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76) 도망갔던 돼지는 또 도망간다

* 퀴어난 : 튀어났던, 도망질했던
* 도새기 : 돼지의 제주방언. ‘돗’이라고도 함

제주에서 돼지는 소·말 못지않게 귀중한 가축이었다. 소와 말이 일을 부려 농사에 없어선 안 되는 요긴한 가축이었다면, 돼지는 먹잇감으로 빼놓을 수 없는 가축으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비단 식용만 아니고 장에 내다팔면 돈이 되는 수익성 가축으로 돼지 이상이 없었다. 돼지는 워낙에 다산이라 새끼를 낳았다 하면 여남은 마리를 넘었다. 그 새끼, 몇 달 키워 오일장에 내다 팔면 가용(家用)이 됐으니까. 닭도 있지만 닭은 가금류라 가축과는 다르다.
  
옛날 재래식 통시(돼지우리)에 도세기를 키워 거름을 만들어 밭에 뿌려 작물을 풍성하게 했는가 하면, 장성한 자녀 혼사에 도살해 손님 대접에 요긴히 충당했다. 돼지고기만 있으면 잔치를 할 수 있다 해서, 예로부터 잔치엔 돼지고기라 해 왔을 정도다.

이러하거늘, 제주에 도세기가 오르내리는 속담이 없을 리가 없다.

우선 ‘퀴어난 도세긴 또 퀴어난다’는 돼지의 생태를 기가 막히게 담아낸 속담 중의 하나로 꼽는다.

“게난 그 도세기가 또 퀴어난 도라났댄 말가. 잘 촞아보라. 먼 디 가지 아니 해연. 동네 어디 이실거여” 
(그러니까 그 돼지가 또 튀어나서 달아났다는 말이냐? 잘 찾아봐라. 먼 데 가지 않고 동네 어디에 있을 거다)라 한다.
돼지는 통시(우리) 담을 허물고 튀어나가기 시작하면 자꾸 튀어난다. 버릇이 생기면 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튀어난다. 마당을 가로질러 골목을 벗어나 천방지축 동네를 휘젓고 돌아다니기도 한다. 막상 어렵게 찾아도 마소처럼 고삐를 채우지 않는 놈이라 막대기로 몰고 오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이런 낭패가 없다. 결국엔 그런 돼지는 기르기 힘들어 내다 팔거나 해 처분해 버릴 수밖에 없다.

이 말을, 돼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실은 사람도 매한가지다. 버릇을 잘못 들이면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자꾸 되풀이해 주위로부터 지탄 받기 일쑤다. 술 마시고 주정 부린다거나 여자에 홀려 노상 바람피우는 게 다 그러한 것이다.

잘못된 버릇과 어긋난 행위를 빗대어 경계할 때 하는 말이다.

‘퀴어난 도세긴 또 퀴어난다’가 종국에는 ‘퀴어나는 도세긴 못 질룬다’로 진행되게 마련이다. ‘못 질룬다’는 못 기른다, 기르지 못한다 함이다. 통시담을 허물어뜨리고 도망질하기 시작하면 도저히 버릇을 고치지 못하니 기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돼지 안되겠다는 의식이 점층적으로 심화되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빤하다.

어릴 때, 동네에 절도 사건이 생기면 사람들이 대충 ‘누구’라고 짐작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남의 집 고팡(광)에 들어가 쌀 몇 됫박 도둑질한 사람을 그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는 게 아닌가. 다들 의심하는 사람을 일러 ‘손이 검다’고 했다. 몇 번 도둑질을 하면서 버릇이 몸에 배게 된다는 지레짐작을 하는 것이다. 그 ‘검은 손’이 왕따당하는 건 불 보듯 한 일이다.

우리 속에 가뒀던 돼지란 놈이 한번 튀어나와 돌아다니기 버릇하면 그 습관이 없어지지 않아 자주 튀어나가기 때문에 도저히 기를 수가 없다. 사람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는 얘기다. 규범에서 이탈해 멋대로 행동하게 되면, 다시 원상으로 되돌아오기가 어렵다. 범법의 경우 횟수를 거듭해 전과 몇 범으로 가는 게 다 그런 것이다. 사회생활을 온전히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참 불행한 일이다.

비슷한 말로 ‘담 머리는 도새긴 못 질룬다(담 허무는 돼지는 못 기른다)’가 있다. 이는 앞의 속담과 매우 유사한 것이지만, 좀 독특한 표현을 하고 있다.

‘도고리 어프는 도새기 못 질룬다.’
(도고리 엎는 돼지 못 기른다.)
도고리는 돼지에게 것(먹이)을 주기 위해 큼직한 돌을 파서 만든 함지박 모양의 돌그릇, 곧 돌확을 말한다. 먹이를 주기 좋게 입구 쪽에 놓아 주는 것으로 이를테면 돼지 밥그릇이다.

이 돌도고리는 현무암을 파서 만든 것이라 아주 묵중하다. 그런데도 돼지 중에는 별난 놈이 있는지라 심술을 부려 주둥이로 밀쳐 엎어 놓는다. 그런 돼지는 주인이 도고리를 바로 놓아도 다시 엎는 못된 버릇이 있다. 그러니 기를 수가 없다 함이다. 결국은 도살해 버리게 된다. 못된 버릇이 퇴출로 이어지고 만다.

우리 사회에 고쳐지지 않는 악습이 어디 한둘인가.

재벌의 고질적 갑질, 뇌물 수수와 그런 등속의 정경 유착, 학교 식당의 서비스 문제, 담배꽁초나 휴지 아무 데나 버리기, 술 마시고 고성방가하기, 건널목 무단 횡단…. 이것들, 하루속히 고쳐야 할 ‘배냇병’들이다. 배냇병이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병이란 뜻으로 고질적인 습관을 이르는 말이다. 참 나쁜 버릇들 아닌가. 적폐가 따로 있는 게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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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항공직원연대 회원들이 지난달 1일 오후 서울 홍대입구역 부근에서 갑질근절 문화캠페인 게릴라 홍보를 하고 있다. 브이포벤데타 가면을 쓴 직원들이 갑질근절 스티커, 배지, 네임태그 등을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편집자 주] 출처=오마이뉴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더욱이 나쁜 습관을 고치기 힘들어 몸에 배어 버리면 고질(痼疾)이 돼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담을 허물고 우리를 튀어나오는 돼지처럼 행동해선 정상적인 생활인이 될 수 없다.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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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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