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16) '가난-Japan Dream'의 日밀항

왜 한국사람들은 특히 제주도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갈려고 했을까?
일본 밀항의 가장 큰 이유가 가난이라고 하지만, 꼭 가난만이 사람들을 일본으로 가게 했을까? 가난이 가장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Japan Dream도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시는 일본 제품(일제)는 너무 좋았다. 한국제 물건과는 비교가 않될 정도로 품질이 좋았다. 교포 친척들이 고향방문때 가지고 온 학용품, 돔보(잠자리) 연필. 한국산 연필과는 비교가 않되게 품질이 좋았다. 학교에 가지고 가면, 그날로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그후에 나온 연필깎는 기계, 이 기계는 한참 후에야 국산이 나왔지만 품질은 일제 근처에도 못갔다. 1970년에 나온 '소니'의 '워크 맨'은 한국 대학생 누구도 가지고 싶었던 기계였다. 그러나 그야말로 하늘의 별이었다. 1980년대에 나온 일제 코끼리표 밥솥, 한국 어머니 누구도 가지고 싶었던 가정 용품이었다. 그 밥솥으로 밥을 만들면 밥 맛도 좋았다.

고향방문으로 제주도를 찾은 교포들은 어떤 모습인가? 얼굴이 금빛이었다. 가난한 제주도에 돈도 잘 풀었다. 가족의 어려운 모습에도 동내 어려운 모습에도 돈을 잘 풀어, 마치 천국에서 온 금빛 얼굴을 가진 모습이었다.

당시는 제주도에 TV가 없었다. '라디오' 가 최고 였다. 라디오를 켜면 제주방송보다 일본방송이 잡음이 적었다. 나가사키(長崎)방송 이었다. 제주도에서 제일 가까운 일본은 나가사키다. 여자 아나운서가 말하는 일본말은 유리위에 구슬이 굴러가는 소리 같았다. 필자의 대학에 나가사키 방송 남자 아나운서 출신 선생이 있다.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고 있다.
 
이런 모습들이 우리들의 머리를 일본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여권 만들어서 비행기 타고 갈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갈수 있는 방법이라곤 밀항선이었다. 여자들은 비행기 타고 갈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결혼이었다. 교포 총각들이 제주도에 와서 색시를 얻어갔다. 뽑힌 색시들은 정식 결혼을 하고 정식 여권에 비자를 만들어 비행기 타고 일본으로 갔다. 치열한 경쟁에 이겨 국제선 비행기를 타는 색시는 큰 벼슬, 그것도 장원급제를 한 모습이었다.

빈곤, 제일 큰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다. 그러나 밀항자 전원이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말할수 있을까? 밀항자의 연령층은 20대가 제일 많았고, 다음으로 10대 청소넌 그 다음으로 40대 중년층이었다(경향신문 1964년3월9일 밀항특집 「日本密航의 生態」참조). 30대 40대의 경우는 한국에서 직업이 없어서 수입이 없어서 곤란했기에 밀항배를 탔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20대 10대가 더 많았다. 그리고 일본에 정착한 남자들을 보면 군대에 가기전에 일본에 온 사람이 상당히 많다.
 
오사카에는 재일본 오현고등학교 동문회, 재일본 제주제일중학교 동문회,재일본 제주북초등학교 동문회가 있다. 필자의 출신학교인 제주북초등학교 동문회에는 해방전 1세들이 몇분 계시다. 여자 동문들은 대다수가 결혼으로 왔다. 필자부터 그 이하가 비행기 타고 왔다.

필자의 출신학교 제주제일중학교 동문회는, 필자는 제주일중 20회 졸업생으로 1971년에 졸업했다. 1회 졸업생이라도 1951년 졸업이다. 일본에 있는 1회 졸업생이라도 해방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왔다는 것이다. 필자보다 밑의 졸업생은 아직 멤버가 없다. 필자만 유학생으로 일본에 왔을뿐, 다른 동문들은 전원 밀항이다. 필자와 같은 동급생도 밀항으로 왔다.

 이런 남자들의 모임에도 군대를 갔다와서 일본에 온 사람은 극소수다(필자와 선배 한분만 군필). 전원이 10대 20대때 일본에 왔다. 중학교를 다니다 온 선배도 있고, 고등학교를 다니다 온 선배도 있다. 또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온 선배도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군대 적령기이다. 그러나 군필 선배는 극소수이다. 1960년대는 한국군대가 월남(베트남)에 파병할 때다.

