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김용하 지사] 식량부족,전염병 하루 수십명씩 사망

1949년 4월20일에 단행된 지사 경질은 '4.3 사건'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었던 도민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던졌다. 그것은 두 차례씩이나 연기됐던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에 대한 제헌의원 선거를 불과 20일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 전격적인 인사조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관호 도시자의 경질은 이미 그해 1월3일에 발생한 도청 방화사건에 대한 문책설이 나돌고 있어서 관가 주변에서는 퇴임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데다 임 지사의 전력(前歷)이 다시 시비의 대상이 됨으로써 이임설이 꾸준히 나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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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愚堂) 김용하(金容河)는 중앙청 소비조합 전무이사에서 제4대 제주도지사로 발탁됐다. 서울대 교수 출신으로서 소비조합 전무로 있는 김용하의 임명은 매우 이외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극심한 사회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노련한 행정관료가 부임하더라도 역부족인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임에도 학자 출신의 지사 기용은 뜻밖의 일로 여겼던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제주사태가 예상 이외로 장기화되면서 민심수습과 재산 무장대에 대한 선무공작의 필요성을 절감함에 따라 덕망 있는 교육계 인사의 기용을 검토했다

김용하는 평양고보(平壤高普)와 일본 동경법정대학 예과를 거쳐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다. 북제주군 애월읍 하귀리가 고향인 그는 함경북도 종성(鍾城)중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대구사범학교 교장, 문교부 교육관, 경기공립사범학교(현재 서울교육대학)와 용산공립중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민족청년단의 서울시 이사를 거쳐 1947년 서울대학교 학생과장을 역임했다.

그후 정부 중앙물자행정처 기획국장과 중앙청 소비조합 전무이사로 승진한 그는 고향인 제주도지사로 발탁됨으로써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행정관료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특히 그는 문교부 교육관 시절 남·여 공학을 처음으로 주장하여 교육계의 관심을 모았으며 학생들의 한글습득을 위해서 '한글습자책'을 직접 펴내는 등 당시 제주출신으로서는 드물게 교육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정치인들과 폭넓은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지자 발탁에 많은 힘이 됐다.
김용하는 한민당(韓民黨)을 창당한 호남의 거부 김성수(金性洙)와 일본 유학시절부터 잘 알았다. 또 김용하의 부인 전인항(全仁恒)은 정일형(鄭一亨)의 부인 이태영(李台榮)과는 사제지간이었다. 이화여전 1회 졸업생인 전인항은 평양 영변이 고향으로서 동향인 이태영의 제자였으며 이태영은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이기붕(李起鵬)의 부인 박마리아와 매우 가까웠다.

북군 제헌의회 재선거, 홍순녕 양병직씨 당선

1949년 4월21일 제주에 부임한 김용하는 '치안유지와 민생구호'를 도정지표로 삼았다. 김 지사는 부임하자마자 계장급 이상 전 직원에게 사표를 제출하도록 했다. 김 지사의 이 같은 지시는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관기(官紀)를 새롭게 세우기 위한 인사쇄신책이자 직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 지사는 그러면서 서북청년단원들의 민폐 근절에 주력했다. 서북청년단은 김 지사가 평양고보 출신이면서 함경북도 종성중학교 교장을 지낸 경력 때문에 김 지사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었다. 김 지사는 그러한 점을 십분 이용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북청년단원들을 모아 놓고 "매사를 법대로 처리해야 하며, 반공을 구실로 민폐를 끼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초도순시를 끝낸 김 지사는 그해 5월10일로 예정된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의 제헌의원 재선거를 무사히 치르기 위해 행정력을 집중시켜 나갔다.

두 차례의 연기 끝에 가까스로 실시되는 재선거에는 갑구에서 홍순녕(洪淳寧.국민회) 함상훈(咸尙勳.국민회) 김시학(金時學.국민회) 김인선(金仁善.한국청년단) 양귀진(梁貴珍.무소속) 문대유(文大有.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고학수(高鶴秀.무소속) 등 7명, 을구에서는 양병직(梁秉直.청년단) 김도현(金道鉉.국민회) 이응숙(李應淑.무소속) 김경수(金景壽.국민회) 이영복(李永福.청년단) 박창희(朴彰禧.국민회) 홍문중(洪文中.무소속) 양제박(梁濟博.국민회) 등 8명이 입후보했다.

