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마자토 신지(今里新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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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루하시 역에서 동남쪽으로 10여 분 걸으면, 조선시장(朝鮮市場, Korea Town)이 나오고, 조선시장에서 동쪽으로 10여분을 걸으면 이마자토 신지(今里新地) 라는 동네가 나온다. 이 동네는 한국 사람들이 모여 술장사를 하는 '한국에서는 보지 못할 한국'이 일본에 있는 곳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오사까시 이쿠노구(大阪市 生野區)이다.

츠루하시(鶴橋)와 코리아타운(朝鮮市場)이 우리 한국사람들의 표면이라면, 이마자토 신지(今里新地)는 우리 한국사람들의 후면이다. 츠루하시(鶴橋)와 코리아타운(朝鮮市場)이 낮의 거리라면 이마자토 신지(今里新地)는 밤의 거리이다. 낮에 가 보면 귀신이 나올 정도로 길이 텅 비어 있다. 저녁에 어둠이 깔리면 사람들이 오고가고 네온싸인에 불이 켜지며 화려해 진다. 또 왁자지껄 여자들의 한국말이 오고가며 예쁜 여자들이 보이며, 향수 냄새가 나오기 시작한다. 남자 혼자서 아니면 남자 여럿이 이 동네를 걸어가면 술집으로 데려 가려는 '삐기 아줌마', '삐기 아저씨'들이 말을 걸어온다. 이 동네에는 '삐기 아저씨'도 있다.

가로 1km 세로 1km 않되는 좁은 땅에 수백개의 한국 술집이 모여 있다. 술집은 여자가 있는 술집이다. 옛날 서울 어느 술집촌을 연상케 해준다. 그 술집여자가 거의 한국에서 온 여자들이다. 지금도 오고 있는 여자들인 것이다. 이 정도의 여자들이 있으면 이 여자들을 위한 여러가지 장사 가게도 있다. 식당도, 미장원도, 비디오 가게도, 옷 가게등도 있으며, 또 이 여자들의 오락시설까지도 있다. 빠칭코도 있으며, 여자들이 가는 술집 '호스트 바'까지 있다. 남자 손님들에게 서비스를 하면서 피곤해진 몸을 호스트 바에 가서 남자들에게서 서비스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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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新地)란 어떤 동네?

이 동네 이름이 이마자토 신지(今里新地)이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새동네 '신지(新地)'라는 동네. 오사카에는 무슨무슨 신지(新地) 라고 불리우는 동네가 몇곳 있다. 단어에서 알수 있듯이 새로 만든 동네(새동네)를 의미한다. 어느 지역 이름에 신지란 이름을 붙여 기존 있던 동네와 구별하여 쓰이게 된다.

어느 곳에 새동네를 만들어 신지(新地)라 이름 붙이고, 시내에 널려있던 유곽, 유흥가를 그 속에 밀어넣은 것이다. 유곽들을 밀어넣은 경우도 있고, 술집등을 밀어넣어 유흥가를 만든 경우도 있다. 오사카 사람들은 어느어느 신지 라고 하면, 유곽이 있는 동네인지 유흥가의 동네인지 바로 연상하게 되며, 택시를 타서 어느 신지로 가자면 모르는 운전기사 한 사람도 없다.

'이마자토 신지'이외에도 신지(新地)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 오사카(大阪)에는 몇 곳 있다. 기타 신지(北新地)라고 불리여 지는 곳이 있다. 기타 신지(北新地)의 기타(北)는 북쪽을 의미한다. 위치로는 오사카의 북쪽을 말하고 있으나, 장소는 오사카역 앞쪽, 옛날은 시내 중심가의 북쪽에 위치라서 기타(北) 이다.

지금 수천여 점포, 주로 고급 술집, 고급 식당 등의 고급 유흥가이며, 유곽은 없다. 기타 신지에서 술 마셨다면 비싼 곳에서 술 마셨네, 라는 말을 듣게 되고 이곳에서 술을 마셨다고 자랑까지 하게 된다. 또 기타 신지 술집에 근무하는 호스테스는 잘 나가는 술집여자의 인상이다. 예쁘고 매너 좋아 고급손님과 상대하는 술지여자의 의미이다.