어린 나이에 일본에 왔다면, 빈곤만이 이유가 아니라, Japan Dream도 생각 할 수 있다. 물론 그 나이에는 본인의 의사보다 부모의 의사가 강력하게 등을 밀었던 것이다.

일본에 잘 가면, 1년에 큰밭 하나씩 사서 부자가 될수 있고, 무슨 수로 등록 만들면, 금빛 얼굴로 고향에 와서, 집안 일, 동내 일 잘보게 되면, 그 집안까지도 동내에서 금빛 집안이 될수 있다.

일본 밀항배는 어떻게 탔을까?
1950년 전후까지 제주도에서 밀항배를 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많은 동포들이 조국 특히 제주도로 돌아왔다. 당시의 한국은 그들을 따뜻이 맞아줄 조국이 못되었다. 식량난에 생활고 또 4·3사건 마져 만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일본을 향하게 했다. 당시 일본을 향한 사람들은 일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본 어디든 상륙만 하게 된다면, 일본 사람 행세를 하면서 목적지까지 갈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나 그들과 같이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는 동내 포구에 메어둔 남의 배를 훔쳐서, 남자 2명이 물과 식량만을 가지고 동쪽으로 향하기만 했다.

일본 어딘지도 모르는 곳(아마도 九州 어느 곳)에 상륙하게 되었다. 배를 멀리 보내버리기 위하여, 해변가 멀리에서 배를 내려 헤엄쳐 상륙하고 배는 흘려 보냈다. 만약 한국배가 발견이 되면 밀항자가 상륙한 것을 알고 경찰이 비상경계에 들어가면 잡히고 만다. 이들은 배만 바다 한가운데로 멀리 가버리면 의심할 사람 하나없이 유유자적히 일본 사람 행세를 하면서 목적지까지 갈수 있었다. 기차를 갈아타면서 오사카까지 호강하면서 잘 와서는, 옛날 여자에게 찾아가서 땡강까지 놀아 용돈 잘 뜯어내 받고서, 그 돈으로 한참을 술 잘 마신 사람까지 있다.

이런 경우는 아주 특수한 경우이다. 시기적으로 해방후 바로이고, 또 그때는 일본도 외국인 등록법이 확정되지 않은 때였다. 이런때는 일본에 살아 본 사람은 일본 가기도 쉬웠다. 상륙만 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때였다. 1950년전까지가 이렇게도 할수 있을 때였다.

1950년 한국 6·25사변이 발발하면서 밀항자가 급증하게 된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은 쓰시마(대마도, 對馬島)다. 쓰시마에서는 밤에 부산 불빛이 보일 정도로 부산과 쓰시마는 가깝다. 밀항하겠다는 사람은 쓰시마를 향하게 된다. 일본정부는 쓰시마(대마도, 對馬島)를 봉쇄한다. 쓰시마에서 규슈(구주 九州)로 가는 여객선및 어선의 검문 검색을 강화하고, 또 규슈에서 일본 본토로 가는 여객선과 어선까지 검문 검색을 강화하여 밀항자들을 잡아내려고 혈안이 된다.

어느 분(제주시 삼양출신)은 1950년에 밀항한다. 부산에서 목적지(오사카,大阪)까지 데려다 준다는 조건으로, 쓰시마까지 부산 중개인이 데려가고, 쓰시마에서는 현지 중개인(현지 브로커)이 오사카까지 데려다 준다는 것 이었다. 쓰시마까지는 잘 상륙했다. 저기 보이는 언덕에 숨어 있으면 현지 부로커가 올 것이니 올라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현지 브로커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속은 것이다. 배도 고팠다.한복 치마저고리를 입은 어머니처럼 생긴 우리 한국 아주머니가 보이길래,그분에게 하소연 할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마음씨 좋은 한국 어머니였다. 자기 집에 데려다가 숨겨주고, 또 오사카에 전화연락까지 해 주는 것이다. 오사카에 있는 친척이 직접 쓰시마까지 왔다. 어선을 빌었다. 또 한번의 일본국내 밀항을 해야만 했다. 규슈(九州)로 가서 본토로 향한다면 또 한번의 위험이 있는 것이다. 어선으로 쓰시마에서 일본 본토로 가는 밀항을 하는 것이다. 본토에 가서 기차를 타기만 하면 위험 부담이 아주 적어진다. 본토에서는 기차노선도 가지각색에 종류도 다양하다. 아무리 일본 경찰이라해도 이런 각양각색의 노선을 전부 다 봉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에 오사카에서 온 친척이 데리고 가기에 큰 문제없이 오사카에 잘 도착했다.