후보들의 난립과는 달리 그때까지도 계속된 사회혼란은 유세활동은커녕 선거운동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재산 무장대는 밤중에 마을에 나타나 주민들의 선거참여를 적극적으로 저지했다. 반면에 서북청년단은 이른바 빨갱이를 색출한다면서 특정후보의 당선을 돕기 위해 상대후보의 선거운동원들을 잡아들이는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제주출신이 아니면서 이번 제주도의 재선거에 입후보한 함상훈은 한민당의 중앙당 선전부장과 문필가협회 부회장의 화려한 경력과 함께 제주도내 기관장 대부분이 이북출신이고 서북청년단의 막강한 영향력을 이용, 당선을 목적으로 제주에서 출마했다.

서북청년단원들은 함상훈의 당선을 위해 우익계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후보자의 선거운동원까지 마구 잡아들였다.

함상훈은 문필가협회 부회장 시절에 신익희(申翼熙)와 조소앙(趙素昻)이 인도 뉴델리에서 밀회를 가지고 한국을 중립화하기 위해 모의했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렸던, 세칭 '뉴델리밀회 사건'의 주역이었다.

재선거 결과 북제주군 갑구에서는 홍순녕, 을구에서는 양병직이 각각 당선됐다. 서북청년단의 절대적인 지지를 업었던 함상훈은 당선자와 874표 차이로 낙선함으로써 당시 서북청년단의 위세가 얼마나 컸던가를 잘 나타내 주었다.

홍순녕은 등원 후, 1년전에 남제주군에서 당선된 오용국과 함께 한국민주당에 입당했고 양병직은 대한국민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홍순녕은 당선 1년만에 지병으로 사망, 의원 사망 1호를 기록했으며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했던 오용국은 6.25 때에 납북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재홍 대령 "폭도중 진짜 공산도배는 극히 적었다"

제헌의원 재선거 직후인 1949년 5월15일 제주도 전투사령부가 해체됐다. 유재흥(劉載興) 사령관은 1개 대대 병력만을 남기고 제주에서 철수했다.

그해 5월18일자 조선일보는 제주도전투사령부의 서울도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제주작전에 참가, 폭동을 완전히 진압하고 많은 공을 세운 육군대령 유재흥 사령관이 지휘하는 부대가 5월17일 오전10시 서울역에 도착, 개선했는데 이들은 가장 용감한 충성부대로서 곧 38선 경계중요부대에 배치된다.

이날 서울역에는 신성모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 지휘관과 가족, 청년단원들이 나와 육해군 군악대의 주악 속에 대성황의 환영회를 개최했다. 신 장관은 '멀리 제주도에서 온갖 고난을 겪으며 충성스럽게 싸워준 장병 여러분에게 감사하다'는 훈시를 하였으며 유재흥 대령은 “단지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고 말했다"

이날 유재흥 대령은 기자들에게 “폭도 중에 진짜 공산도배는 극히 적고 무지에 휩쓸려 입산한 자가 많았으며, 우리는 이들을 귀순시켜 피를 흘리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밝혀 제주도 사태의 진상을 일부 공개해 관심을 모았다.

5월20일에는 1948년 12월29일자로 제주도에 파견된 이후 토벌작전에서 사망한 제2연대 장병 119명에 대한 위령제가 제주농업중학교 교정에서 거행된 데에 이어 6월1일에는 함병선 연대장이 대령으로 진급했다.

제주도는 5.10 재선거를 치른 뒤 양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 재산 무장대와 구별할 수 있는 신분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양민증'을 발급하기로 했다.

