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군대환이 아닌 다른 배

제주도-오사카(大阪) 노선에는 군대환만 있었는가?

아니다.다른 배도 다녔다. 朝鮮郵船株式會社 라는 조선총독부와 아주 가까운 親日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는 日本郵船과 大阪郵船의 원조하에 1912년1월에 자본금 300만엔으로 설립된다. 1913년4월부터 제주-목포 노선, 1915년4월부터 제주-부산 노선을 만들지만 1932년3월까지는 총독부 명령노선으로서 보조금을 수령하며 경영한다. 이후 朝鮮汽船株式會社라는 자회사를 만들어 자유항로로 담당하게 된다.

이 朝鮮郵船이 1924년 咸鏡丸(749톤)을 제주-大阪 노선에 투입하고, 그후 京城丸(1033톤) 이 투입된다. 1925년4월부터 5년간은 명령항로로 지정을 받았다.

그러나 1935년 조선에도 선박안전법이 실시됨에 따라 많은 수리비가 들어야 될 京城丸는 일시 휴선에 들어가지만 정선이 되여, 제주-오사카 노선에서 철수를 하고 만다.

▲ ⓒ신재경

東亞通航組合 설립

1927년에는 제주도 출신자가 약3만명을 넘게 된다. 다음해인 1928년 4월에 군대환 소유의 尼崎汽船과 京城丸소유의 朝鮮郵船에 당시 12엔50전 하는 운임의 절하를 요구하지만 「새가 아니라서 날수도 없고, 물고기가 아니라서 헤엄을 칠수도 없어서」라는 놀림까지 받으며, 거부 당하고 만다. 이에 在阪제주인들이 제주도민대회를 大阪市 天王寺 公會堂에 열어 실행위원을 구성, 운임 절하및 승객처우개선을 재차 요구하지만 역시 거부당하고 만다. 이때 공회당에는 제주도민 1000여명이 모여, 열기로 대단했지만 일본 官憲의 탄압도 시작된다.

이런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 배로」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濟州通航組合準備會를 조직하여 활동에 들어간다. 1930년4월에는 제주도 162개 부락중 119개 부락이 가입했고, 在阪조선인 및 제주도에 있는 도민 4천500명이 1주식에 30전인 조합비로 東亞通航組合이 설립되고, 이해 가을에는 1세대 5엔의 기금조성을 실시 약6천엔을 모금하면서, 函館成田商會로부터 蛟龍丸(3000톤)을 빌어 11월1일에 편도 6엔50전이란 파격적인 요금으로 역사적인 출항을 하게 된다. 이에 다른 회사들도 6원50전으로 내릴수 밖에 없었다. 또 이들 다른 회사는 3엔까지 내리며 대항했지만 蛟龍丸에 대한 도민들의 지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濟州通航組合에서 東亞通航組合로 명칭이 바뀐것은 완도 출신자들이 大阪에 거주하고 이 조합에 협조했으며, 또 전편은 아니지만 부정기편으로 완도에도 기항했다고함. 동포의 입장에서東亞通航組合로 명칭을 변경)

▲ ⓒ신재경

용선 계약이 끝나는 1931년3월에는 수천엔의 적자를 내게 되여, 배를 구입하는 것으로 계획이 진행된다. 일본 官憲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伏木丸(1332톤)이 구입 된다. 이배는 北日本汽船會社가 사할린 노선및 조선노선에 투입되었던 배였다. 1931년12월1일 334명의 승객을 태운 이 배는 만여명의 환송을 받으며 출항하게 된다.

▲ ⓒ신재경


이 伏木丸에 대한 탄압은 대단했다. 12월5일 화순항에서는 군대환을 탈려는 조선인에 대해서 朝鮮通航組合지지자 100여명이 같은날 입항 예정인 伏木丸을 타라고 대대적인 설득 활동을 벌린것에, 官憲의 개입하여 조합원7명이 체포되고 징역1년이하의 실형이 선고된다. 그후에도 일본자본과 경찰의 긴밀한 협조아래 계속 탄압이 계속 된다. 또 伏木丸을 탈려는 승객에 대해서는 결찰이 도항증을 발행해 주지 않는 등 탄압의 방법도 있었다. 의 이시기 東亞通航組合은 제주도 일본에 34개의 지부, 1만여명의 조합원으로 민중적 민족적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러나 官憲의 탄압과 누적된 적자로 인하여, 결국 1933년12월1일 운항 정지를 하지 않을수 없었다. 順吉丸 이란 배도 있었다.

조천면 출신 高順欽씨는 1928년12월 동지들과 함께 企業同盟汽船部를 조직하여 北海郵船會社 소유의 第二北海丸을 빌어서, 12월1일 부터 제주-오사카 노선에 취항 시켰다. 그러나 가맹원이 11명 출자금액 1인당 300원의 자금력 부족, 거기에 대중 기반 결여, 제주도와의 연락 불충분 이라는 결점으로 조직의 약체화와 경영난을 극복할수 없어서, 1929년3월에 鹿児島郵船의 順吉丸에 업무를 위탁하게 된다.

