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95) 멸치도 창자가 있다
  
* 멜 : 멸치의 제주방언
* 베설 : 창자의 제주방언. 내장(內臟)·소화·배설기관, 여기서는 성질‧성깔의 뜻
* 싯나 : 있다의 제주방언. 고어에선 ‘잇다’였음

멸치가 작기는 해도 큰 물고기들이 갖고 있는 소화‧배설기관인 창자(내장)가 있다고 빗댐으로써 비록 몸집은 작아도 성깔을 갖고 있다 함이다. ‘함부로 보지 말라이, 베설 궂은 사름이여’는 제주에서 흔히 써 온 말이다. 성질이 괴팍하거나 불같은 사람을 일컬음이다.

사회적 약자를 너무 얕보지 말라, 까딱하다 화를 부를 수 있다는 경계의 말이기도 하다. 그만큼 풍자성이 강하다는 의미다.

멸치는 아주 작은 바닷물고기다. 최대 15cm, 최소 2~3cm밖에 안된다. 송사리보다 작은 놈도 있다. 제주에서는 지금도 체구가 아주 작은 사람을 ‘멜만한 게’라고 놀림조로 얘기하곤 한다. 멸치처럼 작다는 빗댐이다. 

‘멜만하다.’ 기가 막힌 향소(向小)과장법이다. 사람이 제아무리 작다 한들 ‘멜’ 만이야 하겠는가. 과장이 때로는 이렇게 표현을 실감 나게 한다.

언뜻 떠오르는 속담이 있다. ‘작은 고추가 맵다.’

실제 재래종 고추는 서양의 개량종보다 작다. 그런데 우리 고유의 작은 고추가 훨씬 맵다고 그런 맥락에서 나온 속담이다. 
  
한국 사람은 비록 키도 덩치도 작지만, 키와 덩치가 큰 서양인보다 훨씬 과단성 있고 결단력이 강함을 고추에 빗대는 말이다. 

속에 내포돼 있는 뜻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까 진즉 말하고자 한 것은 고추가 매워서라기보다는 올차 내실(內實)있는 사람, 사물, 행동을 비유한 것이란 얘기다. 크고 허울 좋은 외형보다 비록 보잘것없고 작고 초라해 보여도 내면이 꽉 찬 실속 있는 결과를 에두른 표현이다. 끈기와 인내심이 무슨 일이든 해낸다는 뜻으로 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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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도 베설 싯나.

사람이 제아무리 작다 한들 ‘멜’ 만이야 하겠는가. 과장이 때로는 이렇게 표현을 실감 나게 한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멜도 베설 싯나.’ 단순히 보아 넘길 말이 아니다.

흔히 작다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람 머리보다 더 좋고 저장하는 공간이 어마어마한 녀석이 있지 않은가. USB. 녀석은 정말 ‘멜 만하다.’ 한데 녀석은 컴퓨터며, 스마트 폰이며 모든 기억들을 지워지지 않게 저장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 앞에선 작다고 입도 벙긋할 수가 없다. 그의 존재가 참으로 탁월하므로.

먼 데서 찾을 일이 아니다. 보통 고추보다 크기가 작은데 매운 고추가 있다. 청양고추. 사실, 고추의 매운 맛은 크기와는 상관이 없다. 고추가 매운 맛을 내는 것은 안에 함유하고 있는 ‘캅사이신’이라는 화학성분이다.

크기가 작아도 마치 매운 고추처럼, 몸집이 작아도 힘이 세거나 야무지고 똑똑한 사람들이 있다. 나폴레옹처럼 키가 작은 영웅.

이렇게 겉보기에는 작은 사람이 오히려 큰 사람보다 단단하고 재주가 뛰어나다고 해서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한 것이다.
  
일을 잘하고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일하는 능력에 달린 것일 뿐, 몸집이 작고 큰 것하고는 전혀 무관하다. 그러니까 외모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해선 안된다. 옛날 관리를 등용할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한 것에 ‘身(몸)’을 첫 번째 기준으로 내세우긴 했으나 뒤 따르는 말과 글과 판단력이 그 미흡함을 채웠다.

외모나 키 같은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다. 사람을 볼 때 선입견을 갖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몸집이 작아도 성질이 야무지고 단단해 빈틈없는 사람을 ‘대추씨 같다’고 한다. 겉모양보다 내실을 기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함이다.

제비는 몸집이 작아도 멀리 강남까지 날아간다. 참 야무지다.

‘멜도 베설 싯나.’

멸치가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화‧배설기관인 창자가 있다는 말을 그냥 보아 넘기지 말 일이다. 녀석이 작지만 창자가 있다 함은 곧 ‘작아도 있을 것은 다 갖고 있다’ 함이다.

여기서 창자는 곧 ‘밸, 배알’이다. “내겐 밸도 없는 줄 알아?” 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그 나름의 개성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작다고 무시하지 말 것을 ‘경고’함이다.

‘작아도 후추알.’ 작아서 힘없고 약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뜻밖에 쇳덩이 같이 옹골찬 걸 보면 놀라게 된다.

왜소한 체구로 ‘녹두’란 별명으로 불렸던 역사 속의 전봉준 장군을 우리는 기억한다.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선봉장이다. 그는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을 괴롭히는 못된 탐관오리를 혼내 주고 신분에 관계없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자 봉기했었지 않은가. 
 
‘멜도 베설 싯나.’ 작다고 나무라거나 업신여겨선 안된다. 멜처럼 작아도 당차고 단단하고 힘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걸 알아야 한다. 작아도 일은 타고난 깜냥이 한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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