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와 제주성 (1)

▲ 북수구의 홍예교와 산지천 하류 전경. 1900년대의 사진으로 멀리 제주성의 성곽과 여장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다. 다리의 난간은 없어졌지만, 아름다운 홍예교가 제 모습 그대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진자료:《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특별자치도 간)

올해는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다. 문득 오현단을 거닐다 흔적만 남은 제주성의 잔해를 보면서 우리들의 시야에서 삭제되어버린 제주성을 떠올린다.

지금 공동화에 신음하는 구도심지는 제주섬의 역사와 함께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허나 그간 뉴타운개발방식에 의해 제주시가 공룡처럼 확장되면서 공간의 역할과 장소의 의미가 해체된 결과, 지금은 광역화된 제주시의 면모의 음지로서 해가 지면 인적이 드문, 역사상 유례없는 공동화의 공간으로 버려져 있다.

구한말 흑백사진 한 컷을 앞에 실었다. 이 사진을 처음 접하는 분들은 도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어느 나라의 절경인지 감탄할 것이다. 패망해 가는 왕조의 끄트머리 퇴락한 모습의 정경이지만, 중국이나 일본 또는 우리나라 어느 곳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 이 정경은 바로 우리가 흔히 보아온 현재의 측후소와 산지천 부근의 100년 전 풍경이다. 불과 100년 전일 뿐인데, 이 낯선 풍경은 우리를 깊은 사색으로 이끈다. 도대체 100년 전에 우리의 선조들이 남겼던 저 풍경과 경관은 누가 지워버렸을까?

‘제주시 구도심지는 전통적으로 매력적인 해양도시였으며 성곽도시였다. 지금은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남아 있는, 구한말 일제 초까지도 존재했던 제주성의 성곽과 건물, 아름다운 홍예교가 어우러진 정경은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또한 제주성 북변의 해안지대인 탑바르는 필자의 대학시절까지도 해양도시 제주시의 워터프론트로서 바다와 인간을 연결하는 루트였다. 하지만 몇몇 개발주의자들의 어리석은 욕망과 한 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무지한 행정가들의 요식행위에 의해, 지금은 매립되고 콘크리트방파제에 지워져 버렸다.(이럴 땐 참말로 인간이 싫어진다. 그 무책임하고 천박한 돈질과 권력질에 대해서 말이다.)

어쨌거나, 지속적으로 해체된 구도심지에 대한 최초의 ‘가해’는 역시 일제가 압권이었다. 지금 일본 전역에는 그들이 세운 성곽과 성들이 곳곳에 산재하여 그 멋스러움에 어느 도시를 가나 관광객들이 들끓는다. 그런데 그들이 일한병탄(日韓倂呑)과 함께 우리 섬에 들어와 벌인 최초의 대역사는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 참으로 오래도록 구축해 온 제주성을 해체하여, 그들의 군함이, 그들의 연락선이 오가는 데 필요한 항구를 조성한 일이었다. 산지항이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열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총칼 들고 찾아 온 불청객 일제의 침탈은 그 한 폭의 그림을 송두리째 바꾸는 대사건의 시작이었다.

망국의 시작, 성곽의 해체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성지(城址)는 1천 2백 16곳에 이른다고 한다. 조선 세종 때 홍문관대제학을 지내고 《고려사(高麗史)》개찬(改撰)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대학자인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는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고 말했다. 또한 일찍이 중국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은 성을 잘 쌓고 방어를 잘 하므로 쳐들어갈 수 없다.”라든가 “산을 기대어 성을 쌓는 데 능하다.”는 기록을 남겨 전할 정도로 우리 민족은 성을 군사적 방비의 중심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군사적으로는 산성을 중심으로 행정적으로는 도성·읍성을 중심으로 방어체계가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제주도도 이러한 조선시대의 성곽을 중심으로 한 체제에 편입되어 있었는데, 이른바 3성(城) 9진(鎭) 25봉수(烽燧) 38연대(煙帶) 그리고 300리(120㎞)에 이르는 환해장성(環海長城)체제가 그것이다. 즉, 3성(제주·대정·정의읍성)과 9진(화북진·조천진·별방진·명월진·애월진·수산진·서귀진·모슬진·차귀진)과 25개소의 봉수와 38개소의 연대가 온 섬을 휘돌아 감은 환해장성과 맞물려 외부의 군사적 침략에 대한 정교한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주도의 방어체계는 대부분 외적의 침입(그중에서도 왜구)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방어체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군역은 제주인들에게는 또 다른 고역이기도 했다. 그런 제주도의 읍성과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성곽이 헐린 것이다. 바로 그 방어의 대상이었던 일제로부터 말이다.

