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

▲ 일본잡지 '모선일본 조선판'에 실린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사진.
1910년에 우리 한반도의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1930년대가 되면서 전쟁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당시의 일본은 자본주의가 성숙이 되며 또 공업화에도 성공한 사회였다. 공장이 생기며 공장에서 일을 할 노동력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나 공장에서 일을 해야할 젊은이들이 군대에 소집되여 갔다. 그런 젊은이들도 필요했다.

공장이 이익을 만들기 위해서는 값이 싼 노동력이 있다면 아주 좋다.또 열악한 환경의 공장에서 일을 해주는 노동력이 있다면 더욱더 좋다. 우리 한반도는 이런 일본의 사정을 메꾸어주는 아주 좋은 노동력의 제공처가 되며,우리 민족은 그들의 전쟁에 필요한 군인으로서 목숨까지 버려야 했다.

군인으로서 목숨, 값싼 노동력,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력, 그러나 그들은 불안해 했다. 우리는 일본 민족이 아닌 것이다.조선민족을 그대로 둔다면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서 일본은 혼줄을 경험한 것이다. 이래서 생겨난 식민지및 조선인 정책이 민족말살, 민족탄압 정책이다. 민족정신을 없게해서(말살시켜) 천황에 충성스러운 민족이 된어 준다면 일본은 아주 편하게 우리 민족을 부려 먹을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전쟁이 심해지는 1930년 후반부터 민족 말살정책이 심해진다.

여기에는 협조자도 필요했다. 일본에 잘 협조하는 친일파를 만들어서, 그들에게는 오만 특권과 호화사치를 주는 대신, 우리 민족을 팔아먹게 하는 자들인 것이다.

◆ 황민화 정책(皇民化 政策)= 황(皇)이란 일본 天皇을 말한다. 황민(皇民)이란 천황의 국민, 천황에게 충성스런 국민이다. 천황에게 충성스러운 국민을 만들어서, 천황의 명령 하나에 생명도 버릴수 있는 사람을 만든다는 정책이다. 수천년 내려온 우리 민족은 근본 정신을 없에고오직 천황을 위한 국민을 만들어서 전쟁터로 보낼려는 정책인 것이다.

◆ 내선일체(內鮮一體) = 내(內)란 일본을 말한다. 일본 본토를 내지(內地)라고 불렀고, 그들의 점령했던 우리 한반도및 타이완, 만주등을 외지(外地)라 불렀다. 선(鮮)은 조선을 말한다. 내선일체란 일본에 살고 있는 일본 사람도,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들도 한마
음 한뜻으로 일본에 충성하라는 의미이다. 한국사람도 일본사람도 똑 같은 처우를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 자신의 신을 참배하도록 하는 신사참배 정책은 특히 우리나라 기독교인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았다.
◆ 신사참배(神社參拜) = 신사(神社)는 일본 고유 종교 신도(神道)의 사찰을 말한다. 일본은 제국주의및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일본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고 싶어진다. 전국민 마음의 통일에 종교가 이용된다. 옛날부터 있었던 神道를 이용, 神社에서는 천황을 숭배하게 하게 하여, 천황의 명령 하나로 명예롭게 전쟁터로 돌진하게 했다. 이 신사참배를 우리 민족에게 강요했다. 만약 신사에 가서 정중하게 절을 하지 않으면, 일본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간주, 경찰에 잡아가서 감옥에 투옥 시키는등의 일이 보통이었다.

지금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한반도에서 제일 큰 신사, 조선신사(朝鮮神社, 朝鮮神宮, 神宮이란 神社중에서 가장 격이 높은 신사)가 있었던 자리이며,제주도에도 11개소의 신사를 만들었다. 제주도에서 가장 큰 신사는 제주시 동문 로터리에서 제주항 중간지점, 제주지방기상청 옆 중앙감리교회 자리다. 신사 참배만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 신을 모시는 위패를 집에 모시게 해서, 매일 아침 집에서 그 위패를 향해서 참배하는 제도까지 만들었다. 여기에 한국 기독교가 반대를 했다. 하느님 예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숭배 못한다는 교리상의 문제, 또 우리민족 정신 말살로 부터 끝까지 지키겠다는 민족정신으로 반대를 했다. 당연히 일제의 탄압이다. 많은 교인이 투옥되었고 또 기독교계 학교가 폐쇄되는등 탄압을 받게 된다.