鹿児島郵船株式會社는 1905년에 鹿児島에서 설립된 회사이며, 주로 沖縄-大阪노선에 배3척을 취항시킨 회사였다. 제1차세계대전후의 해운업이 불황으로 인하여 1925년경부터는 독자적인 경영을 포기, 이 노선의 강자인 大阪商船에 배3척을 빌려 주고마는 상태에 빠진다. 그후 보다더 영세업자인 渡航業組合의 경영을 맡아, 회사의 연명을 기도했지만,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조합의 설립자 高順欽씨는 나중에 順吉丸의 사무장으로 근무한다. 이러한 제주-오사카 노선은, 鹿児島郵船의 順吉丸이 제일 먼저 철퇴, 다음으로 東亞通航組合의 伏木丸이 철퇴, 다음으로 1935년에 朝鮮郵船의 京城丸이 철퇴를 하게 된다.

결국 경쟁에서 남은 尼崎汽船의 군대환이 1945년까지 운항을 하게 된다. 운임은 얼마 였을까?

군대환의 요금은 12엔50전 이었다. 당시 방직공장 여공 일당이 1엔정도 였다고 한다. 그러면 그 12일분이 운임이었다. 이것으로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이 가능하리라 본다.

1930년 민중적인 組合이 운항한 伏木丸는 6엔50전이었다. 이에 경쟁하기 위해 군대환은 3엔까지 값을 내렸다. 伏木丸가 운항정지로 인하여 또다시 운임 인상을 하였다. 1934년8월까지는 군대환 京城丸 두척은 6원, 12원의 2종류 운임, 그 이후는 더 인상 되어 8원, 12원의 운임으로 운항한다.

또 군대환및 京城丸은 월3회 왕복의 정기선, 伏木丸은 월2회의 정기선이었다. 일제시대 때 한국을 오고간 定期客船은, 關釜연락선과 제주•大阪의 군대환의 두 노선이었다. 關釜연락선은 日本 鐵道省이 운항한 日本 國策 노선이다. 일본 국내에서 열차표 한장으로 한반도의 서울은 물론이요, 전국 각지까지 연결되고, 중국 만주까지 연결되는 식민지 정책의 대동맥 이었다. 또 배의 크기도 7천톤급 배가 투입 되었고, 승객의 다소에 따라서 3천톤의 작은 배들이 임시로 바로 투입되는 등, 상당히 유난성을 가지고 운항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제주-오사카의 항로, 당시 제주도민은 약 20만명 이었다. 이 20만명 밖에 없는 섬과 大阪을 연결하는데 한때 4척의 배까지 취항했다. 또 편수는 월 왕복 10편 까지 있었다.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점이 있다.

일본의 산업혁명이라고 불리워지는 1900년전후, 오사카는 방직, 조선등 근대공업의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때는 주 동력이던 증기기관은 석탄을 썼기 때문에 오사카가 「물의 도시」라는 좋은 명칭에서 「연기의 도시」라는 대명사로 불리워 진다.

또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호황으로 사람손이 부족하게 된 일본은 강제 반강제 자의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한반도의 건장한 노동력을 일본으로 데려 오게 되며, 또 지금과 마찬가지로 힘들고 더러운 일은 한반도 출신자들이 일본인의 반도 안되는 임금으로 일을 시키게 된다.

군대환은 그때 일본이 부족한 노동력 확보에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부족한 노동력 확보가 주목적이었다면, 인구가 적은 제주도에 취항했는지가 의문이다. 인구가 많은 경상도 지방은 關釜연락선이 있었서 필요성을 못 느켰는지 모르지만, 제주도보다 몇배의 인구가 있는 전라도 지방, 아니면 다른 지방을 택하지 않고, 인구가 적은 제주도를 택한 이유가 의문이다. 尼崎汽船은 비지니스 즉 이익을 만들기 위한 회사이다. 아무리 제주도출신 在阪의 유력자, 제주도의 유력자가 제언을 했다해도 이익을 만들어낼수 없는 노선이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20년간 운항을 했다는 것은 이익이 있었기에 계속 될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다른 노선을 선택했다면. 제주도가 본적인 재일 제주도민 10만은 없었을 것이다.

현재 또한 제3의 군대환이 있다. 제주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직행 항공편이 매일 한 편씩 운행하고 있다. 또 부산 경유편까지 있다. 현재의 항공편은 많은 일본관광객 한국관광객도 상당수 있고, 고향을 다녀가는 재일동포들도 많다. 그러나 그 속에는 Japan Dream의 꿈을 안고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도 많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일본 특히 오사까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진 곳인가?

▲ ⓒ신재경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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