보고 배울까.' 지난 밤 너무나 큰 충격에 잠시 잊었던 반가움과 설렘이 되살아났다.

▲ 치킨커리

가이드북의 숱한 명소 중 내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델리박물관. 하지만 1월 1일이라 쉰단다. 잔뜩 짜증이 나서 툴툴거리려 할 때 주문했던 치킨커리와 난 두 가지가 나왔다.

냄새도 좋고, 색깔도 좋고, 두근두근하는 마음까지 먹을 준비 완료. 난을 뜯어서 커리를 얹고, 짐짓 능숙한 척 한입에 넣어보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한 달이나 머무를 테니 슬슬 익숙해지겠지. 하고 마음을 느긋하게 먹었다.

슬슬 배도 차고, 기분도 풀리자 1차 순위였던 델리박물관 대신 건축 광 샤자한의 최후걸작품이라 불리는 자미마스지드로 눈을 돌릴 기분이 들었다. 메인바자르를 빠져나와 뉴 델리 역 도착. 길게 한 줄로 늘어서있는 오토릭샤에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저렴한 싸이클릭샤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먼 거리라서 별 수 없이 60루피에 계약하고 자미마스지드로 출발. 그저 길거리일 뿐인데도 매 순간순간이 대단한 사진작품처럼 눈에 들어와 박혔다. 그래서였는지 20분여의 시간도 그저 짧게만 느껴졌었던 같다.

입장료가 무료여서 부담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사진기를 반입하려면 200루피의 추가금액을 내야 한단다. 가뜩이나 돈을 적게 가져가서 빠듯한데, 카메라 값으로 200루피나 지출하기는 무리라고 판단. 카메라를 맡겨두고 사원 안에 들어섰다.

웅장함. 그리고 신을 향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겸허함. 기도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길게 엎드려 있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물론 기도하는 사람들보다는 ‘원 달러!’를 외치는 박씨시(인도에서는 거지들을 '적선'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 박씨시로 부른다)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겠다.

박씨시를 두려워하며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 했던 김로마나에 대한 사실도 부인하지 않겠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지만, 정말로 별 수 없었다. 나는 인도에 도착한 지 갓 열두 시간 정도가 지난 초보여행자였으니까.

자미마스지드는 시끄러운 만큼 웅장했다. 어찌나 거대한지, 걸어서 한 바퀴를 도는데도 십여 분이 걸리는 넓이였다.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은 게 후회가 될 정도로. 그 순간 머리를 스친 것은 휴대폰카메라였다. 못된 꾀지만, 빈곤한 나로서는 알라신의 자비를 바라며 휴대폰으로나마 자미마스지드의 웅장함을 담아낼 밖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미마스지드의 전경을 휴대폰에 담고, 미나르로 향했다. 올라 볼 수 있겠냐 물으니 여자라서 안 되겠단다. 화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거기서 소란을 피울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사원을 빠져나왔다.

아직도 생각하면 화가 난다. 여자가 올라간다 해서 탑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이 일이 인도를 여행하는 내내 겪은 ‘성차별’에 대한 불쾌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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