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민단과 한국학교

6•25사변이 끝난 1960년 70년대, 한국은 반공이 최우선이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제일 꼭대기에는 반공만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에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필자 머리 속에는 빨간색이란 있을 수 없고, 오직 파란색만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있는 동포들은 그게 아니었다. 한국에서 못하는 전쟁을 일본에서 대리로 하고 있었다. 북한 대리 조총련과 한국 대리 민단이 총만 없었을 뿐 육탄공격을 하면서 전쟁을 했고, 또 총으로만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뿐 총보다 더한 무기로 사람들을 곤경에 몰아 가곤 했다.

해방 후 초기 및 박정희 정권 1970년까지는 조총련이 우세였다. 한국국적 동포 숫자와 조선국적 동포숫자가 1969년에 역전하여, 한국국적 동포숫자가 많아진다. 이때까지는 조총련에 소속 돼 있지 않으면 주위에서 비꼼을 받아야 하는 그런 때였다. 그러나 지금 조총련 세력은 많이 약화 되였다.

해방이 돼 곧, 1945년10월에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連盟, 조련朝連)이 결성된다. 공산주의자도 민족주의자도 협화회 간부였든 사람도 다 모여서 범민족적 국민적 단체를 만들었지만, 1946년 임시대회 때부터 좌경화로 기울어 진다. 이 단체는 처음부터 좌경화로 갈수 밖에 없는 단체였다. 그래서 협화회 간부 출신들을 추방하고, 좌경화를 우려한 사람들은 떠난다.

조련의 중심은 처음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공산주의자들 이외 사람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는 되는 그런 조직이 되고 만다. 그러기에 처음부터 자연히 북한을 지지하게 되며,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빠져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단체가 민단(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在日本大韓民國民團)이다.

조총련은 초지일관 북한의 일본 대리점이라면, 민단은 초지일관 한국을 찬양하는 단체이다. 한국 대리점 민단은 한국을 지지하지만, 정권과는 어찌 했을까?

1950년대 반일주의자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이 되었지만 일본에 남아있는 동포들을 그리 좋게 보지는 않은 것 같다. 일본에 와서도 민단대표들을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6•25사변 때는 재일 청년학도 의용군(在日靑年學徒義勇軍)으로 641명이 참전하여 144명이 전사를 했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 정권이 들어선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 일본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또 한국경제 재건을 위해서 재일동포들의 자본도 필요로 하기에, 정권과 민단이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이 시기가 민단의 전성기였다.
이때는 동포가 여권을 취득하려면 민단을 통해야 됐다. 본인이 대사관 영사관에서 직접 발급 받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민단사무실을 가면, 지금까지 회비 체납이 있었다면 소급해서 전액을 바쳐야 여권을 만들 수 있었다. 이때 트러블이 있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몇몇 사람은 이 민단 단비 트러블 때문에 일본사람으로 귀화한 사람도 상당수 있다.

당시에는 재외국민수첩이라고 있었다. 민단을 통해서 영사관에서 발급해 주는 재외국민증이다. 한국의 주민등록증의 해외동포 판이다. 한국 갔을 때 일본에서 온 동포라면 혹시 민단을 빙자한 간첩이 아닌가라고 안경을 쓰고 바라보게 되며, 비꼼도 받게 된다. 그때 한국 국내는 학생도 국민도 이런 식의 반공교육이었다. 이런 때는 이 증명을 보이며 나는 아무 의심이 없는 당당한 한국사람이라고 열심히 증명을 해야 한다.

1960년대 70년대의 한국은 경제 부흥을 위한 자본이 없었다. 한국정부는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 오는데 혈안이 된 때였고. 베트남(월남)에 군인들을 파병하여 생명으로 돈을 벌어야 했고,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내 고생으로 돈을 벌어야 했고, 중동나라에 노등자들을 보내 땀으로 돈을 벌어야 했던, 지금과는 상상도 못 할 그런 시대였다. 당시 어딜 가나 ‘재건' 이란 구호였다. 학생들은 '재건'이라 쓰여진 리본을 교복에 달고서 등교를 해야 했고, 만약 그 리본이 없으면 복장불량이라고 등굣길 교문에서 선생님에게서 기합을 받아야 했다.

