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의 꽃' 즈려 밟고 가옵소서"

"하루만 더 살았어도 가슴에 박힌 못은 빼고 갈 것인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12일 별세한 제주타임스 상임논설위원인 김규필씨(63)가 타계한 지 하루가 지난 13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선정돼 가족들은 물론 그를 사랑해 온 많은 지인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40년 가까이 외길 언론인생을 걸어 온 김규필 제주타임스 상임논설위원이 향년 63세의 나이에 숙환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12일 오후3시.

평상시 활발한 성격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활발한 언론 활동을 펼쳤던 고 김규필 논설위원의 타계사실이 알려지면서 13일 오전부터 그의 빈소가 마련된 제주대학병원 영안실에는 제주지역 언론계 선후배들과 정관계인사들, 그리고 그를 평소부터 알아왔던 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이날 오후 6시께 김규필 논설위원이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빈소는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또 한번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하루만 더 살고 갔어도 마음에 품은 한을 훨훨 털고 갈 것을..."이라는 탄식과 회한이 빈소를 가득 메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고 김규필 논설위원이 1980년 당시 제주도기자협회장을 맡아 언론민주화 운동을 주도해 오다 강제해직 당한 고초가 이날, 그것도 그가 이승을 떠난 바로 다음날 정부에 의해 마침내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됐기 때문이다.

고인은 1980년 5월 제주신문 정치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당시 후배들이 주축이 됐던 기자협회 제주신문 분회의 자유언론실천 성명을 사실상 주도하면서 언론민주화운동을 주도해 왔다.

이 때 고인은 동료 기자였던 강병희 사회부장대우(현 제주일보 사장), 김영훈 체육부차장(현 제주도의회 의장), 송상일 편집부장(현 한라일보 논설위원) 등 30여명의 기자가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갖고 "우리는 유신체제를 사상 최악의 국민탄압의 사례로 규정하고 그 동안 보도가 봉쇄당한 모든 사실을 세상에 밝혀 역사적 기록으로 남긴다"는 내용의 '자유언론실천결의문'를 발표했다.

그러나 고인의 이 같은 언론민주화운동의 의지는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하루만에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신군부에 의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1차로 강병희 부장과 김영훈 차장이 신군부의 실세였던 보안사에 의해 해직됐고 김규필 논설위원은 보안사에 끌려가 숱한 고초를 겪은 끝에 8월 13일 김지훈 편집국장(전 제민일보 대표)와 함께 강제 해직됐다.

다른 해직언론인과 마찬가지로 고인은 이때부터 다시 복직되던 1989년까지 9년동안 해직언론인으로서 참기 힘든 생활을 해왔다.

고인의 미망인인 고화자씨(62)는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겠다던 그는 강제해직 당한 이후 큰 충격을 받았으며, 아마 그때 가슴에 묻힌 한으로 화병이 도져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게 된 것 같다"며 "그 양반은 해직당시에도 '언젠가는 반드시 언론계에 복귀할 것'이라는 꿈을 불태우며 버텨왔다"고 암울했던 9년의 세월을 회상했다.

고씨는 "뭐가 그리도 급한지 하루만 더 살았어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선정된 것을 알고 갈 것인데...몹쓸 양반...."이라며 회한의 눈물을 훔쳤다.

고인과 함께 했던 언론인들도 민주화운동자 관련자 선정사실을 크게 반기면서도 "너무나 안타깝다"며 탄식했다.

송상일 한라일보 논설위원은 "고인은 한마디로 몸을 아끼지 않는 정열적인 언론인이었다"면서 "현장에서 취재하고 신문을 제작하는데 몸을 아끼지 않는 그의 기자정신은 후배 기자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고 있다"고 회상했다.

그의 선배기자 였던 김지훈 전 제민일보 대표는 "고인은 마당발이었다. 기자로서 할 일이 있다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기자협회장을 맡아 언론민주화 운동을 이끈 것도 바로 물러설 줄 모르는 열정 때문이었다"면서 "그의 활동이 지금에야 정부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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