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상놈들이 귀양가는 것 봤소?”
아내는 하워드의대 교수, 아들은 군의관(중령)으로 이라크 파병, 두딸은 변호사

지난 4월 14일, ‘워싱턴지역 한인사(1883~2005)’ 출판 기념회가 ‘한성옥’에서 열렸다. ‘워싱턴 한인연합회’와 ‘워싱턴 미주한인재단’ 공동주최로 열린 이날 출판기념회에서 공동발행인인 김영근 전 워싱턴 한인연합회장은, “워싱턴지역 한인사는 지역 한인사회가 어떻게 발전해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하는지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사업”일 뿐만 아니라, 이번 한인사 출간이 “100년뒤 우리 자손들이 지금 우리를 기억하게 하는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미주 중앙일보). 이러한 의미 깊은 워싱턴 한인사 편찬의 막중한 책임을(편찬위원장으로서) 맡은 이가 바로 제주출신 강웅조 박사다.

▲ 워싱턴 지구 한인사 출판기념회에서 애기하고 있는 강웅조 편찬위원장

지난 10월 16일 오후 3시경 강웅조 박사를 자택에서 만났다. 그제가 칠순이었다는 강박사. 고희가 넘으셨는데도 아직도 대학에 강의를 나갈 만큼 정정하시다.

부친 강경옥(康慶玉), 2~3대 국회의원, 참의원 역임

고향이 어디시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 이제는 행정구역이 없어졌지만 - “남제주군 서귀면 법환리 364번지”라며 번지수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강박사의 부친은 지난 99년 3월 10일 작고한 강경옥(康慶玉)씨다. 1907년 제주생으로 2~ 3대 국회의원과 참의원을 역임했던 유명한 분이다. 일본 입명관대학 법과부를 졸업하고, 삼익고무공업회사 사장, 조선타이어공업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했었다.

강박사에 따르면, 부친은 5·16 이후 정치를 접고 신학공부를 하셨단다. 워싱턴 한인 장로교회를 창립했고, 귀국 후에는 ‘경찰선교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것이 이후 ‘경목(警牧)’의 모태가 된다. 71년 제주복음교회를 세우고, 92년까지 신학교도 운영하셨다고.

강웅조 박사는, 부친인 강경옥씨가 일본 유학시절 오사카에서 출생했다. 이후 부친의 주요활동 근거지가 서울이다 보니 제주에서 생활한 적은 별로 없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은 강박사가 서울고 1학년 재학 시절이었고, 부친은 2대 국회의원이었다. 6·25가 나자 부친은 피난하는 정부를 따라 수원~대전~부산 등으로 이동해 갔고, 강박사와 가족들은 한강을 건너 대전까지 걸어서 피난 갔다. 거기서 삼촌인 강명옥(康明玉, 후에 제3대 법제처장(1956.09.10~1960.07.01)이 됨)씨를 만나 부친을 재상봉하게 된다.

▲ 강웅조 박사

부산에 온 피난정부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무너질 경우를 대비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 까지 고려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당시 부친이 ‘제주도개발단장’ 직을 맡아 가족들이 함께 제주도로 오게 되었는데, 이 때 강박사는 처음으로 몇 달 동안 제주생활을 경험하게 됐다. 그 때가 1950년 8월 말경으로 기억하고 있다. 9·28수복 후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가 1·4 후퇴 때 다시 부산으로 피난갔던 강박사 가족은 휴전되면서 다시 서울로 상경한다.

이수성 전 총리, 강재규 소령과 고교 동창

강웅조 박사는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56학번이다. 이수성 전총리와는 서울중·고 동기동창으로 서울대까지 함께 다닌 절친한 친구다. 또한 훈련 중 부하가 떨어뜨린 수류탄을 안고 산화한 사건으로 유명한 강재구 소령도 고교 동창. 이 전 총리 집안과는 인연이 깊다. 언급한 법제처장까지 지낸 삼촌이 이수성 부친과 동경제대 동기였다. 또 다른 삼촌 한분도 동경제대를 나와 일본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 강웅조 박사의 서울고 졸업장