이때, 해외동포로서 한국으로 자본을 가져 갈수 있는 능력이 있는 동포들은 재일동포들밖에 없었다. 롯데 또 방림방적 등과 같은 거대 자본도 들어 갔다. 그러나 작은 자본, 동내에 풀어주는 푼돈도, 친척에게 주는 호주머니 돈도 들어오기만 하면 좋았다.

당시는 해방 전 1세들(해방 전에 일본에 온 동포들)이 젊었을 시대였다. 말단 민단조직인 지부단장은 거의가 1세들이 했다. 말단 지부단장 명함도 한국에서는 상당한 기능을 발휘하게 하여, 작은 돈이라도 많이 들어오게 했다.
 
그러나 군사독재정권, 그 후 전두환 정권은 한국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인정 못한 정권이었다. 특히 군사독재정권, 또 전두환 정권과 광주사태 등은 조총련에게서 많은 조롱을 받으면서 한국 정부를 지지해야만 했다.

민단계 학교는 일본에 4개 학교가 있다. 오사카(大阪)에 2개 학교, 교토(京都)에 1개 학교, 도쿄(東京)에 1개 학교가 있다. 초등, 중등, 고등부를 두고 있으며(교토는 중등, 고등부) 오사카와 교토는 일본에서 정식 학교로 인정받는 학교이지만, 도쿄의 한국학교는 각종 학교이다.

일본 4개 학교는 재일동포 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민족심이 있는 동포를 배출하려는 목적으로 출발 했지만, 지금 학생의 분포는 반 이상이 한국에서 온 주재원 등 자제들이고, 반 이하가 동포들의 자제로 구성되고 있어, 처음의 목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개탄하는 동포들도 있다.  거기에 동포출신 학부모들과 한국에서 온 학부모들과 화합도 그리 잘 맞지 않아, 가끔씩 불협화음의 소문도 듣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일본에서 공부하신 동포 선생님 혹은 일본인 선생님이고, 1개 학교에 몇몇 선생님은 한국정부에서 파견된 선생님도 계시다.

일본에서 정식학교로 인정을 받으려니, 일본정부가 지정한 과목들을 망라해야 한다. 한국어 등 한국과 관련된 과목은 자연히 적어지거나 과외활동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한국학교를 졸업해도, 특별히 자기가 한글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한 한국어 실력이 시원치 못한 것을 보고 있다.

교토(京都) 한국 학교는 야구부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교토부(京都府)에서 야구 명문고교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서 야구 유학을 오고 있고, 야구를 하고 싶은 일본학생들도 입학을 하고 싶어한다. 이 고등학교 졸업생으로 신성현 선수는 2009년에 일본 프로야구 히로시마에 입단을 했다. 한
국에서 덕수중학을 졸업, 야구유학으로 교토한국학교에서 실력을 발휘, 프로입단한 선수가 되었다. 앞으로 계속 지켜보고 싶고 싶다.

오사카 한국학교 건국고등학교는 최근에 졸업생이 연이어 동경대학에 입학했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진학교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일본 속에 있는 민단은 어떤 단체 일까?
중앙에 중앙본부(東京)가 있고, 단장, 의장, 감찰위원장의 3개 기관이 기본이다. 단장은 사업을 실행하는 집행부의 장이고, 의장은 국회의장에 해당하며, 감찰위원장은 감사기능을 한다. 이 기관장들을 선거로서 선출한다. 선거로 선출하는 것이 조총련과 다르다. 조총련은 위에서 지명을 받아 내려온다.

중앙본부의 단장은 한국에서도 동포사회에서도 상당한 지위로 인정받아, 치열한 선거전을 하게 된다. 지방에는 일본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에 지방본부가 있고, 지방본부 밑에 지부를 두고 있다. 지방본부도 지부도 중앙과 같은 3개의 기관을 기본으로, 선거로서 기관장을 선출하고 있다.
 
조총련의 경우는 최고간부 6명이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한국의 국회의원에 해당)직에 있다. 민단은 중앙단장이라도 한국 국회의원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몇몇 인사는 한국 국회의 비례대표제로 국회에 들어간 적이 있다. 민단 단장이라는 자동직으로 국회에 들어간 것은 아니라, 본인과 한국과의 파이프가 좋아서 들어간 것이다.
 