◆ 창씨개명(創氏改名) = 우리 한국에서 '성을 갈 놈' 이란 욕은 욕중에 아주 큰 욕이다. 우리 민족은 자기의 성씨를 아주 중요시하게 여기며, 자기 성씨를 하늘과 같이 여기고 살아왔다. 이런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것이다.만약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여러가지 탄압을 받게된다. 학교 원서접수부터 못하고 되고, 시청이나 구청에서 민원서류 하나 발급 못받게 하며, 또 배급도 못받게 했다. 결과 우리 한반도에서는 80%가 창씨개명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일본이름은 高木正雄(たかぎ まさお 다까기 마사오)였다. 당시 제주농업학교(제주농업고등학교) 학생 100%가 창씨개명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한반도에서 행한 창씨개명은 일제가 행한 가장 혹독한 식민지정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 일제는 우리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모든 성을 바꾸도록 하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 조선어 말살 정책 = 학교에서 쓰는 말을 전부 일본어로 하게 했다. 수업시 선생님이 공부를 가르키는 말을 일본어로 하게 했다. 또 학생과 학생사이에 오고가는 말도 전부 일본어로 하게 하는등, 조선어를 말살하는 정책을 펼친다. 위와 같은 정책뿐만 아니라, 한복 입지 않고 일본옷 입기 운동, 일본 요리 먹기 운동 등 가능한한 일본 것을 강제적으로 강요할려고 했다. 몇년전 일본 유도 국가대표 감독이 TV에서 말했다. 일본 국가대표선수들에게 일본음식을 먹이지 않고 한국음식을 먹인다고 했다. 일본음식을 먹이면 힘이 안나온다는 것이다. 한국음식의 얼마나 몸에 좋고, 또 에너르기를 잘 만들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말이다.

어느 식민지 정책을 연구하는 학자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얼마나 우둔했는지를 말하고 있다. 한국 주택의 온돌이다. 우리 한반도에서 몇천년동안 우리 조상들 지혜의 집결체가 온돌인 것이다. 우리 토지및 기후에 가장 잘 맞게 수천년의 지혜가 모아진 것이 온돌이다. 그러나 일제는 한반도에 온돌을 쓰지 않고 일본식 주택을 그대로 가져왔다. 일본식 주택은 일본 섬나라의 기후에 맞는 주택 형식인 것이다.어릴때 전화국 관사가 우리 동내에 있었다. 그 관사는 일본식 다다미 방이 있는 일제때 집이었다. 마침 그 관사에는 친구들이 살고 있어서 잘 놀러갔다. 겨울에는 놀러가지 않았다. 추웠다.

필자가 초등학교때 교실 건물도 일제때 지은 건물이었다. 겨울에는 마루 밑에서 올라오는 바람때문에 발이 시려서 양말을 몇개씩 신고서 공부하곤 했다. 제주도가 이런데 서울이나 더 추운 지방에서는 어떻게 했을까? 또 물자가 더 없었던 일제시대때는 어떻게 공부를 했을까?

하나더 연구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은, 총과 칼을 가지고 강제으로 밀어붙친 식민지 지배 정책인 것이다. 역사에는 if (만약) 이란 말이 없다고 한다. 만약 일본이 세계2차대전이란 전쟁에서 승리를 했다고 한다면, 우리 민족정신을 영원히 말살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식민지 정책 연구에서 본다면 구멍이 많이 나 있는 정책들이다. <제주의소리>

<신재경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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