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합장 유골 발굴, 뒷 이야기

"1949년 민보단(경찰 하부조직)이 들 것으로 강제 매장해서 접근조차 못했다."

1949년 1월(1948년 음력 12월 12일) 의귀리에서 학살이 있고 난 뒤, 땅 속에 묻힌 이들. 그리고 그 아픔을 간직한 양봉천(남원읍 의귀리) 현의합장묘 4.3유족회 대표가 건낸 말이다.

발굴된 유해들은 발굴 유해들은 39구. 원통한 사연을 간직한 채 강제 매장된 55년 만에 후손들에 의해 양지바른 곳에 비로소 묻히게 된 것.

확인된 유해는 남자가 15구, 여자 7구, 청소년 2구며 나머지 청소년 유해 등 15구는 부패가 심해 전문가들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여기에 4.3당시 비녀, 안경알, 허리띠 등 50여점의 유물들도 같이 나왔다.

"비참하게 매장됐다. 이리 저리 뒹구는 유해들을 보며 눈물이 흘렀다."

양 대표는 뼈들을 보아 시신들이 옆으로 눕고 꾸부리고 해서 파묻었을 것이라고 증언하며 처참한 발굴 현장의 모습을 그려냈다.

유족들은 1983년 현의합장묘를 마련하기 전까지만 해도 '3개 무덤에 묻힌 조상들의 후손'이라 해 '삼묘동친회'가 꾸려지고 제를 드렸었다.

양봉천 대표는 "4.3에 대해 말하기 힘든 83년 당시만 하더라도 이장은 생각하기 힘들었다"며 이장 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고운희(남원읍 의귀리,83세)할머니는 4.3당시를 회고하며 "학교서 군인들이 죽이고 관서에서 경찰들이 죽이고 처참했다", "시신들을 거둬야하는데 죽이겠다며 찾아가지 못하게 막았다"고 말했다.

"원통하다. 살려고 아둥바둥하던 죄없는 작은 시아버지까지 죽이고...", 당시 29세였다는 고운희 할머니는 그동안 속앓이 했던 세월을 절절히 토로해 냈다.

"어느날 개들이 무엇인가 물고 있는 걸 봤다. 자세히 보니 뼈들이었다. 너무 기가막히고 슬펐다"

김홍석(67)씨 "그 땐 11살 소년이었다. 만삭인 어머니가 '아방 이신디로 돌으라'(아버지 계신데로 뛰어 도망가라)고 외쳤다" 토벌대가 되려 마을 주민에게 총들 겨누있을 때 어머니의 외침을 아직도 기억하는 김홍석 씨는 "좀 있다 총소리가 났고...".

토벌이 본격화되는 5.10총선거 이후 의귀 초등학교에 제9연대 소속 군인 2중대가 주둔했다.
1949년 1월 10일과 12일에 이틀에 걸쳐 이들은 토벌 작전 정보를 '무장대'에게 제공했다고 주민들을 몰아붙이며 주민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정작 군인과 경찰에게 당한 사람들은 해안가로 내려갈 사람들.
"남원으로 데려다 준다며 사람들을 모으고 다 죽인거야" 고 할머니의 말이다.

아! 여기에 의로운 영혼들이 고이 잠드시도다. 삼십 팔년 간에 걸친 일제 통치의 질곡 속에서 해방된 조국산천, 그러나 사상 대립과 좌우충돌로 빚어지는 갖가지 비극들. 1948년 4월 3일 4 ·3사건은 본도 전역을 휩쓸었고, 이 처참한 와중에서도 일편단심 조상 전래의 고장을 지키다 산화하신 아, 갸륵하신 그대 이름들이여! - 현의합장묘 비문.

현의합장묘 비문에 적힌 '처참한 갸륵한 이름들'은 이제 20일 오전 10시 후손들의 눈물을 뿌리며 고장 남원의 공동묘지에 하관된다.

한편 4.3 관련 집단 학살 매장에 실체를 드러낸 16일 발굴은 현의합장 4.3유족회(회장 양봉천)가 제주4.3연구소, 제주대 의대 강현욱(법의학)박사팀이 힘을 모아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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