오사까에서 대학원을 졸업, 역사학 박사로서 지금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이조 사상사에는 최고 일인자의 대학자이시다. 당시는 쓰시마에 우리동포들이 상당수 살고 있었다. 우리 동포들은 쓰시마에서 산림관계 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 나무를 벌목하거나 숯을 굽는 일이 우리 동포들의 일이었다. 한국과 가까워서 쓰시마에 사는 것이 아니라,힘든 일이라 일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이라 우리 동포들이 일을 찾아 쓰시마로 가서 일을 해야만 했다. 당시를 쓰시마에 살았다는 나이드신 동포들을 오사카에서 많이 볼수 있다.

밀항은 한국국내에서도 일본국내에서도 불법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1974년 8월에 법을 개정, 지금까지는 징역3년이하에서 징역 5년이하로 강화하고, 교사 방조자도 1년이하의 징역에서 3년이하의 징역으로 늘린다. 그러나 밀항은 줄어들지 않는다.

50년전(정확히는 46년전) 1964년3월9일자 경향신문에 일본 밀항 특집 기사가 있다.1960년대의 밀항 실태를 당시의 눈으로 쓴 좋은 자료이다. 전문을 실고 있으며, 사람이름도 원문 그대로 실었다. 이 기사에서 보면, 일본은 커녕 한국에서 잡히고마는 사람들도 1/3쯤 되는 것을 알수 있다. 나머지 2/3만이 일본 땅을 밟는 것이다. 또 1963년에 한국으로 강제송환자는 오무라 수용소가 발표한 숫자와 기사 속의 숫자가 일치한다.

이때는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밀항에 대해서 이 정도의 내용은 상식쯤으로 누구도 알고 있었으며, 특별한 사실이 아니 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신문은 특집을 만들고 있다. 밀항 길이란, 한국 경찰도 무서웠고 일본 경찰도 무서웠다. 경찰 이전에 무서운것이 하나 더 있었다. 사기꾼이었다. 밀항시켜 준다고 돈을 받고서 돈 받은 사람은 온데간데 없어져 버리는 일도 많았다. 일본에 간다고 돈 한짐 짊어지고 집을 나서더니 중간에서 사기 당해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 너무 꼴좋은 패잔병 모습이었다. 일본 밀항의 가장 큰 동기는 가난이었지만 꼭 그렇치만도 않고 Japan Dream도 있음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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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密航의 生態 (경향신문 1964년3월9일)
日本密航의 生態, 여기 問題點이, 거의 無職者들, 봄바람타고 부쩍늘어.

봄바람을 타고 일본으로 밀항하는 한국인이 부쩍늘었다. 일본측에서도 한국인 밀입국자 적발에 골치를 썩이고 있는 눈치인가 하면 일본배를 타고 밀항하던 사람4명이 배안에서 변사한 사건까지 일어났다. 조국을 등지고 일본으로 가야만 하겠다는 이들의 "밀항의 생리"를 알아본다.

"직업이 없어 굶어죽을 형편이고 장차 사는 낙이 없을바에야 형무소 가는 것을 각오한다" 이것은 조국을 등지고 日本으로 밀항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밀항동기이다. 부산시경에 의하면 지난 1월중에 밀항자는 1건1명인데 2월에 들어서는 3건에 7명(男)으로 늘어만 가고있다. 작넌도만해도 부산시경 관하에서 검거된 밀항자가 19건에 2백44명(男156명,女88명)인데, 작년도에 일본 大村수용소로부터 밀입국자로 강제송환 되여온 밀항자는 무려4백62명(男336명 女126명)으로 국내에서 1넌간 검거된 수의 거의 배나 되는 2백18명이나 더 많다.

밀항자는 20대를 수위로 10대 청소넌, 40대 중년의 차례로 많은데 이들의 밀항동기와 밀항경위및 검거상황등을 실제 밀항했던 사람들과 관계당국을 통해 들어보면 역시 가난보다도 부푼 꿈이 큰 이유가 되고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일본등지에서 성공한 부모, 형제자매 또는 친척과 친지들로부터 평소 편지 연락을 받을때마다 '오기만 하면 돌봐 주겠다' 는 선심약속을 받고 돈벌이를 목적으로 또는 공부할려고 마침내 밀항을 결심한다.
 