양민증은 사상이 건전하고 재산 무장대와 관련이 없다고 인정되는 사람에게만 발급됐으며, 조금이라도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발급해주지 않아 모처럼 마련한 양민증에 대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토벌대와 재산 무장대 사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이 이웃들에게 죽었다고 속이고 일본으로 밀항하는 경우가 많아 인구통계에 적잖은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들은 밀항 뒤에도 성(姓)까지 바꿔 생활함으로써 사망자로 처리되는 일이 간혹 발생했다.

6월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소강상태를 보였던 재산 무장대에 대한 토벌이 재개됐다.

그해 6월7일에는 제주경찰서 화북지서에서 출동한 토벌대에 의해 재산 무장대의 총책 이덕구(李德九)가 사살됐다. 토벌대는 이덕구의 시체를 십자가에 묶어 관덕정 광장에 세워놓고 주민들에게 전시하기도 했다. 이덕구의 사살 소식은 도민들에게 대단한 화제가 됐다.

이로써 관계기관에서는 제주도사태가 사실상 평정됐다고 보고 한라산에 남아있는 무장대에 대한 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제주도는 파괴된 도로와 교량, 가옥복구에 전 행정력을 모았으나 애로사항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주도민 20여만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실업자인데다가 수용소의 집단생활로 각종 전염병이 돌아 매일 10여명이 죽어갔다.

김용하 지사는 그해 8월24일 중앙청 회의실에서 개최된 각 시.도 지방장관회의에서 제주지역에 대한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고 중앙정부의 지원을 강력히 요청했다.

김 지사는 "제주도의 금년 농사는 지금 형편으로 볼 때 평년작이하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4.3 사건은 군대와 경찰, 민간이 하나되어 거의 수습되고 있다. 앞으로 남아 있는 일은 귀순자들의 전향문제로서 제주도는 이를 위해 모든 다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제주도의 가장 중요한 현안문제는 이재민에 대한 구호대책으로서 제주도부흥대책위원회만을 가지고는 극히 어려운 실정이다"고 말했다.

김 지사는 도정의 가장 중요한 일은 도민들이 먹고 잘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회부에 관계직원을 중앙에 보내는 등 구호품을 계속 요청했다.

한편 재산 무장대에 대한 토벌이 재개되면서 경찰응원대인 제주도파견특별경찰부대원들이 한라산 중턱에서 노루 한 쌍을 산채로 잡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상하여 전국의 화제가 됐다.

경찰응원대는 노루를 생포하여 김태일(金泰壹) 경비사령관에게 보약으로 쓰도록 했던 것이었는데 김 사령관은 이 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이 대통령은 제주에서 잡았다 하여 '탐라호'라고 이름을 짓고 동물원에 보내 많은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했다.

그해 9월1일 공보처는 정부가 수립된 후 처음으로 남한 총인구를 조사하고 제주도의 인구를 25만4585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1차 조사결과여서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여자(13만9826명)가 남자(11만4759명)보다 많았다. 이날 발표된 남한인구는 2018만명었으며 남한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은 2만1885명이었다.

당시 제주도가 발표한 이재민은 귀순자 7000여명과 주민 9만7000여명 등 총 도민수의 절반에 가까운 10만여명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그때까지 복구된 부락은 35개 마을에 불과해 겨울을 앞둔 제주도 당국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용된 이재민은 겨우 3만여명 이었으며 집은 마루나 방 문도 없이 돌벽과 지붕만 설치됐을 뿐이었다.

극심한 식량사정으로 도내 곳곳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또한 4.3 사건으로 많은 소와 말이 죽어 농사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우마(牛馬)에 대한 도외 반출을 일절 금지시켰다. 이에 대해 군대에서는 소와 말을 육지로 반출시키기 위해 갖은 압력을 가했다.