3학년 1학기인 59년 봄학기까지 수료하고 서울대를 그만둔 강박사. 1년 반 동안 군생활을 하며, 근무 중 메릴랜드대학 분교를 다녔다(메릴랜드대 정치학사 학위). 1961년 4월 19일 문교부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조지워싱턴대 대학원에 역사학 전공으로 입학한다. 이것이 그가 미국에 오게 된 계기이며 시기다. 조지워싱턴대에서는 근대 유럽사와 미국 외교사를 전공, 63년에 석사학위를 받고 80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 때 받은 학위논문을 책으로 출간하라는 사모님의 권유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난 2003~5년까지 2년 여 동안 보완하여 지난 2005년 7월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저서 제목은 ‘슈펠트 협상에서 한국의 국제적 정체성 찾기(The Korean Struggle for International Identity in the Foreground of the Shufeldt Negotiations)’. 이 책은 1800년대 후반 조선의 외교사를 중국 및 일본의 예속에서 벗어나 새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데, 미국 역사학보 등에 좋은 비평이 보고되기도 했다.

▲ 강웅조박사의 저서

강웅조 박사의 학구열은 이대로 끝나지 않았다. 1984년 5월에는 하워드대 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여 미국장로교회 총회고시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다. 이후 22~3년 동안 목사로 시무하면서 모교인 하워드대 신학대에서 15년간 교회사, 실천신학 등을 강의해왔다. 올해 겨울 쯤에 은퇴할 예정이란다.

워싱턴지구 한인사 편찬위원장, 강웅조

어떻게 워싱턴 한인사의 편찬 책임을 맡게 됐느냐는 질문에, 강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그냥 자문위원 중의 일원으로 참여했지요. 당시 이 한인사의 출판 취지는 이랬습니다. 2003년이 이주 한인 10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이 100주년 사업 일환으로 워싱턴, 볼티모어, 웨스트 버지니아, 타이드워터 지구 등 6개지역의 한인사를 한번 써 보자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초 편찬위원장이었던 채영창씨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2004년 9월 워싱턴 한인연합회 임원들이 찾아와 역사학자시니 편찬위원장 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하여 맡게 된 것입니다.”

▲ 워싱턴지역 한인사. A4 크기의 하드카바 책자

강박사는 이 한인사를 제작하면서 최대한 사실적이고 객관적이며 균형있게 다루기 위해 애썼다면서,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편향적인 부분은 삭제했다”고 말했다. 어쨌든 이 한인사는 이런 과정을 거쳐 2006년 9월에야 출판사에 넘기게 되고, 올해 4월이 돼서야 출판기념회를 열게 된다. 강박사는 현재 이 한인사의 영문판 발간 작업의 책임도 맡고 있다.

아내는 하워드의대 교수, 아들은 군의관(중령)으로 이라크 파병, 두딸은 변호사

▲ 강웅조 박사의 가족 사진

모두에 강박사를 만난 날이 칠순이 지난 3일째 되는 날이었다고 했다. 동행한 워싱턴도민회 이호석 회장께서 아니 왜 고희잔치 연락이 없으셨냐고 묻자, 아드님 때문에 못했다고 한다. 무슨 얘긴가.

강박사는 아내인 홍인순(68세)씨 사이에 1남 2녀 3남매를 두고 있다. 아내인 홍인순씨는 수원 출신으로 뉴욕 모 약혼식에 갔다가 만났다. 현재 하워드의대 병리학과 정교수로서 암 전문의다. 주로 여성들에게 발생하는 암분야의 논문을 많이 썼는데, 의학 학술지에 많이 게재됐다고.

아들 강중화(존 강,37세)씨는 현재 이라크에 군의관으로 파병되어 있다. 계급은 중령. 4년 전에 1차로 이라크에 파병(당시 계급 소령)되어 근무하다 돌아왔는데, 올해 다시 2차로 파병된 것. 작년 11월에야 결혼했는데...강박사, 걱정이 많은 눈치다. 현재 발라드(Balad) 공군기지 내에 있는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단다. 의사가 7명밖에 없어 잠도 제대로 못잘 정도로 격무에 시달린다고. 아들 얘기에 따르면 이라크 반군도 치료한단다. 바로 밑 누이와는 한 살 차이여서 일주일 혹은 열흘에 한번 꼴로 전화연락을 한다는데, “아이들이 다쳐서 들어오면 마음이 아프다”는 얘기 등을 주고 받는단다. 항상 고단한 생활을 하는 것 같다며 걱정스런 표정이다.