▲ 1890년대의 산지천 하류에서 본 제주성 전경. 사진 상단부에 제주성의 자취가 완연하다. (사진자료:《제주 100년》사진집)

이 해체는 일제에게 있어서는 현실적으로 조선왕조의 가장 핵심적인 군사방어체계의 거점을 제거하는 것이었으며, 상징적으로는 조선에서의 왕조의 질서를 완전하게 해체하는 효과를 지니는 것이었다. 일제의 침탈로 말미암은 참상은 대한민국 국토 어디에나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제주도의 경우, 가장 가시적인 경관의 변화를 초래한 것은 제주성의 해체였다. 제주성의 해체는 곧 가장 완강했던 조선왕조 국체의 해체였으며, 주체적인 국가·지역공동체에 대한 물리적 침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제는 조선의 반도와 제주섬에서 오랫동안 실시되어 온 조선왕조의 행정·군사의 중앙집권체제를 상징하는 전국의 읍성을 해체하고, 조선의 기축적인 경관을 해체함으로써 비로소 그들만의 식민지 경관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우선 관아와 향교의 해체였다. 그들은 그 자리를 황국식민사관과 식민지교육기관인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세우는 부지로 활용했다. 전국의 향교가 초등학교 교정을 끼고 있거나, 초등학교부지 내에 존재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또한 관아의 경우 대부분 식민지 행정기관인 도청이나 군청, 또는 헌병대와 경찰 청사 등의 부지로 활용하였다. 당연히 전통한옥으로 지어진 관아건물 역시 대부분 해체되고 일제식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2002년에 복원된 제주목관아의 건축물들도 그때 모두 해체·멸실된 데 따른 100여 년 만의 복원이었다.

그리고 일제에 의한 조선경관 해체의 완성은 1920년에 시작된 신작로(新作路)의 건설로 이루어졌다. 현재 제주도를 환형(環形)으로 빙 두른 일주도로가 그것인데, 일주도로는 기존의 마을들을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둘로 쪼개버린다. 사무라이 일본의 문화처럼, 그들은 날카로운 일본도의 칼을 쓰듯 동카름·서카름·네커리·모커리·올레담·울담으로 수백 년 동안 구축되어 온 제주도의 전통경관을 단칼에 쪼개어 버렸는데, 이것이 신작로이다. 이 새롭게 등장한 신작로는 식민지 경관과 정책의 대동맥이었다. 바로 이 신작로를 이용해 그들은 물자를 수탈하고, 군대를 이동시키고, 그들의 식민 지배를 공고화하는 데 기반도로로 사용하였다.

제주성, 근대 이전 기억의 저장고

조선시대를 통틀어서는 물론이고, 해방 후 80년대까지도 제주도의 행정·교육·상업의 중심지였던 현재의 구도심지역은 역사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부터 제주섬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과거의 사료와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제주성은 조선 태종 16년(1416)에 이르러 제주목·정의현·대정현 등으로 일컫는 3개 군현으로 체제가 도입되면서 제주목 관내를 관할하던 읍치로 기능을 하게 된다.