이 기타신지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돼, 1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는 오사카시의 중심이지만, 당시는 오사카시의 북쪽 한적한 농촌, 그곳에 신지라는 곳을 만들어 당시 게이샤등이 있는 유흥업소를 강제로 유도한 곳이며, 몇 백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장소도 조금은 이동이 되여, 현재의 위치에 고급유흥가가 형성된 것이다.

도비다 신지(飛田新地)가 있다. 도비다 신지는 현재 오사카 남쪽 중심지, 텐노우지(天王寺), 오사카시립대학병원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성기 때에는 천여 점포의 유곽이, 지금도 백여이상의 유곽이 있다. 오로지 남자와 여자의 성매매를 목적으로 한 유곽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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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마자토 신지(今里新地)는 어떤 곳?

이마자또 신찌에 유곽이 형성 되는 시기는 1930년경 부터이다. 당시 오사카는 '동양의 맨처스터'라고 불리워졌던 공업도시 였다. 공업도시로서 사람들이 몰리면서 시내에 형성되는 사창가(私娼街)들이 보건위생상의 문제, 또 주택지에서 분리시키고 싶은 문제가 제시되면서 지도정리가 필요해진 것이다. 당시 일본은 공창(公娼)제도가 있어서, 먼저 도비다 신지(飛田新地)라는 곳에 공창가(公娼街)를 형성시켰고, 다음에 이마자토 신지(今里新地)를 형성시킨다.

이마자토 신지에는 공창이 있었고 ,또 게이샤(芸者)가 있는 요정도 있는 환락가였다. 이곳은 오사카 동쪽에 있는 농지였다. 비만 오면 범람하는 농지로도 적합치 않은 그런 땅. 이런 동네를 개발시킨다. 도비다 신지를 형성시키는데는 주변 주민들과 마찰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마자토 신지는 주변주민들과 마찰도 없었다고 하니, 말 그대로 농사도 잘 안되는 습지였던 땅이었던 것 같다.

이 곳을 환락가로 개발시키는데, 상상도 못할 대기업이 관여하게 된다. 개인 철도 회사인 긴테쓰(近鐵 きんてつ Kintetsu, 近畿日本鐵道)가 중심이 되여 환락가를 조성하게 된다. 그래도 얼굴은 있어서 본사가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고 자회사를 만들어서 참여한다. 킨테쓰(近鐵 きんてつ)란 회사는 철도를 중심으로 백화점 및 문화사업 등 오사카는 물론 일본 사설철도를 대표하는 기업이다. 이 회사의 철도 노선이 이 지역을 통과한다. 주변 지역 개발이라는 명목이긴 하지만, 환락가 그것도 유곽 개발에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관청인 오사카부(大阪府)가 허가를 내주고 경찰이 철저히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한국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옛날 일본이 이런 향락산업에 관청과 경찰이 또 대기업이 얼마나 관여를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대기업이 환락가를 조성했으니 성공 하지 않을수가 없다. 대성공을 거두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당시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일본은 이런 기록도 아주 상세히 책으로 남겨두고 있다) 1945년 전쟁중에 오사카 시내에 있던 신지(新地)들은 미군 폭격으로 파괴 되거나 불타 버린다. 그러나 오사카 외각지에 있는 이마자토 신지는 폭격에서 온전하게 된다. 폭격에 피해를 입은 신지의 여자들이 온전한 신지, 이마자토 신지로 몰린다. 전쟁 후에는 이곳이 성황을 이루게 되지만, 이젠 공창법이 폐지가 되면서 당당하게 유곽 간판은 못 걸고, 요정이란 간판을 걸어서 성매매 영업을 한다.

지금도 이런 요정이 있어서 한국 술집과 일본 요정이 공존하고 있다. 이런 요정이 있는 곳에 한국 술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70년 전후이다. 한국 동포들이 많이 사는 츠루하시, 조선시장에서 가까워서 걸어서 갔다올 수 있는 거리이다. 한국 술집이 들어와서 한국 아가씨들이 있다.

