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0만명 중 제주사람만 10만

1910년 8월 10일. 일제가 우리나라(조선)를 강제로 병탄(倂呑)시킨 경술국치(庚戌國恥) 100년을 맞게 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은 한반도를 36년간 강제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60년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근본적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과거 100년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또 강제병판은 제주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재일동포입니다. 60만명 중 10만명이 제주인인 재일동포는 제주현대사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일본에서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제주사람들의 문제를 꾸준히 연구해 온 신재경 (京都 創成大學)교수가 <제주의소리>는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바랍니다. 


우리 한국사람에게 일본이란 어떤 나라일까? 우리 제주도사람에게 일본이란 어떤 나라일까?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이란 표현이 있다.

"일본"

학교 역사시간 속에도, 어제를 산 우리 부모님의 세대에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준 나라이고, 내일을 살아갈 우리 다음세대에도 큰 영향을 줄 것임에 틀림없다. 도대체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일까?

"재일동포"

일본에는 재일동포라고 불리는 우리 한국사람 약60만명이 살고 있다. 우리와 같은 한국사람이면서 그들은 왜 일본이란 외국에 살고 있을까? 또 그들은 왜 일본에서 태어나아만 했고, 우리와 다른 운명을 살고 있을까? 그들은 또 그들의 부모는 무엇이 다른 사람이기에 우리와 같은 길이 아닌 재일동포라는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 재일동포의 상처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권희로(權禧老, 1928~2010.3.26). 1968년 야쿠자의 "조센진, 더러운 돼지새끼"라는 말에 격분해 이들을 살해하고 경찰과 대치하다 검거됐다. 그는 이때 "경찰관의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TV를 통해 경찰의 사과를 받아내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일화는 '분노는 폭포처럼'이라는 책으로 국내에 소개되었고, 1990년대 초에는 영화 《김의 전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국사람이면서 일본에서 살고 태어나 다른 운명을 살고 있는 재일동포

제주도와 일본은 또 다른 특별한 사연이 있다. 제주도 인구 55만명,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 60만명중 제주도가 본적인 사람은 약10만명이 있다. 왜 이렇게 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에 살고 있을까? 사람만 많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많다보니 우리 제주도에 너무도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제주도사람에게 일본이란 또 어떤 나라일까?

해방당시 약240만명의 한국사람이 일본에 있었다. 당시 한반도의 인구는 약2천5백만명. 10분의 1의 한국사람들이 일본에 있었다는 것이다.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있었을까?

1910년 우리 한반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본은 어떤 나라였을까?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년)으로 인하여, 일본은 당시의 조선, 중국에 비하여 한 걸음 빨리 근대국가로 발전하였으며, 공업화에 성공했다.

일제 36년, 토지 → 쌀 → 사람 → ‘목숨 내놔’...‘하루살이 인생’ 전락

그러나 일본에는 당시 골치 아픈 큰 문제가 있었다.
당시의 일본은 식량이 자급자족이 안되었다. 굶는 사람을 없게 하는 것이 국가경영에 가장 큰 문제였다.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국민 100만명을 브라질로 이민을 보냈고, 다른 남미의 나라에도 국가가 앞서서 적극적으로 이민을 보냈다.

또 한국을 식민지로 합병하여 한국의 곡창지대 호남평야에서 쌀을 일본으로 실러 날랐다. 목포와 군산은 호남평야의 항구도시이다. 호남평야에서 우리가 생산한 쌀을 또 우리가 먹어야 될 그 많은 쌀을, 이곳 항구를 통해서 배에 실려져 일본으로 실러 날랐다. 일본으로 가버린 양만큼 우리는 못 먹어야만 했고, 쌀이 아닌 잡곡밥을 먹어야만 했고, 그것도 못 먹는 사람들은 굶어야만 했다.

배에 쌀을 잘 선적시키기 위해서는 좋은 항구를 만들어야 했기에, 조선시대에는 한 적한 어촌에 불과했던 목포와 군산이 항구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지금도 유명한 상업고등학교(상고), 목표상고와 군산상고는 물량의 장부정리가 필요했기에, 장부정리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였다.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항구도시의 상고는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일제는 간척사업을 벌였다. 지도를 바꾸었다고 표현할 만큼 대규모의 간척사업이었다. 남해안의 갯벌은 비옥하다. 땅으로 만들어 놓아 벼를 심으면 한국의 다른 곳과 비교가 안될 만큼 단위당 수확량이 높다. 여기에 착목한 것이다. 완도 진도에 가보
면 많은 간척지가 있다. 쌀을 생산해서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한 것이다.

