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 (11) 조총련과 북송동포

조총련, 그 단체는 과연 어떤 단체일까? 어떤 단체이기에 우리 제주도 사람에게 그리도 많은 피해를 주었을까?

사관학교 입학시험, 고시, 공무원 시험등등, 좋은 성적으로 2차 시험까지 합격해 놓고서 집안 누가 조총련이란 이유 때문에 신원조회에 걸려서 울어야만 했던 제주도 사람들 얼마나 될까?

필자 친구도 고등학교때 신체도 좋았고 공부도 잘 했다. 꿈은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해서 파일럿(비행기 조종사)이 되는 것이었다. 공사 2차시험까지 합격했다. 본인의 능력은 다 평가 받은 것이며, 비행기 조종사가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3차 신원조회에 떨어졌다. 집안 누가 일본 조총련에 소속 돼 있다는 것이다.눈물 흘리면서 집안 삼촌을 원망해 보고, 조총련을 미워했지만 공사는 들어갈수 없었다. 그때 그 친구의 눈물의 모습은 지금도 내 머리속에서 영화를 보는 듯하다. 지금도 그 때 그 모습을 생각해 보면 내가 더 울고 싶다.

원한 맺힌 조총련이다. 신원조회가 없었다면 그 친구는 지금쯤 아마도 보잉747 점보기 기장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제주도 사람들, 필자 친구만 있었을까? 고시에만 문제가 있었을까? 일본에 밀항을 해서 잡혀서 부산에 강제송환이 되었을때, 집안 누가 조총련이었다면 그 사람은 반쯤 죽었을 것이다. 또 그 고문을 못이겨 간첩이라는 누명까지 쓴 사람도 있다.

조총련도 문제이지만, 당시 연좌제를 실시한 집권정부도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1960년대 일본과 북한을 왕래하던 만경봉호. 북송되는 동포들을 환송하고 있는 군중들 모습. ⓒ제주의소리/ 출처=국가기록원

조총련

정식 명칭은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라는 단체이며, 북한정부의 일본지부이다. 현재 조총련 최고간부 6명이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한국의 국회의원에 해당)직에 있다. 북한과 일본은 국교가 성립되지 않았기에 북한의 대사관이 일본에 없다. 그러나 조총련 최고 간부6명은 북한 국회의원에 들어가 있다. 그것 뿐만 아니다. 만약 북한정부 당국이 검은 것을 하얗다라고 하면 조총련도 따라서 하얗다, 라고 하고 있다.

일본이란 정보에 열린 나라에서 모든 정보를 접할수 있는 사람들이, 검은 것을 하얗다 라고 말할 때는 갈등도 어지간히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총련을 북한의 일본지부라고 말하고 있다. 조총련에 소속했던 양심과 지식이 있는 분들이 조총련을 탈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구동성으로 검은 것을 하얗다 라고 말해야 되는 양심적 갈등에 있는 것이다.

조총련에 소속되 있는 사람은 우리 한민족이다. 고향이 북한이라서 조총련에 소속되 있다는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전체 재일동포 58만9천명 중에 본적지가 북한인 동포는 약 2천7백명에 불과하다(2008년12월말 일본 법무성 통계). 이상하게도 조총련 골수분자들 중에는 본적지가 제주도인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본적이 북한인 동포 몇몇은 민단에 소속 되어, 북한동포 인권문제에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1969년에 한국적과 조선적이 역전한다. 이때까지 조총련은 동포 반수이상이 가입된 세력이 상당히 등등한 단체였다. 이 시절은 민단에 가입을 하면 총련사람으로부터 왕따를 당했던 시절이기도 했으며, 민단에서는 할수 없는 활동까지 해 가며, 세력을 지탱시켰다. 그러나 1975년부터 민단 및 한국 정부가 실시한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단(성묘단)으로 많은 조총련계 동포가 꿈에 그리던 고향땅, 또 부모형제들을 만날수 있었다 (2000년까지약5만명이 모국방문단으로 한국 방문). 이 모국방문단을 계기로 조총련계 동포수가 줄기 시작한다. 물론 이 모국방문단으로 한국을 방문하려는 자기 소속의 동포들을 한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할려고, 여러가지 방해 공작을 상당히 심하게 했음을 경험자들이 말하고 있다.