또 이때 쯤에 가라오케도 개발된 것이다. 한국 술집을 제일 반긴 것은 우리 동포들이다. 목이 메이게 한국 옛노래 '고향 그리워'를 부를수가 있고, 한국 아가씨가 장단을 맞쳐 준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이곳 술집에서 한국노래로 한국 아가씨들에게서 고향에 가지 않아도 풀수 있는 것이다. 당시는 한국에 가고 싶어도 갈수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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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가 잘 되니, 한집 두집 늘어가게 된다. 또 당시는 이쿠노구(生野區)의 동포들의 경제가 살아있을 때 였다. 아가씨가 있는 비싼 술집에 가서 매일 마셔도 돈이 비는 것이 모를 정도로 경제가 좋았다고 회상하고 있다. 처음에 이곳에 술집을 차린 사람들은 주로 결혼을 해서 한국에서 일본에 온 여자들이 많았다. 초기에 이곳에서 술장사를 한 사람들은 돈을 벌어, 집을 샀다고 한 사람들도 있고, 빌딩을 장만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한국에서 여행 자유화가 되면서, 상당히 자유스럽게 한국에서 일본으로 올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한국에서 온 여자. 처음에는 술집에서 호스티스를 한다. 호스티스를 하는 술집여자의 꿈은 나도 술집을 경영하고 싶은 것이다. 또 장기적이고 안정적적인 장기 비자가 필요하고, 술집 경영에 필요한 몫돈도 필요로 한다.

재일 1세. 한국에서 일본에 온 사람들을 재일 1세라고 부른다. 일본에서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재일 2세가 된다. 또 그의 자식은 3세 또 4세...

지금의 이곳, 이마자토 신지는 1세들의 동네이다. 여자 1세들의 동네이다. 나는 편의상 1세를 3등분 한다.

해방전 1세 (제주도는 군대환(기미가요마루) 1세): 일제시대 때 일본에 온 1세들
밀항 1세: 해방후 밀항선을 타고서 일본에 온 1세
비행기 1세: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고나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일본에 정착한(눌러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일본은 자기 나라에 들어오는 이민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이다. 유학생이나 주재원 등 단기 특정한 목적과 결혼등을 제외한 경우는 일본 입국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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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이마자토 신지는 지금도 수백 점포의 술집이 영업을 하고 있다. 점포가 수백이라면 점포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들도 수천 명은 될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여자들은 어떻게 해서 여기에서 일하고 있을까?

처음에는 관광비자 3개월로 일본에 입국한다. 관광비자 3개월을 받고서 일본까지 가게하는 데는 사람 사람마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100사람이 있다면 120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3개월씩 왕래하면서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왕래하기가 싫으면 비자를 버린다. 비자 기간이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그냥 눌러 앉아버리는 것이다. 불법체류자가 되는 것이다. 불법체류자가 돼버리면 위험도 있고 겁도 난다. 순경만 보면 겁나는 것이다.

장기간 편안하게 일을 할려면 장기 비자가 있어야 된다. 결혼이다. 짝 맞는 좋은 사람과 만나서 결혼을 한다면 누가 무어라 할까. 돈을 앞세운 위장결혼도 있다. 돈이 필요한 일본 남자에게 호적만을 올려서 결혼했다고 신고해서 결혼비자를 받는 것이다. 일본 입국관리청은 바보가 아니다. 이런 위장결혼을 잡아 내려고 안달이다. 잡을려고 안달하고 잡히지 않을려고 안달하는 숨박꼭질을 하면서 결혼비자를 받아낸다.

한꺼번에 일본돈 100만엔 200만엔 하는 비용을 일시불로 줄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매월 얼마씩 주는 월부도 있다. 월부가 더 안전하다. 결혼비자는 처음에는 1년, 그후 3년씩 나오게 된다. 일시불로 돈 다주고 난후 남편되는 사람이 행발불명이 되어버리면, 다음 비자 받을때 이거 큰 낭패이다. 돈 받고 호적 올려주는 남자, 그들 또한 그렇고 그런 남자들인 것이다.