당시의 일본은 전쟁시대였다.
일본은 1937년 中日전쟁,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1941년 태평양전쟁을 발발시킨다. 전쟁 때는 길에 다니는 개도 고양이도 사람으로 만들어서 전쟁터로 보내고 싶고, 또 전쟁 물자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고 싶을 정도로 사람이 필요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제 36년간의 한반도 식민지정책은 1910년대의 토지조사 사업에 의한 '토지 내놔', 1920년대의 쌀 증산계획에 의한 '쌀 내놔', 1930년대의 皇民化 정책에 의한 '사람 내놔', 1940년대는 징용, 징병에 의한 '목숨 놔' 이었다.

도둑으로 몰린 넝마주이 어머니, 두 아들 동경대학 보냈단 이야기에 일경 ‘거수경례’

1910년 20년대의 '토지 내놔' '쌀 내놔' 정책에 의해서, 고향 땅에서 토지 뺏기고, 밥 못 먹게 된 사람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만 살아 갈 수 있었을까? 고향을 버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도회지로 모이게 되고, 또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공장이 있는 도시로 옮겨가게 된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보다 공장이 많은 곳이었다. 그나마 공장에 취직이 되면 좋으련만, 또 되었다 했던들 일본사람의 반쯤되는 일당을 받으며 일을 해야 했고, 취직되지 못한 사람들은 그날 벌어서 그날 먹어야 하는 '하루살이 인생' 이 되는 것이다.

그 '하루살이 인생' 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지금도 우리들 기억에 생생한 엿장수, 넝마주의, 폐품수집, 고철수집 등의 일이 우리 동포들이 할 있는 일이었다. 1920년대 일본에서 사는 우리동포들의 가장 대표적인 직업이 '엿장수'였다. 그것뿐인가. 사람이 아닌 개 돼지와 같은 놈들이란 차별까지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럼 우리 민족은 어떤 민족이었을까?

일본 식민지 전의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다. 글을 좋아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민족으로서, 또 농경민족인 것이다. 조선 500년간 탄탄한 중앙집권 정부를 가지고, 변방인 제주도 목사까지 서울에서 파견할 수 있었던 나라였다. 당시 그런 강력한 중앙집권을 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도 아니요, 일본도 아닌 오직 조선만이 할 수 있었다.

이조 중기이후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는 통신사가 가는 길목에서 극진히 대접을 해가며, 통신사일행으로 부터 글 하나, 그림 하나를 받기위해 목이 멨고, 받은 그 글은 가문의 보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우리의 문화수준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우리는 문화민족인 것이다. 이런 나라가 이런 백성이 일제 침략하에 유랑민이 되여 일본과 만주를 떠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에는 없는 특징이 하나 있다. '하루살이 인생'을 하지만, 자식 교육은 철저한 민족이다. 내가 오늘 못먹어도 자식은 꼭 대학까지 보내고 싶어 하는 민족이다. 이 향학열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오사카에 어느 어머니가 넝마주이를 해가며 자식들 공부를 시켰다. 자식들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 그것도 동경대학에 들어가 주었다. 아들 2명이 동경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일이 일어났다. 길바닥에 옷이 뒹굴기에, 버린 옷으로 생각해서 주어 넣었다. 그런데 이 옷은 버린 물건이 아니라 빨래줄에서 떨어진 임자 있는 물건이었던 것. 임자가 경찰에 도둑이라고 고발을 하고 만다. 그 넝마주의 어머니, 도둑년으로 경찰에 잡히게 된 것이다. 경찰조사 중에 아들 둘이 동경대학을 다닌다고 진술을 했다. 경찰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서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더 조사를 해보고 동내 소문으로 듣고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아들 둘이 동경대학생인 것이다. 경찰이 거수경례까지 하면서 잘 모셔져서 집으로 보내졌다. 동내에서는 경찰에 잡혀갔다고 노심초사하는데, 그 어머니는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1930년대 40년대에 들어가면서 일본은 전시체제로 들어간다. 당시 일본이 한 전쟁은 일본이 침략을 받아서 일으킨 전쟁이 아니라, 일본이 먼저 선제공격을 가한, 일본이 만든 전쟁이었다. 전쟁을 발발 시키려면 오랜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좋은 군대도 만들어 놓아야 되고, 또 전쟁에서 소비할 물자들도 충분히 준비해 놓아야 선제공격이 가능한 것이다.

일제, 전시체제 돌입하면서 한국 노동력 강제 수탈...‘징병 징용’ 재일동포 시초
 
그런 물자를 생산하는데 우리 한국사람들이 아주 좋은 노동력이 되는 것이다. 일본사람보다 낮은 임금으로, 일본사람들이 싫어하는 공해산업, 요즘 이야기로 하면 3D산업 공장에서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한국에 있으면 현금 수입이 없다. 일본에 가서 열악한 환경의 공장이라도 들어가게 되면 그나마 현금수입을 보게 되는 것이다. 화학 약품을 많이 쓰는 고무공장, 더워서 죽을 것만 같은 유리공장, 더럽다고 누구도 하지 않는 돼지 양돈장 일, 우리 동포들이 한 일이었다.