그후 한국의 경제발전, 국제적 지위 고양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조총련을 탈퇴 민단으로 전향하는 동포들이 줄을 잇게 된다. 요즘 일본 국내 TV들은 한국의 구석구석까지 아무 거리낌없이 방영한다. 한국의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일본 국내에서 알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또 최근들어 조총련을 곤란하게 하고 있는 것은 일본인 납치자 문제이다. 이제까지 북한은 일본인을 납치 한 적이 없다고 발뺌 해왔다. 그런데 2002년 북한을 방문한 일본 고이즈미(小泉) 총리에게 김정일 위원장이 정식으로 일본인을 납치했다고 인정해 버렸다. 이로 인하여, 일본에 있는 조총련은 상당히 입장이 난처해 지고, 또 일본 국민들로 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세계정세, 한국의 위상향상, 한일관계,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 또 최근의 한류 붐 등, 조총련에서 보면 좋은 요인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계속 조총련에서 탈퇴해서 한국 민단으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전체 재일동포 58만9천명중, 해방전부터 일본에 살았던 또 그의 자손인 특별영주자는 41만6천명이다. 특별 영주자이외의 사람으로서 국적이 조선적을 가진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일본 정부에서는 우리 재일동포 숫자를 국적이 한국과 조선을 구별해서 발표하고 있지 않고, '한국·조선'식으로 발표하고 있다. 조선국적자의 숫자는 추정을 해야만 한다. 현재 약 2만∼4만명이 조선국적을 가진 것이 아닐까 라고 추정하고 있다. (전회에 조선 국적을 가진 사람은 약 7만∼8만명이라고 추정하였으나, 그후 여러 관계자들과 토론을 거치는 과정에서 약 2만명∼4만명정도가 아닐까 라는 추정하게 되었음)

그러면 조총련에 소속된 동포들은 얼마나 될까? 이 숫자도 추정이다. 2006년 약10명이라는 일본 공안의 통계가 있으나, 현재는 7만 혹은 8만명정도가 조총련에 소속되 있을 것이다. 약 4만 혹은 5만명이 한국국적을 가지면서 조총련에 소속되여 활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총련 산하의 각 단체는, 단체의 회장은 조선국적을 가진 사람만이 할수 있으며, 부회장과 그 이하는 한국국적으로 전환을 한 사람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조총련 조직이 성립 될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조선국적을 가지며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조총련의 핵심멤버로 볼 수 있다.

   
▲ 북송돼 온 재일교포들을 환영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 ⓒ제주의소리/ 출처=국가기록원

북송동포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약9만3천명이 북한으로 갔다. 이중에는 동포 남자와 결혼한 일본인 부인 및 그 자식 등, 일본국적을 가진 사람도 약6천8백명이 포함돼 있다. 북송동포 9만3천명의 약70%이상에 해당하는 7만4천명이 1960년 61년에 북한으로 갔다(1959년은 12월부터 북송이 시작되었기에 약 3천명에 불과)1959년은 6·25사변이 끝나서 6년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때이다. 6·25사변 후기에는 미군 공군은 제공권을 확보해 있으면서 북한의 대도시, 특히 평양은 전멸에 가까운 폭격을 했다.북한의 요청에 의해 일본 정부는 각료회의(한국정부의 국무회의에 해당)에서 승인했으며, 형식적인 창구역할은 북한및 일본 적십자사, 실행은 조총련이 한다.

조총련은 북한을 "지상의 낙원", 북한에 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자기 희망데로 성취 할 수 있다는 등, 동포들을 북한으로 데려가기에 혈안이 되었다. 왜 북한은 일본에서 동포들을 데려갈려고 했을까? 북한은 6·25사변때 인적 피해를 많이 입게 된다. 복구에 노동력이 필요한 것이다. 또 당시는 냉전의 절정기였다. 일본이라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북한이라는 공산주의 국가로 대단위 사람들을 자기발로 이동하게 되면,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우위의 사상이라고 선전도 하고 싶었다. 특히 공산주의의 맹주 소련이 더욱더 선전하고 싶은 것이다.

일본은 어떤가? 외국인 신분으로 일본에 있으면 두고두고 골치 아픈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을 터인데, 북한에서 데려가겠다고 나섰으니 양손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다. 이때 일본에 있는 동포들의 생활수준은 일본인 보다 더 열세여서 생활보호까지 해 주어야 될 상황이었다. 실제 생활보호대상자수는 일본인의 몇배가 더 많았다.

한국은 어떻게 했는가?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 외교적 실력적 수단으로 또 민단은 민단대로 힘으로 저지할려고 했지만, 저지가 되지 않았다. 북한으로 가는 사람, 또 남는 사람들도 서로 반신만의 하면서 배를 탔고 보냈다. 북한에 가서 일본에서 들은 말 그대로 라면 잉크로 편지를 쓰고, 만약 다르다면 연필로 편지를 쓰라는 등, 서로들 암호를 써가면서 방책을 강구했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 동포들의 공기 또 일본 사회의 공기는, 희망에 넘치는 나라 북한이라는 분위기 였다. 60만 동포중에 약10만의 동포가 배를 탔다. 아사히 신문의 기사가 있다. 굶주린 나라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못먹고 못 살아서 일본으로 밀항을 오지만, 지상의 낙원 북한은 사람들을 데려간다,라고 쓰고 있다. 그 기사를 쓴 기자, 지금 한번 만나고 지금의 심정을 듣고 싶다.