이곳에는 관광비자, 비자 버린 사람(불법체류자), 가짜 결혼한 사람(위장결혼), 진짜 결혼한 사람, 어떤 때는 유학생들도 보인다. 가끔씩 일본 입국관리청이 술집을 털려고 나온다. 불법체류자도 잡아가고, 비자 목적과 다른 일을 하는 사람도 잡아가겠다는 것이다. 정당한 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잡혀도 상관없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걸리게 되면 차디찬 찬바람이다. 일본에서 추방까지 당하게 된다. 어떤 집 한번 털면 정당하지 못한 비자를 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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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 입국관리청에서 쳐들어와서 털렸다 하면 몇 분 사이에 그 소문은 그 동네 구석 구석에 싹 퍼지고, 동네 한 모퉁이는 꽁꽁 얼어붙어 버리고 만다. 동네 아가씨들이, 방금까지 행세좋게 큰 소리치더니만 소식을 듣더니 다리가 얼어 붙어버려 걷지도 못하고 앉아버린다.

이곳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은 아가씨들이 아니라 아가씨 행세 아줌마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들이다 보니, 나이도 들만큼 들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가씨 노릇을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아가씨들의 가장 큰 목표는 돈이다. 그러나 술집을 경영하고 싶은 것이 더 큰 소망일 것이다. 일본에서 술집 주인을 '마마'라고 부른다. 한국사람 누구도 종업원에서 경영자가 되여 사장님 소리 듣고 싶은 것은, 우리들의 본능일 것이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술집 아가씨를 하고 있으니, 더욱더 그 본능은 커질 것이다. 그러나 마마를 하려면 안정된 비자도 있어야 되고, 또 몫돈도 있어야 된다.

술집 아가씨 봉급을 받고서 몫돈 모으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씀씀이가 보통이 아니다. 빚이나 안나면 다행이다. 이곳 술집의 손님으로는 한국 교포와 일본사람들이 아마 반반 일 것이다. 교포들 경제가 뚝 떨어졌다. 이곳에 자주 들락거리는 일본 사람들의 하부 경제도 또 그렇다. 손님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동네를 잘못 어슬렁 거리다가는 '삐끼 아줌마'에게 납치 당해서 바가지가 일쑤이다. 이
바가지 수법은 한국 바가지에 현해탄 거센 파도를 견디면서 일본에 왔더니 더 두터워진 철 바가지가 된다. 한국사람들 장사 수법, 좋은 손님 만들어 오래오래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손님 쒸워서 빨리 한탕 벌자는 판이다.

그래서 손님 숫자도 적어져 가고 마시러 가는 횟수도 줄어져 간다. 악순환이다. 빈 가게가 많아지고 있으며, 집값도 내려간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마자토 신지가 점점 축소되 가는 것을 느낀다.

밀항으로 일본에 온 밀항1세 여자분들은 인생에 자존심이 있었다. 공장에 가서 몸은 힘들게 일은 하지만, 술집에 나가서 자기 몸을 떨어뜨리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공장에서 힘들게 번 돈을 한국에 보내어 집도 사고, 자식들 대학 공부까지 시켰다. 이것이 제주도 여자들, 우리 어머니들의 강인한 정신인 것이다.

비행기 1세 여자들은 그렇치 못한 사람들이 많다. 일본 오기가 무섭게 곧 이마자토 신지 술집에 앉아 있다. 쉽게 많이 벌겠다는 것이다. 이젠 쉽게 못 벌고 많이도 못 번다. 일본 경제 특히 이쿠노구 경제가 별로 좋지 않다. 여자 있는 술집에 가서 일본 돈 몇만 엔씩 주면서 술 마시는 남자들 많지 않다. 여자들 일당이 뚝뚝 떨어진단다. 그러나 그녀들의 소비는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이 동네의 지금의 현실이다. 의외로 제주도에서 온 여자들도 많다.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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