당시 자유신문에 게재된 '동란의 제주를 찾아서'에서는 그때의 실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8만7000여명에 달하는 이재민은 글자 그대로 돼지우리처럼 토막굴에 건초를 깔고 나무열매와 해초로 그날그날 연명하는 비참한 현실이다. 학교는 국민학교 96개교중 45개교, 중학교 11개교중 2개교가 소실돼 2부 3부제로 창고 등을 사용해 수업하고 있는 형편이며 교원 역시 학생 300~400명당 5~6명의 비율로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사회에서 구제물자 소맥 1만6000석, 침구 8000점, 광목 1만마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것은 코끼리에게 콩을 주는 격이다. 주택은 한라산에 무진장으로 있는 재목을 활용하고 있으나 2만채의 건축자재를 당국에 요청중에 있다. 또한 구호와 동시에 생업장을 제공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1만5000명의해녀가 작업을 하여 생계를 도모해왔으나 지금은 5000~7000명밖에 없고 근해어업도 통행금지와 자재난으로 총 스톱되고 있다.

그리고 제주도의 특산인 우마도 반 이상이 감소되어 일대 경종을 울리고 있는데 다행히도 당국이 도외반출을 절대 금지함으로써 불행 중 다행이다. 요컨대 폭도진압은 시간이 해결할 것이 기정사실이나 앞으로의 우리의 과업은 이재민에게 온정의 구호를 시급히 실시할 것과 선무공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만이 오직 해결의 초점이 될 것이다"

안호상(安浩相) 문교부장관은 사회혼란이 계속되자 교육이념에 대한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해 11월30일 새 교육법을 법률 제86호로 공포했다.

모두 11장·173조로 구성된 교육법은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립을 구유 하게 하여 민주국가발전봉사, 인류공영의 이상실현에 대한 기여를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김용하 지사, 각종 투서 비리의혹으로 재임 7개월만에 경질

이러한 가운데 제주도에서도 각급 학교마다 학도호국단이 조직됐다. 단장은 당연직으로서 김용하 도지사가 맡았고 중학교별로 단위학교장이 학교단장을 맡았다.

또 그 밑에는 단장의 지도감독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제주도내에서는 유일한 6년제인 제주농업중학교에는 장교와 사병이 배치되어 학생들의 군사훈련을 지도했다. 이 훈련은 나중 6.25동란 때 학도병 지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규정은 그해 9월28일 대통령령 제186호로 공포됐다.

그해 10월에 접어들면서 복구사업을 둘러싸고 각종 모략과 투서 그리고 부정부패가 횡행했다. 그런 가운데 1949년 11월14일 김용하 제주도지사를 비롯한 경상남도지사 등 3명의 도지사가 한꺼번에 경질됐다.

재임 7개월에 불과한 김 지사에 대한 경질에는 여러 얘기들이 나돌았다. 시중에는 도지사가 투서에 의해 해임됐다는 소문이 분분했다. 제주도 어업조합공금을 소비했고, 지사 전용차를 서울까지 갖고 가서 50여일이나 사용했으며 북제주군청에 근무하고 있는 김 지사의 동생과 결탁하여 공금을 횡령했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김 지사는 "나는 공금을 횡령한 사실이 전혀 없으며 다만 자신의 동생이 재해복구비와 관련하여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고 해명했다. 또한 "지사 전용차를 서울에 가지고 갔던 것은 차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김 지사는 퇴임후 19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명예회복을 기대했다. 북제주군 을구에 입후보한 김 지사는 자신이 직접 쓴 '홍익인간'이라고 쓴 휘호를 나눠주면서 한 표를 부탁했다.

그리고 부인 전인항과 아들 김관중(金貫中. 당시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했으나 입학하기 전이었다)을 데리고 중산간 부락을 순회하며 유세활동을 벌였다.

김 지사는 "한라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해 관광객들을 끌어들여 제주도를 개발해나가야 한다"면서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제주개발론'을 역설하고 다녔으나 '교수 출신이어서 너무 이상적'이라며 주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다른 후보에 비해 조직과 자금력에서 크게 취약했던 김 지사는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6.25사변 바로 직전 서울 장충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다 6.25가 발발하여 미처 피난을 떠나기 전 자택에서 북한군에게 납북됐다. 김용하 지사가 대구사범학교 교장때 박정희 대통령의 은사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김종배의 도백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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