당시의 제주성은 현재에도 ‘묵은성’ 지역으로 불리는 ‘탐라고성’을 활용해 축조되는데, 이때 제주성의 범위는 동쪽은 산지천 서안, 서쪽은 병문천 동안을 각각 경계로 삼는다. 그러나 성 내에 가장 중요한 식수원이 없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불편함은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외적이 침입해 수성전을 벌일 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조선 명종 10년(1555) 6월에 발생한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이는 현실로 드러났는데, 왜선 40여 척에 1천여 명의 왜구가 침입하여 제주성 동쪽 높은 능선에 포진하여 성을 공격했다. 당시 김수문(金秀文) 목사는 70명의 결사대로 이들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으나 당시 방어의 어려움이 컸다. 이에 조선 명종 20년(1565) 곽흘(郭屹) 목사가 성을 가락천 밖으로까지 넓혀서 축성하였다. 이때부터 현재 유지가 남아 있는 제주성의 기본구조가 완성되었다.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에 의하면 이때 둘레 5,489척, 높이 11척에 격대 27개, 타첩 404개가 마련되고, 동·서·남문이 갖추어졌으며, 동쪽의 산지천에 남·북으로 수구문을 설치하고 동성 위에서 장대(將臺)인 운주당(運籌堂)을 세웠다고 한다.

선조 32년(1599)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성 굽을 5척이나 늘리고 높이를 13척으로 높이는 대공사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동·서·남문을 중수(重修)하여 좌우로 군영을 만들고 격대 27개 중 21개는 포루를 만들어 기와로 덮고, 남수구 위에는 제이각(制夷閣)을 지으니 이를 남수각이라 통칭하였다. 이로써 제주성은 더욱 주성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정조 4년(1780) 김영완(金永緩) 목사는 큰 비에 산지천이 범람하여 민가에 피해가 많으므로 산지천 서쪽 바위로 간성(間城)을 축성하니 길이 551보, 높이는 9척이었다. 그리고 북쪽 간성에 수복문(受福門)을 세워 광제교(光濟橋)와 연결하고, 남쪽 간성에는 소민문(蘇民門)을 설치하였는데 이 문은 헌종 13년(1847) 이의식(李宜植) 목사가 중인문으로 개칭하였는데 이 때 성이 헐리기 전까지 전모가 완성된다.

2008년 제주문화예술재단은 ‘제주성성곽추정지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GPS를 통해 제주성의 둘레와 면적을 최초로 밝힌 바 있는데, 최종적으로 확장된 성의 규모를 보면, 제주성의 외곽거리는 3.27km, 내곽거리는 2.75km이다. 외곽면적은 497,442㎡(15만여 평), 내곽면적은 466,569㎡였다.

제주성은 구한말까지 유지되다가 1910년 일한병탄 후 일제가 곧바로 취한 읍성 철폐령이 내려지면서 본격적으로 훼철되기 시작하였다. 1913년에 북성문인 홍예교가, 1914년에 동성문인 연상루(延祥樓), 서성문인 진서루(鎭西樓)·간성문(間城門) 등 대부분의 문루가 헐리었고, 1915년에 소민문(蘇民門)과 북성의 성곽 대부분이, 1918년에는 남성문루인 정원루(定遠樓)가 훼철되었다.

1923년에는 동성 위에 측후소가 들어선다. 1926년, 일제는 식민지 경영의 효율성을 위해 동부두와 서부두를 축조하고 산지포구를 매립하여 산지항(제주항)을 개발하게 되는데, 이때 제주성의 성곽을 해체하여 성담 대부분을 바다를 매립하는 데 사용한다. 이로써 현재의 오현단 부근의 남성 성곽 일부만 남기고 제주성의 성체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성 굽을 이루던 곳의 3/2 정도는 도심 내의 간선도로로 활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은 오현단 부근 격대 3개와 길이 85.1m, 높이 3.6∼4.3m의 성곽 일부이다.

탐라고성을 포함한다면 1천 년 이상, 조선 왕조만 해도 500 년 이상을 제주목의 주도적인 경관으로 지속해 온 제주도 역사·문화의 상징인 제주성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산지항 개발 과정에서 자취를 없애버린 것은 이후 구도심의 역사·문화정체성을 상실하게 하는 가장 큰 사건이었다.

▲ 1900년대 제주성의 남성인 남수각 계곡과 계곡을 둘러 친 성곽의 모습, 무너지긴 했으나 여장의 모습도 확실하게 남아 있다.(사진자료:《제주 100년》사진집)

▲ 구글 위성지도 위에 제주성의 전모를 간략히 옮겨 본 구상도.