강제연행이 있었다. 공장 혹은 군대 건설현장에서 사람을 모집한다. 일본에서 모집을 해서 그 부족한 인원이 충족이 된다면 좋지만, 모집이 안되면 인사 담당자는 한국에 가서 모집을 한다. 거기에서 자연적으로 모집이 되면 좋지만 모집이 안될 경우는 조선총독부에 의뢰를 한다. 그러면 일본 관이 관계를 하게 된다. 그래도 모집이 어려우면 총독부는 각 도의 지방경찰에 할당을 하게 된다. 할당을 받은 지방경찰은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마구잡이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강제연행인 것이다.

징병 징용이란 제도를 만들었다.

징병(徵兵)이란 강제적으로 군대에 입대 시키는 제도이다. 지금 한국에서 군대에 입대하기 위한 신체검사를 '징병검사' 라고 말한다. 같은 의미가 징병이란 제도였다. 많은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들을 징병이라는 이름하에 전쟁터로 보내져, 이름도 모르는 어느 땅에 묻혀 있는 것이다. 해방당시 일본군인 및 군속이었던 우리 동포들은 36만4천명이었다. 이 숫자는 일본군의 약10%에 해당되는 숫자이고, 이중에서 약12만명은 돌아오지 못하는 객지의 영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징용(徵用)이란 제도를 만들었다. 징병은 군대에 데려가는 것이지만, 징용은 군대대신 탄광이나 건설현장으로 보내져 노동을 하는 제도이다. 좋은 공장이라면 사람이 모인다. 너무도 열악한 작업이기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그래서 징용이라는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사람들을 못살게 하는 것이다. 이 징용은 죽을 고생을 해야만 했다. 지금도 일본에 남아있는 전쟁의 현장들, 비행장, 지하격납고, 지하군시설들의 건설에 많은 우리동포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징병 징용 강제연행 에 우리 한국사람들도 관여했다. 친일파들인 것이다. 일본 관헌에 얼붙어서 일본사람들 명령을 듣고서 충실히 우리 동포들을 팔아먹고 또 죽게 해서 자기는 오만 호화사치를 누리겠다는 사람들인 것이다. 해방 당시 240만명이란 우리 동포가 일본에 있었던 것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 전쟁수행 정책의 산물인 것이다. 흡인력 있게 한국사람들을 이동시켜 일본의 식민지 정책 전쟁수행 정책의 제물이 되었으며, 흡인력이 힘을 발휘 못할때는 강제적인 수단도 동원 했다. 그래서 240만명이란 우리 한국사람들이 일본에 있었다.

일제 식민정책의 희생자, 200만명 중국 조선족들

일본 국내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만주라는 나라가 있었다.
1932넌 일본은, 우리 한반도 북쪽에 위치한 중국 땅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에 만주라는 나라는 만들었다. 만주라는 나라의 왕은 청나라 마지막 왕이었던 '愛新覺羅 溥儀(Aixinjueluo Puyi 아이신주에로 푸이)' 를 데려다 앉혔지만, 이 나라는 일본이 만든 나라였다. 그래서 모든 실권은 일본, 일본 경찰, 일본군이 가지고 있었다. 이 중국땅 만주라는 나라에 일본사람 500만명, 100만가구 이주 계획을 만들어서 많은 일본사람들을(실제는 이주한 사람은 몇십만명) 이라는 사람들을 대거 만주로 사람들을 가게 했다. 이런 국가적인 계획도 역시 일본 국내의 식량문제 및 토지문제에서 연유된 것이다.

만주로 간 사람들.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나니, 그 사람들을 데려 올수 없었다. 곧 소련이 점령하게 되고 그나마 운 좋게 일본으로 돌아 울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추운 만주벌판에 버려지게 된 것이다. 죽은 사람도 많았고, 죽지 않은 사람들(죽지 못한 사람들)은 만주 벌판을 헤매며, 거지, 거지보다 더 못한 짓을 해야만 했다. 남자는 중국사람들 머슴으로, 여자들은 중국남자의 여자로서 팔려나가는, 또 어린애들은 어린애로서 팔려나가는 수모를 만들었다.

당시의 일본의 위정자들, 한국사람 중국사람들에게 못할 짓을 계획하고 실행한 그 위정자들. 그러나 일본 국민에게도 못할 짓을 한 장본인들이다. 즉 A급 전범이 그들인 것이다.

당시 한반도에서 만주로 간 사람들도 약200만명이었다. 지금 중국에 있는 중국 조선족들도 약200만명이 있다. 그들 대부분이 일제때 만주로 간 우리동포들의 후손인 것이다. 중국 조선족들도 일제의 식민지 정책 및 만주 경영의 희생자들인 것이다. <제주의소리>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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