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송두율 교수 6촌 동생 송창헌씨

"지난 37년 나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1998년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비서가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는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다"라고 밝히던 그 날 송창헌씨(54 제주시 화북동)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아니 참을 수 있는 순간의 아픔은 비교할 바가 안됐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멈춰버렸고 그의 머리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혼돈이자 공허함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 충격보다는 못했다.

중학교 시절 책꽂이에 꽂혀있는 자신의 철학책을 보고는 "너 이게 이해가 되느냐"고 웃음을 지어 보였던 두율이 형....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떠난 후 자신에게 엽서를 보내며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해줬던 두율이 형이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니...

독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혔던 것은 시대의 어쩔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런데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면 그야말로 우리가 적으로 알고 있는 공산당이 아닌가...

송창헌씨는 지난 10여년을, 아니 6촌형인 두율이 형이 독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반체제인사로 정부로부터 낙인찍혀 귀국이 불허된 지난 37년의 세월을 가슴을 쓸어 내리고 또 쓸어 내리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그 두율이 형이 이제 며칠만 있으면 한국에 온다. 아니 증조부가 묻혀있는 그의 고향인 제주에 온다고 한다.

오는 22일 귀국 예정으로 있는 제주출신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59)는 재미학자 이도영 박사를 통해 지난달 31일 '제주의 소리'에 이메일을 보내 "제주에는 6촌 형제인 송두영이가 살고 있다."고 전해왔다.

그 후 '제주출신 민주인사 송두율 교수 조건 없는 입국·귀향 추진위(준)'과 '제주의 소리'가 송두영씨를 찾아 나선지 보름여만인 18일 송두영씨(호적이름으로는 송창헌씨)를 만날 수 있었다. 또 송 교수의 10촌 형인 송두정씨(75 제주시 도두동)도 만났다.

"너무나 흥분돼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무조건 빨리 만나고 싶을 뿐이다"

'제주의 소리'가 이날 그를 찾았을 때 그의 얼굴에는 지난 37년의 회한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너무 어렸을 적에 두율이 형을 만나 많은 기억은 없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형님으로부터 두율이 형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죠. 두율이 형에 대한 기억은 내가 중학교 다닐 때로 생각됩니다. 내 책꽂이에 철학책이 꽂혀 있었는데 형이 그것을 보고는 '너 이거 이해가 되느냐'며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 독일유학 가서는 내게 한 차례 엽서를 보내왔었습니다."

"두율이 형이 독일에 가고 내가 성장한 후 서울만 가면 삼촌(송 교수의 부친인 고 송계범 교수)댁에 가서 잠을 잤습니다. 두율이 형 형제인 사촌형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요. 삼촌은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제주에 와서는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두율이 형과는 많은 만남은 없었으나 항상 가까이 있는 형이었습니다"

"그 동안 마음 고생이 심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얼굴이 상기되면서 잠시 천장을 바라봤다.

"다 지나간 세월입니다. 돌아가신 형님은 삼촌과 두율이 형을 천재라고 항상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노동당 간부라니, 이 말을 누구한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동안 솔직히 두율이 형 이야기는 숨죽여 살아왔습니다. 동생인 저로서는 정말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군부독재 시절 송 교수에 대한 빨간색 덧씌우기에 대한 두려움은 6촌 동생인 창헌씨 뿐만 아니라 도두리에서 만난 송 교수의 10촌 형인 송두정씨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고희를 훌쩍 넘긴 송두정씨는 "제주에 들어 올 수 있다면 잘된 일이다. 잘됐다"며 말을 아끼는 모습이 역력했다. 지나간 세월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지난 37년 창헌씨와 두정씨가 이렇게 살아왔으니 그 당사자인 송 교수는 어떠했을까.

창헌씨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건너 방에서 그간 자신이 모아왔던 송 교수에 대한 자료를 꺼내왔다.

송 교수가 쓴 책이며, 언론에서 보도한 내용, 그리고 방송에 나왔던 6촌형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가 쏟아져 나왔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형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머리가 곤두섰습니다. 혹시나 오늘은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그 동안 몇 차례 형이 귀국한다는 이야기가 있다가는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될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형에 대한 그리움이자 '정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노동당 정치위원 후보가 아니다'라는 강한 확신이기도 했다.

그는 기자와의 대화 내내 "정말 이번에는 올 수 있는 거냐"고 물어왔다. 그동안 한국의 뒤틀린 역사는 그에게도 그렇게 미덥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오늘 아침에 일본에 계신 두율이 형 작은 어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형의 제주방문이 확정된다면 형을 만나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형이 온다면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고향도두에도 가고, 해안동에 있는 조부와 친지들의 묘도 찾아가 인사드려야죠."

창헌씨와 이야기를 끝나고 차에 오르는 순간 "법무부는 송두율 교수에 대한 입국을 허용하기로 했습니다."라는 방송이 들려왔다.

그 순간 창헌씨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떠올랐다.
"이제는 우리 집 애들에게 삼촌은 위대한 학자라고 자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쁩니다."라며 웃음을 지어 보였던 그의 얼굴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지난 37년의 역사는 삼촌에 대해 조카들에게 말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던 비극의 역사이자 굴종된 역사의 연속이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좁게는 창헌 두정씨네와의 만남을, 그리고 지난 37년간 경계인으로 살아왔던 송두율 교수의 자유로움을, 아니 독재의 그늘아래 뒤틀려왔던 우리 역사의 새로움을 만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22일 그 만남을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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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후기
- 송창헌.두정씨에 대한 취재는 송두정씨는 18일 오후4시,그리고 송창헌씨는 오후6시에 이뤄졌다. 그리고 창헌씨에 대한 취재가 끝난 후 법무부는 송 교수에 대한 입국허용을 발표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국가정보원이 송 교수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와 송 교수 두 형제에 대한 기사작성을 끝내 놓고 올려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19일 송 교수께서 귀국하겠다는 뜻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밝혀옴에 따라 18일 취재.작성한 기사를 그대로 올린다. 몇시간 사이에 벌어진 긴박한 순간을 담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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