북송동포의 결과? 말로서 표현할 필요가 없다. 약10만명중 지금 생사를 알수 있는 동포, 얼마나 될까? 생사를 알수 있는 동포들은 그나마 일본에 남은 가족들이 살려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 있는 가족들이 돈을 보내줄 때까지는 그나마 조금은 우대를 해 주지만 돈이 끊어지면 일반 북한 동포보다 더 처참해 진다는 것이 일본에서의 상식이다. 북송동포, 우리민족의 비극이다.

제주도 출신 할머니.

일본에서 차별받고 사느니, 희망의 나라 북한으로 아들을 보냈다. 이 할머니는 일본에 남았다. 할머니는 나이가 들었지만 죽기 아니면 살기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짤리기라도 한다면 어쩔가 싶어 나이를 속이면서 까지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 모습이 너무 처절하다. 북한에 사는 아들을 위해서 나이들고 아픈 몸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북한을 다녀왔다. 아르바이트 일을 와서는 한숨만 쉰다.

집안에 있는 것 없는 것, 또 버리는 것까지 다 모아서 북한에 가서 아들을 만났다. 기부를 많이 하면, 호텔에서만 만날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 집까지 갈수가 있단다. 다행히도 아들 집에 까지 갈수가 있어서, 손자들과 그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한국 일본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대일밴드를 북한에서는 신기하게 보이는 것이다. 손자가 상처도 안난 얼굴에 멋으로 붙치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자랑을 했었다는 것이다. 이 모습을 본 할머니는 한숨이 안나올수가 없다.

이 할머니 언제 또 돈을 모아서 북한에 갈수 있으런지, 이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될런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어느 선생님

어느 선생님은, 아버님도 또 장인 어른도 조총련의 간부를 하신 분들이다. 대를 이어 수령님께 충성을 한 집안이다. 그 선생님은 학식과 인격에서 필자가 존경하고 있는 분이다. 물론 조총련에서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하신 분이다.

그 분 형님과 동생이 북송동포로 북한에 갔다. 형님은 대학생 시절때, 동생은 초등학교 시절때 북한에 갔다. 형제가 북한에 있기에 이 선생님은 수십번 북한엘 갔다왔다. 조총련에 소속되 있으면서 검은 것을 하얗다 라고 말하라는 데서 상당히 갈등이 심해졌다. 그래도 형제가 북한에 있는 것이다.

북한에 가면서 결심한다. 이번에 가면 형제들에게 다시 오지 않으마, 라고 선언하고 오리다. 그러나 그 선언이 입에서 나올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몇번을 가고 오고. 마지막으로 갔을 때, 형님 집에서 잠을 잘수 있었다.

'형님, 오늘은 형님과 나하고 둘이서만 같이 잠을 잡시다'

잠을 자다가 밤중에 형님을 깨운다.

'형님, 일어나십시요. 이야기 좀 합시다'
'형님, 이번 내가 일본에 돌아가면 다시 북한에는 오지 않겠습니다'

북한에 오지 않겠다는 것은 민단으로 또 한국국적으로 전향을 하겠다는 이야기이다. 형님은 아뭇소리 하고 안고서 침묵만이 한참 흘렀다.

'그래 알았다. 너만이라도 행복하게 살아라'

그러면서 또 침묵과 눈물만이 형제간 사이에 있었뿐이다. 동생 집에 가서 자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생에게 이야기 했다.

'오늘 밤은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만 한방에서 자자'

밤중에 동생을 깨웠다.

'나는 이번에 일본으로 돌아가면 다시 오지 않겠다'

동생은 밤중에 난리를 피우는 것이다.

'형님이 일본에서 우리를 도와 주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다 죽습니다'
'형님의 도움이 없으면 조카들 대학도 못 갑니다'
'형님. 그러시면 안됩니다'

그 선생님 형님은 대학생때 북한에 갔기에 말은 못하지만 북한과 일본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또 본인의 처지를 알수 있기에 일본에 사는 동생에게 그런 말을 할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초등학교 시절에 북한에 갔기에 형님에게 억지만을 쓰는 것이다.

형제사이에 이런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그 고통, 우리 한민족은 진정 한이 많은 민족일까? 지금도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지 않고서(바꾸지 못하고) 조선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가족이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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