어떻게 갔나
밀항자의 8할은 일본과 가까운 제주도 출신으로 현거주지가 부산 影島인 경우가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밀항자는 「영도」太宗臺 조선공사앞 해상 아치섬, 동백島(海雲臺), 機張(東萊), 多大浦등 육상교통이 편리한 부산근해를 택한다. 전문적으로 밀항업을 하는 자들이 선주로부터 3톤에서 15톤정도의 조그마 한 발동기 또는 범선을 한번 밀항에 5만원에서 최고20만원까지에 빌어, 밀항자는 한사람앞에 5천원(年少者)에서 1만원(大人)까지 밀항비를 내고 이 배를 탄다.

한번에 10명에서 30명까지의 남녀밀항자들은 중개인(密航專門家)들을 통해 모집되는데 극비리에 모집하여 같은 밀항자끼리도 떠나는 순간까지 모르게 하는 치밀한 조직이 되여 있다. 밀항하는 일시, 장소를 정해주면 밀항자들은 이미 배가 준비된 해안부근의 민가 또는 무인도에서 기다렸다가 약2일간의 식량을 싣고 통금시간 전후의 시간을 이용, 출항한다. 이밖에 외국 또는 국내 선박의 관리자들에게
돈을 주고 선원을 가장, 외항선박에 잠입(潛入)하는 경우도 있다.이들은 일본 北九州인 福岡 下關을 비롯하여 大阪 名古屋 東京灣등에 밤을 타고 입항 상륙하게 된다.

잡히기 까지 밀항자들을 극비리에 조직할때 일정한 요금에 미달하면 거절당하는 밀항미수자들도 있다. 이들은 홧김에 밀고를 하는것을 비롯하여 사복경찰관이 밀항자들을 감쪽같이 가장도 하고 외항선박등에 잠입했다가 세밀한 검색때(出航時) 적발하기도 한다. 또 影島 서해상보안반의 해안검색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한편 일단 밀항에 성공한후 日本에서 사는동안 原住民들의 밀고(日本서 1件의 密航者를 신고하면 상금이 日貨 5천엔) 또는 서툰 일본말씨 때문에 오래 살다가도 일본 관헌에 적발되여 大村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강제송환 되여오기도 한다. 밀항자도 갖가지. 中졸이상이 7할이나 되는 「인텔리」밀항자들 가운데는 9년동안 세번이나 밀항했다가 일본관헌에 잡혀 그때마다 강제송환된 20대가 있는가 하면 작은 배에 많은 사람이 타고 밀항하다가 기관고장으로 생쌀을 씹으며 나흘동안이나 표류한 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남녀16명도 있다. 또 '땅을 갈아 치부해 보겠다'는 꿈으로 「브라질」이민선에 잠입했다가 배가 고파 香港 영사관에 자수한 우등밀항자들도 가지각색이다.

▲慶南중학교를 졸업한 朴壽吉(25 金海군進永읍東山리)씨는 처와 네살난 아들까지 있으나 조그마한 농사로는 도저히 살수없어 日本에 있는 아버지 朴德甲(54 大阪市요도가와區中島186)씨를 찾아갈것을 결심, 54년8월초부터 63년9월까지 만9년동안 세번이나 밀항하여 1년이상씩 일본에서 살다가 거류민단「등록증」이 없어 관헌에 잡혀 번번이 강제송환되어 지금 밀항 상습자로 교도소생활을 하고있다. 朴씨는 세번째로 강제송환된 작년9월 이전까지는 숙부 朴相甲(39 京都市南正區條南松之町44)씨가 경영하는 靑山상사에서 직공들을 감독하고 있었다.

▲소국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살길이 없어 15세난 아들과 함께 「빠찡꼬」경영을 크게하는 남편 金斗杓(50 日本京都)씨를 찾아가려다 잡힌 文南壽(47 濟州시北군朝大면)씨는 '이제 죽는 수밖에 없다'고 밀항실패를 한탄 하기도 했다.

▲장차 농학(農學)을 전공할 꿈을 꾸고 밀항하다가 잡힌 李益星(가명 18 濟州西歸浦農高3年在學)군은 일본에 있는 외삼촌 康경세(40 상업 大阪市 生野區)씨가 평소 '7명의 부모형제들과 고생하는 것보다 일본에 오면 도와 주겠다' 는 편지권고를 받고 밀항하다가 적발되었다.

▲일본까지 상륙만 성공하면 5만원(日貨)을 주기로 하고 일당13명(女子3명 포함)이 밀항하다가 기관고장으로 표류, 생쌀을 씹으며 나흘동안 물위에서 떠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韓在煥(20 濟州大法科在學)군은 외숙부인 宋萬泰(50 商業 大阪市生野區)씨 집에 가서 공부를 계속 할 욕심에서 생각끝에 밀항을 결심했었다. 釜山에서 金혁기記者發】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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