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편지(13)] 선작지왓…꽃 피는 봄날 이곳에 서면 그대도 한떨기 진달래가 되리
연분홍 진달래의 향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한라산 선작지왓엔 꽃잔치가 한창입니다.
물가엔 설앵초와 구슬붕이가 앙증맞게 귀여운 자태를 드러내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옥잠화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채 피어납니다.
영실기암 올라 싱그러운 구상나무숲 터널을 벗어나면서 드러나는 널따란 평원입니다.
‘바위(작지)들이 서 있는 들판(왓)’이란 뜻이지요.
눈앞으로 백록담 화구벽의 웅자(雄姿)가 심장을 울리고 윗세오름과 방아오름의 부드러운 능선을 양쪽에 거느린 가없는 벌판입니다.
시로미와 눈향나무, 털진달래와 산철쭉이 계절마다 자태를 드러내고, 한라산의 온갖 희귀식물들이 이 고원평야의 은밀한 숲속에서 둥우릴 틉니다.
전설의 후예인 한라산의 노루들도 이 언저리 어디쯤에서 저들의 보금자리를 보듬고 있을 것입니다.
백록담을 한라산의 심장이라 하자면 이곳 선작지왓은 허파와도 같겠습니다.
가없는 벌판이 온통 진달래꽃의 분홍빛 물결이 불처럼 일렁이고 푸른 바다를 배경삼아 대양을 항해하는 말 그대로 꽃의 바다(花海)라 하겠습니다.
오월의 시작과 더불어 봉오리를 틔운 한라산의 진달래는 느린 걸음으로 백록담까지 북상합니다.
고원의 평원인 선작지왓에 이른 꽃들은 이 너른 벌판에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재잘거리며 활짝웃음으로 춘정을 사르지요.
그 향기에 취한 나비들이 꽃마다 찾아들고 겨울나기를 이겨낸 산노루도 진달래 꽃잎의 성찬(盛饌)을 즐깁니다.
꽃피는 봄날은 무럭무럭 크는 아이의 함박웃음이겠습니다.
진달래의 향기가 시들해질 무렵이면 산철쭉이 바통을 이어받듯이 피어납니다.
신록이 무르익는 여름의 어간까지 진달래와 철쭉의 꽃무늬가 펼쳐지는 셈이지요.
진달래와 철쭉은 사촌지간입니다.
언뜻 보기에 어느 것이 진달래고 어느 것이 철쭉인지 여간해선 구별하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자세히 보면 두 꽃의 간극은 너무나도 확연합니다.
황량한 가지에 겨우내 웅크렸던 꽃잎을 활짝 피워내는 것이지요.
얼마나 웅크렸던지 펼쳐낸 꽃잎에 아직도
겨울의 앙금 같은 잔주름이 남아있습니다.
잔주름의 자국을 따라 꽃잎의 정중앙을 보면 앙증맞은 털이 나 있습니다.
아마도 추운 겨울나기를 지새며 키워낸 자국일테지요.
그래서 한라산의 진달래를 털진달래라고 합니다.
연둣빛 잎사귀와 진분홍의 꽃잎이 일시에 피어나는 셈이지요.
진달래를 수수하게 차려입은 순박한 시골처녀에 비유하자면 아무래도 철쭉은 곱게 화장하고 양장 치마를 두른 도회지의 세련된 아가씨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연한 진달래의 꽃잎은 노루가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저녁 노을이 선작지왓 벌판에 은은하게 쏟아지는 어스름에 한가하게 진달래 꽃잎의 성찬을 즐기는 노루의 천진한 눈망울 속에서 우리가 꿈꾸는 낙원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온 세상의 정원사를 모아서 꾸며도 될 수 없는 천상의 화원이 그런 곳일 테지요.
꽃피는 봄날 한라산 선작지왓에 드시려거든 그런 화원에 드는 마음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저 꽃들이 피어나는 데 한줌의 거름도 준 적 없는 우리지만 끊임없는 계절의 순환 속에 피고 지는 저들의 무량한 삶의 향기에 취해보자는 것이지요.
바람의 속도에 맞추어서 느릿느릿 걸으시기 바랍니다.
흐르는 구름으로 나그네 되어 오시기 바랍니다.
이 계절에 천상의 화원에 묻혀 꽃들의 향연에 취하여 꽃날의 몽환(夢幻)에 한줌의 영혼을 잠식당해보지 않고서는 뜨거운 여름으로 들어갈 수 없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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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삼 시민기자
witseoru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