▲ 강웅조 박사의 아들 강중화 씨 사진

강중화씨의 전공은 모친의 영향인지 암 분야다. 콜럼비아대 의예과를 나와 하워드대 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런데 대학생활하면서 맨하튼 학군단컬리지에서 학군단 생활을 한 게 현재의 군생활 인연이 됐다. 콜럼비아대를 91년 졸업하면서 소위로 임관했고, 하워드대를 졸업하면서는 대위로 진급. 2001년 소령으로 진급했는데 2003년 2월에서 7월까지 쿠웨이트와 이라크전에 참전했다. 당시 한달 이상 소식이 끊어져 걱정했던 적도 있다고. 올해 중령으로 진급하면서 9월에 2차로 이라크에 파병된 것. 미국 최대 해군기지인 버지니아주 노폭 해군기지에서 근무했는데 현재는 이라크내 최대 공군기지인 바그다드 북쪽 발라드 공군기지에 근무하고 있다.

큰딸인 강정화(제이니 강,36세)씨는 매릴랜드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하워드 법대를 나온 변호사다. 현재 국가보훈부 법무관으로 있다.

막내이자 둘째딸인 강유화(유니스 강,33세)씨는 예일대 경제학과를 3년 만에 졸업한 수재다. 테네시주에 있는 밴더빌트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 현재 뉴욕 대형 로펌에서 법인체 재산 등 소송 전문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강박사와 제주, "여러분! 상놈들이 귀양가는 것 봤소?”

언급 했듯이 강박사는 오사카에서 태어났고, 제주생활도 피난 시절 몇 달 밖에 없다. 그에게 있어 제주는 어떤 의미일까. 제주라는 정체성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솔직히 대학 때 놀러간 기억 빼고, 제주에 산 적은 없지만 항상 집에 제주 출신 인사들이 손님으로 왕래하셨고, 부친의 영향 때문에 항상 제주출신이라는 자각을 하며, 제주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며 살았습니다.”

6·25나 1·4 후퇴 때 급하니까 제주도로 저명한 인사들이 도망오(려)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살린 언덕이 경상도 일부와 제주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지난 91년인가 워싱턴제주도민회 초대 회장으로 부터 제주역사를 강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강 박사. 당시 마침 부친도 워싱턴에 와 계신 상황이어서, 자료를 좀 달라고 부탁하여 강의준비한 후 강연을 했단다. 이날 앨링턴에 있는 ‘우레옥’이라는 식당에서 행사를 했는데 식당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제주교민들이 왔다. 여기서 강박사는 이러한 얘기를 했다.

“역사학자로서 이야기 하거니와,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건 거짓말이예요. 제주에서 올려 보낸 말은 다 서울(한양)에서 정2품이라는 고위직이 관리했습니다. 아무도 건들지 못했어요. 제주에 간 사람들은 다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임금에게 올바른 애기를 하다가 유배 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여러분! 상놈들이 귀양가는 것 봤소?”

이렇듯 그의 제주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여기서는 밝히진 않지만 제주출신이라고 소개된 여러 유명 인사들 중에는 초기에 간혹 제주출신임을 밝히지 않거나 오히려 다른 지역 출신이라 밝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강박사는 제주에서 태어나지도 않고 제주생활 경험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 아버님의 고향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며 제주인이란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워싱턴도민회의 활동이라면 가능한 힘닿는 데로 참여하고 도와주어, 워싱턴도민회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다.

▲ 올해 2월 워싱턴지구 도민회로부터 받은 공로장

▲ 2006년 워싱턴지구한인연합회로부터 받은 공로패

약관의 나이인 23세에 와서 이제 47년을 미국 워싱턴에서 살았다. 거의 반백년을 미국에서 산 셈이다. 강박사가 처음 이곳에 올 때 한국인 숫자는 채 200명도 안됐었다. 그 중 반수는 대부분 유학생이었고...그런데 이제 워싱턴지역에 사는 한국인 숫자는 최소 15~20만으로 추정될 정도로 많아졌다.
 
엊그제 칠순을 넘긴 그. 이제 하워드대 교수로서 강의는 이번 겨울에 그만 둔다. 워싱턴 한인사 편찬위원장은 물론, 서재필동상 건립추진위 위원장 등 워싱턴지구 우리 교민사회의 굵직굵직한 일을 맡아오셨을 뿐 만 아니라, 그의 아내를 비롯한 세 남매가 미국사회에서 나름대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교수이자 목사로서 그리고 제주인으로 그의 왕성한 활동을 계속 기대해 본다(참, 그의 사촌인가 육촌 누나의 아들이 강상주 전 시장이란다).

# 미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자랑스런 제주인에 대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windjeju@naver.com 이지훈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