오사카의 경우, '오사카 지방 본부'가 있고, 그 밑에 각 구(區)을 기준으로 32개의 지부가 있다. 동포가 제일 많은 이쿠노구(生野區, 생야구)는 구(區)를 4개로 나누어 지부가 있었으나, 지금은 2개 지부가 하나로 통합, 3개 지부가 있다.

오사카 지방본부 단장은 오사카 동포사회에서 발언력도 있고 실력자로서 얼굴이 있다. 그러나 동내 지부 단장은 누가 그리 대단히 알아주는 것도 없다.

문제가 나오고 있다. 중앙 단장, 각 지방(47개 도도부현)의 지방본부 단장 선거는, 선거로서 기능을 하고 있지만, 지부 단장 선거는 입후보자가 없어 선거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되고 있다.
1세들은 한국과 고향에 파이프를 가지고 싶어했고, 고향에서도 좋은 얼굴이 되고 싶어했다. 민단 간부, 특히 조그만 지부라고 할지언정 민단 단장은 고향에서도 알아주는 좋은 명함이 되었다. 그 명함은 본인의 가족은 물론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자랑이 되는 좋은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태어난 2세 이하 동포들은 고향이 일본이다. 한국 혹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1세와 같지 않다. 또 한국에 알고 있는 사람도 적다. 민단에 적극적으로 관계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특별히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사람들을 빼고는 1세들은 적어지고 있고, 2세 이하 동포들은 민단에 관심이 없어지고 있다. 큰 문제이다. 그래서 지부 단장은 할 사람이 없어서 선거가 성립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또 지금 한국에서 일본으로 오는 비행기 1세들의 포섭에 실패했다. 민단에 가고 싶어하는 비행기 1세들 극히 적다. 필자도 민단에서 부름을 받아 가능한 한 협력 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그러나 입으로는 들어오라 하면서, 들어가 보면 많은 다름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국에서 지금 온 후배은 먼저 오신 선배님들이 군기 잡는데 좋은 밥이 되고 있었다.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다. 군기의 밥이 되면서까지 굳이 가고 싶은 심정이 나오지 않았다.

밀항 1세들까지는 민단에 잘 들어갔다. 그러나 해방 전 1세와 밀항 1세들인 Old Comer와 비행기 1세들인 New Comer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Old Comer들은 한국 전체가 고생을 할 때 일본에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비행기 1세들은 한국이 어느 정도 살만한 후에 일본으로 온 세대들이다. 일본에 와서 하고 있는 일들도 서로 다르다. 해방 전 1세와 밀항 1세들은 술과 물 같다면, Old Comer와 New Comer는 기름과 물 같아서, 서로 어울리기가 쉽지 않다.

결과 비행기 1세(New Comer)들은 민단과 다른 한인회를 조직하려고 하고 있다. 지금 지부에 있는 단장 및 기관장들 또 간부들은 밀항1세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민단은 지금 지부 단장 선거가 성립 되지 않는 등 민단 앞날이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해방 후 긴 역사 속에서 우리 재일동포들의 권익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해 온 게 사실이다. 외국인등록증 지문 철폐는 일본사회의 차별과 꾸준한 투쟁에서 얻어낸 것이다. 또 조총련과도 투쟁을 하면서 발전해 왔다. 동포들을 북한으로 가게 하는 북송동포에 관해서는 피를 흘리면서 반대 투쟁을 했다.
 
또 민단의 당면 최대의 목표로서 일본의 지방선거 참정권을 획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각 도지사 시장 및 지방의회의 의원들의 선거에 참여를 시켜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지방선거에 참정권이 획득이 된다면, 선거에 입후보한 입후보자들이 우리 동포들의 소리를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은 한국내 정주 외국인에게 지방선거 참정권을 부여하고 있지만, 정치 후진국 일본은 아직도 정주 외국인에게 참정권이 없다. 이 참정권 투쟁에서 조총련은 반대를 하고 있다.

일본 사회에서 민단은 없어서는 안될 단체이다. 당면한 여러 가지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하면서 오래오래 일본에 남아있어야만 동포들에게도 좋다.<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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