구도심은 오래된 미래

제주시 구도심지역은 누구나 인정하듯이 전통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이어지는 장구한 세월 동안 설령 제주성이 해체되었다 해도 제주 역사문화의 중심지로서 기능했던 지역으로, 제주문화의 타임캡슐과 같은 곳이기도 하다. 불과 20년 전인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누렸던 영화는 간데없이 현재 공동화 상태에 놓여 퇴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은 도시재생의 손길을 기다리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고, 최근에 치러진 도지사선거에서도 구도심의 재생과 관련하여 각 후보마다 나름대로의 굵직한 처방안을 내놓기도 할 정도로 뜨거운 감자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구도심의 역사성과 과거 역사적 경관 그리고 현재 구도심 경제활성화의 방향이라는 측면에서 제주시 구도심은 역사문화공간으로 재생하는 길 말고는 방법이 없다. 구도심 내에서 과거 번영을 누렸던 재래시장의 경우도 수백억을 쏟아 부어도 밑 빠진 독처럼 된 것은 이미 재래시장이 번성하던 때의 인구밀도가 와해되고 각종 기관들, 주민들이 빠져나간 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시장 활성화를 위한 각종 지원을 한다 해도 원천적으로 재래시장이 살아날 길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주시 구도심 역시 지금과 같이 사방 500미터 내외의 고래로부터 한 동네인 곳을 네 개의 동으로 나뉜 채 벌이는 동별 마을만들기 사업이나 부분적인 정비 등 소규모적이고 구태의연한 방식으로는 더 이상 구도심을 회생시키기는 어렵다. 이제는 획기적인 새로운 도시의 모델을 창출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새로운 도시의 모델은 어느 날 하늘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국의 벤치마킹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혀 새롭지만 가장 원형적인 구도심의 역사문화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를 활용하는 일이다. SF적인 전혀 이질적인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바로 전통시기 경관을 살려내고 이를 통해 문화관광도시로 새롭게 탈바꿈시키는 일이 그것이다. 즉, 과거 제주인들의 삶의 흔적을 살려내고 이를 문화관광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일이 곧 새로운 미래가 될 것이다. 그 한가운데 바로 제주성이 있다. 앞의 낡은 사진에서 본 이국적인 정경은 바로 우리가 오랫동안 지속시켜온 우리의 역사와 문화로 빗어낸 가장 제주다운 경관이었다. 결국 과거에나 현재에나 제주시 구도심은 제주성을 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마인들은 1300년 전에 준비된 ‘오래된 미래’를 먹고 산다. 우리처럼 골프장을 만들고 리조트를 만들지 않아도 말이다. 현재까지 대규모적인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구도심은 오래전에 탐라문화가 매장해 놓은 역사문화의 타임캡슐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도민들이 만들어 빚어낸 유산들이 아직까지는 그나마 땅 밑에 보존되어 있다. 이제 그것을 꺼내어 살려내는 일, 그것이 우리들이 할 일이며, 또한 퇴락한 구도심이 사는 길이다. 이미 그 일부일 뿐인 제주목관아만 복원해도 그 효과가 어떠하다는 것은 눈으로 보고

▲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제주의소리
있지 않은가? 관아의 복원은 유형의 복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관아가 복원되고 나서 <탐라국입춘굿놀이>가 제자리를 잡았고, 수문장 교대식이나 전통행사 등이 재현되면서 사라졌던 우리의 옛 문화가 하나둘 살아나고 있다.

제주시 구도심권은 ‘바람타는 섬 - 탐라섬’이 오랜 역사의 부침에 따라 조성된 의도되지 않은 제주문화의 보고이며, 그 자체로 질곡의 역사가 남긴 유산이다. 그리고 이 오래된 우리의 유산은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록 현재 여러 소유주에 의해 나누어져 있지만, 제주도민 공동의 공유재산이다. 바로 이러한 인식을 공유할 때, 제주시 구도심의 활성화를 위한 도시발전 구상과 문화유산 활용의 전략을 수립할 수 있으며, 그 활용의 성과를 도민 모두가 골고루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공공의 자산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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